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 취소했지만...' 국민의힘, 뿌리를 아는 정당이었다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5. 5. 17.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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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간판 바꿔가며 목숨 부지한 민정당과 그 계승자들

[김종성 기자]

 육군 특수전사령관 시절의 정호용
ⓒ 김충립 전 보안반장 제공
국민의힘 중앙선거대책위원회가 지난 14일 저녁에 상임고문으로 위촉했다가 그날 밤중에 해촉한 정호용 전 국방부 장관은 1980년 광주 학살의 '1등 기여자'다. 5·18 당시 육군 특수전사령관이었던 그는 그것이 공로로 인정돼 훈장까지 받았다.

정호용은 지금뿐 아니라 1980년대에도 5·18 학살 책임을 부인했다. 1988년 11월 17일 자 <한겨레>는 "당시 3, 7, 11공수여단이 사태 진압에 투입된 것은 사실이나 나는 이를 지휘한 적이 없으며, 이들 부대는 31사단과 전남북계엄분소의 작전통제권 아래 있었다"는 정호용의 항변을 들려준다. 자기 부대가 광주에 투입된 것은 사실이지만 5·18 동안에는 자신이 아닌 다른 장교가 지휘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의 총무처에 보관됐던 자료는 전혀 다른 증언을 한다. 위 기사는 전날 총무처가 국회 광주특위에 제출한 자료를 근거로 "광주항쟁에 대한 진압과 관련, 정호용 당시 특전사령관, 박준병 당시 20사단장, 최세창 당시 3특전여단장 등 3명이 충무무공훈장을 받는 등 모두 77명의 군인과 부대가 훈장 및 표창을 받은 것으로 16일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같은 날 <동아일보> 기사 "정호용·박준병·최세창 씨 등 80년 광주 직후 훈장"은 "육군 특전사와 20사단도 부대 표창(대통령 표창)을 받았다"고 알려준다. 특전사령관 정호용과 특전사 부대가 광주 진압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함께 상을 받았다. '사령관 따로, 부대 따로'였다는 정호용의 주장과 어울리지 않는다.

위 <한겨레>에 실린 또 다른 기사에 따르면, 광주 진압작전인 충정작전을 수행한 군인들에게 부여된 훈장은 충무무공훈장·화랑무공훈장·인헌무공훈장이다. 1980년 당시의 상훈법(법률 제2447호)에는 "충무무공훈장은 무공훈장 3등급으로, 화랑무공훈장은 무공훈장 4등급으로, 인헌무공훈장은 무공훈장 5등급으로" 간주한다는 부칙 규정이 있었다. 정호용이 받은 훈장은 1980년 6월 20일에 수여된 훈장 중에서 가장 높았다. 자신은 광주 학살과 무관하다는 정호용의 주장이 무색해진다.

숙소가 아닌 상황실을 학살 현장에 뒀다

5·18 당시 국방부 장관인 주영복의 국회 청문회 증언에서도 정호용이 거명됐다. 공군참모총장 출신이라서 전두환 신군부의 이해관계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웠던 주영복은 정호용의 광주 진압 공로가 인정돼 훈장이 수여된 것이라고 증언했다. 1988년 11월 19일 국회 광주청문회 현장에서 오고 간 주영복과 이해찬 당시 평화민주당 국회의원의 질의응답이 다음날 <한겨레>에 실렸다.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은 이렇다.

- 광주학살 뒤 정호용·박준병·최세창 씨 등에게 충무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전투에서 공을 세웠는가?
- 전투는 아니었다.

- 전투는 아니라 해도 비상사태에서 소요사태 진압에 공을 세웠다는 것인가?
- 당시 생각으로는 그랬으리라 본다.

- 정호용 씨는 광주 진압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데.
- 광주에 내려간 것은 알고 있다.

- 부대 방문이지 지휘권이 없어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진압에 참여하지도 않은 정씨가 훈장을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 반드시 전투나 시위 진압을 지휘했다고 해서 훈장을 주는 것이 아니라, 후방에서 지원을 한 사람에게도 훈장을 수여할 수 있는 것이다.

- 정씨가 어떤 지원을 했다는 말인가?
- 잘 모르겠다.

