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1일 근대시민운동의 시초, 동학농민혁명기념일

용인시민신문 정정숙 2025. 5. 14.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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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 발굴 - 동학 농민혁명과 용인

5월 11일은 동학농민혁명기념일이다. 올해는 반봉건 반외세에 항거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지 7회째 되는 해이다. 근대시민운동의 시초가 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가치를 높이 사서 정부는 2004년 3월에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다.

이어 2019년 동학농민혁명기념일을 법정기념일로 제정, 공포했다. 이로써 그동안 역사적 가치를 저평가 받았던 동학농민혁명은 바야흐로 제대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이 202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됨으로써 대한민국 시민정신의 시초인 동학농민혁명정신은 세계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본지는 정정숙 경기도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장의 연재 글을 통해 동학농민혁명과 용인에서의 활동을 발굴해 최초로 싣는다. <기자말>

[용인시민신문 정정숙]

 전봉주 장군과 동학농민군상
ⓒ 용인시민신문
 올림의 기둥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정읍)
ⓒ 용인시민신문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기까지에는 그 정신적 근간을 이루었던 사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동학사상이었다. 동학은 1860년 경주에서 최제우(崔濟愚·1824~1864·호:수운水雲) 선생에 의하여 창도되었다. 수운선생이 주창한 시천주(侍天主) 동학사상은 인간에게는 신성(神性, 동학을 이어 받은 천도교에서는 한울님으로 통칭하고 있다. 동학은 1905년 손병희 선생에 의해 천도교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이 내면에 존재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모두 평등하며 존엄하다." 라는 뜻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널리 알리면서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수운선생은 "내가 동에서 나서 동에서 학문을 받았으니 동학이라고 칭하며 도(道)로 말하면 천도(天道)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집에 있던 여종(여자 노비) 2명 중 1명은 며느리로 삼았고 또 1명은 수양딸로 삼았다. 당시 조선사회는 양반과 천민이 서로 대등해질 수 없는 신분제 사회였으며 노비는 사고 팔 수 있는 물건과 같은 존재이며 죽여도 아무런 죄를 받지 않는 양반들만의 특권사회였다. 이러한 사회에서 여종 두 명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사건은 천지가 개벽할 만한 사건이었다. 이처럼 수운의 인간 존엄 시천주 사상은 양반들과 조선 조정에서 반길만한 사상은 아니었다.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 선생 존영사진
ⓒ 용인시민신문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두 손을 들고 반겼다. 수운선생의 뒤를 이어 동학의 두 번째 교조인 최시형(崔時亨·1827~1898. 본명 최경상. 호: 해월海月) 선생은 수운 선생의 시천주 진리를 이어받아 '사람 섬기기를 하늘과 같이 섬겨라(사인여천 事人如天)' 뿐만 아니라 하늘, 땅, 사람이 어울려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만물이 하늘 아님이 없으며 일마다 다 한울이 하는 일이다(物物天 事事天)', 따라서 '인간은 하늘 땅 자연과 어울려 모두 형제로서 하나로 돌아가야 한다(人吾同胞 物吾同胞 同歸一體)' 등의 진리를 설파하였다.

21세기 지구 온난화, 기후 위기 문제가 심각해지는 현대에 해월선생의 인오동포 물오동포 법설은 18세기에 이미 앞날을 예견한 것이다. 그리고 해월선생은 여성과 어린아이도 한울을 모셨으니 귀히 여기고 함부로 때리자 말라고 하였다. 여성의 인권과 어린아이의 인권을 주장한 것이다. 이 사상은 일제강점기에 여성운동, 어린이운동과 연결된다.

