국군의 뿌리가 된 한국광복군

김삼웅 2025. 5. 17.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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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 29] 임시정부의 일관된 목표는 자주독립이었다.

[김삼웅 기자]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마치고(중경, 1947.9.17.) 광복군은 임정 산하의 정규군이었다.
ⓒ 백범김구사진자료집
장준하와 그의 동지들이 참여하는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국 중경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창설되었다. 한국광복군은 소규모의 병력으로 구성된 부대였지만, 역사적인 의미는 지극하다. 그 의미를 살핀다.

첫째, 1907년 (융희 1) 7월 정미비밀각서를 통해 일제에 의해 한국군대가 강제 해산된 지 33년 만에 비록 해외에서지만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창설되었다. 국권침탈 이래 의병·독립군이 국군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둘째, 임시정부는 1941년 10월 10일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교부장 명의로 '대일선전성명'(선전포고)을 하였다. 광복군의 창설로서 가능한 선전포고였다. 군대가 없는 선전포고란 세간의 조롱거리에 불과하지만 광복군의 존재로 하여 선전포고의 실효성을 보여주었다.

셋째, 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전에 참전함으로써 1943년 11월 27일 연합국 측의 루스벨트 미대통령, 처칠 영국수상, 장개석 중국총통이 카이로에서 채택한 공동 코뮤니케(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인 보장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넷째, 1938년 10월에 창설된 조선의용대 본부대원들이 광복군에 합류함으로써 전력의 보강은 물론 좌우합작이라는 정치적 성과를 거두는 기반이 되었다. 1942년 4월 20일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합류를 결정하고, 김원봉을 부사령관에 이어 임시정부 군무부장으로 선임하였다.

임시정부의 일관된 목표는 자주독립이었다.

이를 위해 우리 군대를 조직하여 일제와 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의 나라에서 독자적인 군대를 갖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과 한국특무대독립군 등 중국군대에서 겪은 우리 독립군의 뼈아픈 한계와 경험도 남아 있었다. 예산과 훈련장소와 인력 등 모든 것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상황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중국정부는 파죽지세로 침략해 오는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한국군대를 임시정부에 창설하는 것이 손해 볼 일만은 아니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김구가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함으로써 그에 대한 신뢰도 크게 작용하였다. 윤봉길 의거 등 항일투쟁의 성과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군무부 산하에 만주독립군 출신을 중심으로 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전시태세를 갖추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러한 군사활동 계획이 광복군창설로 이어져 추진되는 배경이 되었다.

김구 주석은 주가화를 비롯한 중국정부 요인들을 만나 한국광복군 창설의 필요성을 설명하였다.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편성하여 대일전을 수행하고, 일본군에 있는 한국출신 사병들을 빼내면 적군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과 "화북을 안정시키려면 먼저 동북을 수복해야 하고, 동북을 수복하려면 한국독립을 원조해야 한다."라고 설득하였다.

김구는 1940년 5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주석) 명의로 <한국광복군편간계획대강>을 장개석에게 제출하였다.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편성하여 한중연합군으로서 중국군과 함께 항일 연합작전을 전개한다는 것으로, 중국정부에 이에 대한 인준과 소요되는 재정적 지원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장개석은 이 계획을 승인하였다. 그리고 중국군사위원회 군정부(軍政府)에 한국광복군 창설에 필요한 조처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실무자들이 까다로운 조건을 달았다. 한국광복군이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김구는 다시 한국담당 책임자를 만나 담판을 벌였다. 광복군의 독립성과 자주권을 임시정부가 갖지 않으면 차라리 군대를 창설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한편 자력으로 광복군 창설을 추진하였다. 중국정부와 사전 협의 없이 우선 조직해 놓고 중국측의 승인과 협조는 나중에 교섭한다는 뱃장이었다.

만주에서 독립군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던 이청천·유동열·이범석·김학규 등을 중심으로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들로 하여금 광복군 창설에 대한 구체적인 실무작업을 추진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만주독립군 출신의 군사간부들과 중국의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서 복무하고 있는 한인청년들을 소집하여 총사령부를 구성한다는 것과, 이를 기반으로 1년 이내에 3개 사단을 편성한다는 부대편성 방안을 마련하였다.

먼저 총사령부가 구성되고 단위부대는 병력의 모집에 따라 편제토록하였다. 병력의 동원이 쉽지 않았던, 이국땅에서 창설한 광복군의 어쩔 수 없는 형편이었다.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조직조례〉를 마련하고, 이에 따라 총사령부는 임시정부 주석 직할하에 두기로 했다. 광복군의 통수권이 김구 주석에 주어진 것이다.

광복군의 조직은 실제로 광복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과 그를 보좌하는 참모장을 중심으로 10개의 처(處)와 특무대 그리고 헌병대를 두는 편제였다. 단위부대로 제1, 제2, 제3지대(뒤에 제5지대 편성)를 두고, 지대를 사단규모로 상정하였으나 실제 병력은 이에 훨씬 미치지 못하였다. 총사령은 이청천, 참모장 이범석이었다.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면서 편제가 바뀌어 조선의용대가 제1지대, 기존의 제1·제2·제5지대가 통합하여 제2지대로 재편되었다. 편성 당시 지대의 대원들은 약 80명이었다.

<한국광복군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한국광복군선언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원년(1919)에 정부가 공포한 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 원수의 특별허락으로 중화민국 영토 내에서 광복군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22년 (1940)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함을 자에 선언한다.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

과거 30여년간 일본이 우리 조국을 병합 통치하는 동안 우리 민족의 확고한 독립정신은 불명예스러운 노예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무자비한 압박자에 대한 영웅적 항쟁을 계속하여 왔다. 영광스러운 중화민족의 항쟁이 4개년에 도달한 이때, 우리는 큰 소망을 갖고 우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우리의 전투력을 강화할 시기가 왔다고 확신한다.

덧붙이는 글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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