주영복 당시 장관은 '정호용이 광주에 갔으며, 전투 현장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후방 지원 때문에 공로를 인정받았을 수 있다'는 식으로 증언했다. 정호용은 위관급이나 영관급이 아닌 투스타였다. 그가 진압 현장에 있었다는 게 오히려 어색하다. 전투 현장과 떨어진 후방에서 지원했을 수 있다는 당시 국방부 장관의 증언은 정호용의 진압 책임을 사실상 긍정하는 측면이 있다.

전두환은 자신이 육사 동기인 정호용을 매개로 광주 학살을 지휘했다는 주장을 부담스러워했다. 그래서 전두환이 내세운 반박 논리 중 하나는 광주에 설치된 특전사 상황실의 의미를 축소하는 것이었다.

<전두환 회고록> 제1권은 지휘관 사무실에는 참모와 상황장교의 공간뿐 아니라 물적 설비도 갖춰져야 한다면서 "광주에 내려갔을 때 정호용 사령관이 사용하던 방은 이러한 요소를 갖추지 못한 잠시 머물던 작은 공간에 불과했다"고 주장한다. 자신은 광주 진압과 무관하다는 전두환은 정호용의 광주 사무실이 좁은지 넓은지까지 알고 있었다. 정호용의 광주 활동에 대해 전두환이 세심한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친구를 비호하는 전두환도 정호용의 임시 사무실이 광주에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지 못했다. 숙소가 아닌 상황실을 학살 현장에 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민정당과 그 계승자들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
ⓒ 권우성
1980년대의 미국은 한국에 대해 지금보다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한국의 사정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1979년까지 미 중앙정보국(CIA)에서 근무하고 1981년부터 레이건 행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인 리처드 알렌의 참모로 일하고 1982년부터 타이완미국연구소장으로 일하다가 1986년에 주한미국대사로 부임한 제일스 릴리도 한국 사정을 잘 알았다.

릴리는 회고록인 <중국통(China Hands)>에서 1987년 6월항쟁 당시의 전두환은 군대 동원을 검토했지만 1980년 광주 진압의 주역들은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원하지 않았다면서 그중 대표적 인물로 정호용을 거명했다. 릴리의 회고는 이렇다.

"전두환 대통령이 시위대를 무력 진압하라고 명령해도 모든 군인이 따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징조가 보였다. 7년 전 광주 현장에 있었던 한국 장성들이 아직 남아 있었고, 그들도 나와 같이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직감이 들었다. 대표적으로 광주 진압 특수부대 사령관이었던 정호용 장군은 민간인 동요에 대한 군사력 투입을 반대했다."

릴리는 광주 진압에 참여한 장군들을 언급하면서 정호용을 거명했다. 이들이 6월항쟁 유혈진압을 반대해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미국은 자국의 지원을 받는 전두환 정권의 유혈진압으로 인해 한국인들의 반미감정이 확산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래서 전두환의 군대 동원을 막아야 했던 릴리는 자신과 생각을 같이하는 유력 한국인들에게 주목했다. 그가 주목한 대상은, 광주 진압에는 참여했지만 6월항쟁 유혈진압에는 반대하는 전현직 장성들이었다. 정호용은 그중 하나였다.

미국의 한국 정책을 현장에서 지휘하는 미국대사가 정호용의 광주 진압 경력을 알고 있었다. 광주 진압을 간접적으로 도운 미국이 그 진압에 참여한 한국 장성들의 신상 정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정호용은 1980년 5월의 기여도를 인정받아 훈장까지 받았다. 이런 인물을 국민의힘이 선대위 상임고문으로 위촉한 것은 사실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5·18민주화운동기념일을 코앞에 두고 이런 일을 벌인 것 역시 이상할 게 없다.

이승만의 자유당은 4·19혁명을 계기로 명맥이 끊기고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은 10·26사태로 사실상 와해됐지만,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은 6월항쟁 뒤에도 계속 당명을 바꿔가며 용케 목숨을 부지했다. 민정당은 김영삼과 이회창 같은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6월항쟁 이후의 40년 세월을 버텨왔다.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후보도 1990년대에 들어간 외부 인사다. 민정당과 그 계승자들은 때마다 간판을 바꾸고 외부세력을 끌어들여 유지해 온 정치세력이다.

정호용의 고문 위촉은 국민의힘 내의 민정당 뿌리가 아직 완전히 썩지 않았으며 그때의 DNA가 여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금방 취소하기는 했지만, 광주 학살에 참여한 일로 인해 훈장까지 받은 인물을 상임고문으로 위촉한 일은 국민의힘이 뿌리를 아는 정당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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