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지도자, 처칠과 이승만을 생각한다
지난 35년간 영국에서 살고 있다. 영국 여성과 결혼해 애 낳고 살며 느낀 점이 '밤하늘의 별' 만큼 많다. 자녀들은 초·중·고·대학교를 영국에서 나와 지금은 다 독립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아무리 영국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도, 나는 자주 한국이 그립다. 한국의 문화, 냄새, 심지어 소음까지도 그립다. 전에 가족과 함께 한국에 갔다. 그런데 한국에 머무는 동안, 이번에는 영국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영국의 문화, 풍경, 심지어 영국의 날씨까지도 말이다.
이상하게도, 영국에 있을 땐 한국이 그립고, 한국에 있을 땐 영국이 그립다. 어쩌면 나는 욕심쟁이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중국적자'는 아니지만 분명히 '이중감정자'다. 하지만 그게 바로 나다. 삶이 힘들고 슬플 땐, 우리는 평화로운 천국을 그리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평화로운 천국에 있더라도, 우리는 이 바쁘고 소란스러운 삶이 그리워질 수도 있다. 자, 이제 그러면 내가 느끼는 한국과 영국의 전시 지도자 이승만과 처칠에 대해 나누고 싶다. <기자말>
[김성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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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영기 |
| ⓒ 김성수 |
"왜 한국영화는 해피 엔딩이 없는 거예요?"
순간, 대답이 막막했다. 그러고 보니 대다수의 영미권 영화는 해피 엔딩과 희망의 메시지를 남긴다. 며칠 동안 그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다 문득 '역사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눈물을 닦고 다시 써야 하는 한국역사"
영국 역사서를 읽으면 통쾌함이 느껴진다. 1628년의 <권리청원>을 읽었을 때의 전율은 아직도 생생하다.
"국민은 함부로 체포·구금될 수 없으며, 군법으로 재판 받지 않는다. 왕은 의회 동의 없이 과세할 수 없다."
반면 1970년대 한국에선 장준하 선생 같은 민주화 인사들이 독재자 박정희가 만든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국민의 권리는 여전히 위태로웠다. 사상가 함석헌의 말을 빌리면 한국역사는 "눈물을 닦고 다시 써야 하는 역사"인 것이다.
이런 차이는 역사 속 '지도자' 역할과도 맞닿아 있다. 특히 20세기 중반, 이승만(1875~1965)과 윈스턴 처칠(1874~1965)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지도자의 민 낯을 극명하게 드러낸 인물들이다. 둘은 한 살 차이로 같은 해 세상을 떠난 문자 그대로 동시대인이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전 지구적 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국민의 생명과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처칠은 유럽대륙을 뒤덮은 나치의 공포 속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한 지도자로, 이승만은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 민간인 학살을 방조한 지도자로 기억된다.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전혀 다른 유산을 남긴 두 전시 지도자. 그들을 비교하는 일은 단지 역사적 흥미를 넘어서, 오늘 우리가 지도자를 어떻게 선택하고, 평가하며 기억해야 하는지를 묻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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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칠. |
| ⓒ wiki commons |
그러나 처칠은 국민을 숨기거나 속이지 않았다. 그는 국민을 전쟁의 동반자이자 주체로 봤다. 그리고 민주적 통제 속에서 전시 내각을 이끌었다. 독일의 드레스덴 폭격 같은 논란이 있음에도, 그의 지도력은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잃을 뻔했던 민주주의를 구한 상징"으로 기록된다.
처칠은 심지어 자신의 며느리를 이용해 미국의 비밀정보를 빼낸다. 이후 미국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처칠이 자신의 며느리와 아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영국을 전쟁의 승리로 이끌도록 한 일화는 유명하다(관련 기사 : "이승만 위해 속옷 벗어던지고 논개가 됐다").
지난 2002년 10월 BBC는 영국인 100만 명을 대상으로 한 달간 여론조사를 벌여 '위대한 영국인 Great Britons' 100명을 선정했다. 그 중 윈스턴 처칠은 전체 응답자의 28.1%의 지지를 얻으며 '가장 위대한 영국인' 1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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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만 대통령이 도쿄 하네다 공항 출발에 앞서 재일 동포로부터 환송 꽃다발을 받고 있다(1950. 2. 18.). |
| ⓒ 박도/NARA |
그 결과 수많은 서울시민들이 피난도 못가고 납북되거나 학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9.28서울수복' 뒤에는 오히려 '서울을 사수한다'는 자신의 말을 믿고 피난을 못간 서울시민들을 '부역자'라며 학살했다. 자신에 잘못에 대해선 침묵으로 일관한 지도자였다.
특히 '보도연맹학살'은 이승만이 자행한 혹은 최소한 방조한 국가폭력의 절정이었다. 좌익전향자 명단에 포함된 수만 명이 적과 내통할 가능성이 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재판도 없이 즉결 처형되었다. 내가 몸담았던 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그 희생자는 약 20만 명에 이른다. 처형은 체계적이고 전국적으로 이뤄졌고, 그래서 이승만이 이를 '전혀 몰랐다' 고 보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전쟁, 지도자의 거울이 되다... 우리는 어떤 지도자를 기억하고 선택해야 할까
두 지도자는 모두 '전시'라는 극한상황에서 국가의 운명을 짊어졌다. 그러나 처칠은 국민과 운명을 공유했고, 이승만은 국민을 통제와 희생의 대상으로 여겼다. 처칠이 '공존'을 고민했다면, 이승만은 '제거'를 선택했다.
물론 처칠의 전쟁수행이 완벽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전쟁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고, 지도자로서 국민 앞에 섰다. 반면,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명분아래 국민의 기본권과 생명권을 유린했다. 전쟁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전시 지도자의 최소한의 윤리다.
오늘날 우리는 이승만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으로서 그의 공은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보도연맹학살과 4.19혁명까지 이어진 권위주의 통치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었다.
반면 처칠은 전쟁의 영웅으로 기억되지만, 전후 총선에서 국민의 선택을 받지 못했고, 결국 민의를 겸허히 수용했다. 이 또한 민주주의 지도자의 면모다.
두 인물의 대비는 전쟁이라는 위기상황에서 지도자의 도덕성과 정치적 판단력이 어떻게 역사적 평가를 가르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는 지도자를 승리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 그가 지킨 가치, 그가 보호한 사람들, 그리고 그가 외면한 목소리까지 기억해야 한다.
2025년은 한국전쟁 발발 75주년이다. 여전히 제대로 된 사과도, 진상규명도 이뤄지지 않은 보도연맹사건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전쟁의 혼란을 틈타 무고한 국민을 학살한 지도자를, 우리는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지도자를 미래에 요구할 것인가. 오는 6월 3일 대선에 우리의 한 표가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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