해월선생의 뒤를 이어 손병희(孫秉熙·1861~1922·호:의암義菴)선생이 동학의 제3대 교조가 된다. 손병희 선생은 시천주, 사인여천 사상을 이어받아 인내천(人乃天) 인 '사람이 곧 한울이다'를 널리 세상에 알리게 된다. 손병희 선생은 동학농민혁명때 북접 통령으로 지도력을 발휘하게 되고 일제강점기에는 교육운동, 출판운동, 사회운동 등 독립운동가로 활동을 하게 되며 민족대표 33인의 지도자로 3·1운동을 기획하고 전국화 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동학농민혁명의 시작
 경주 용담정 수운선생 깨달음을 얻은 장소
ⓒ 용인시민신문
경상도에서 시작한 동학은 전라도와 충청도, 황해도 지역까지 한반도 전역에 퍼져 나갔다. 동학의 수운선생이 좌도난정율(左道亂正律)이라는 억울한 죄명으로 돌아간 후 동학 교도들은 수운선생의 억울한 누명과 지방관원들로부터 탄압 받는 동학도들의 생존권 보장을 호소하는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892년 10월 20일경 충청도 공주에 1천여명이 모인 이후 10월 27일에는 전라도 삼례에 도회소를 마련하고 각 포에 경통을 보내고 11월 2일경 전라감영에 '각도 동학유생 의송단자'를 발송했다. 1893년 2월에는 광화문 앞에서 복합상소를 하였다. 광화문 집회에서는 교조신원운동뿐만 아니라 미국 프랑스 일본 등의 영사관 학당 교회당 등에 '척왜양(斥倭洋)'의 괘서를 붙이기도 하였다.

조정에서는 동학도들에게 "너희들은 각기 집으로 돌아가 직업에 충실하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칙령를 내려 동학도들은 칙령을 믿고 일단 철수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약속을 어기고 소를 작성하는 두목들을 기한내 체포하라고 하였다. 조정의 태도는 바뀌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동학도들에 대한 탄압이 더 가중되었다.
 접주임명장 유네스코등재기록물
ⓒ 용인시민신문
이에 해월선생은 통유문을 내려 동학도들을 보은 장내리에 모이게 하였다. 보은취회에서는 신원운동 뿐만 아니라 보국안민, 척왜양창의 운동을 대규모로 전개하였다. 3월 15일에는 충청, 전라도, 경상, 경기 등에서 3만명의 동학교도들이 모였다. 충의대접주 손병희, 청의대접주 손천민, 호남대접주 남계천 등 약 50개의 포가 조직되었다. 보은취회에 참여하지 못한 동학도들은 삼례에 수천 명이 모였으며, 금구 원평 등지에도 1만여 명이 모여 집회를 하였다. 어윤중이 조정에 올린 장계를 보면 "동학군들은 질서정연하게 모임을 진행하면서 작은 병기도 소지하지 않았으니 이는 곧 민회(民會)라 하여 다른 나라에서는 백성생활에 불편함이 있으면 회의를 열어 토의 결정하는 것이 최근의 사례인데 어찌하여 비류라고 규정해 버리는가"라고 했다.

지방 관속들의 동학도들에 대한 박해와 약탈이 심해지고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가 점점 심해지고 있는 가운데 전라도 고부지역에서 고부군수 조병갑의 혹독한 가렴주구가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조병갑은 이평면에 있는 만석보 밑에 농민들을 강제로 일을 시키면서 새로운 보洑를 만들고 수세를 과다하게 거두어 들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비각을 세우는 등 노동력 착취와 수탈 등이 극에 달했다.

이에 시정을 요구하는 전창혁(全昌赫, 전봉준의 아버지)을 곤장을 쳐서 죽게 만든 사건이 터졌다. 훈장을 하고 있던 전봉준은 억울한 아버지의 죽음을 무릅쓰고 만석보의 수세감면 시정을 요구하였으나 묵살 당하였다. 이에 극비리에 사발통문-砂鉢通文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엎어 그린 원을 중심으로 참가자의 명단을 빙 둘러가며 적은 통문. 1968년 12월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고부면 송준섭(宋俊燮)의 집 마루 밑에 70여년 동안 묻혀 있던 족보 속에서 발견되었다. 전봉준(全琫準)을 비롯한 동학 간부 20여 명이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宋斗浩)의 집에 모여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이하 악리(惡吏)들을 제거하며, 이어 전주감영을 함락시키고 서울[京師]로 직향(直向)할 것을 결의한 것이다.

서명자는 전봉준, 송두호, 정종혁, 송대화, 김도삼, 송주옥, 송주성, 황홍모, 최흥열, 이봉근, 황찬오, 김응칠, 황채오, 이문형, 송국섭, 이성하, 손영호, 최경선, 임노홍, 송인호까지 총 20인-을 만들어 돌리면서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사발통문 내용은
ⓒ 용인시민신문
계사(1893년) 11월 일각 마을의 마을 집강(執綱) 귀하위와 같이 격문을 사방에 빨리 전달하니 사람들의 논의가 비등하였다. 매일 멸망할 것이라고 노래하던 민중들은 곳곳에 모여서 말하되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 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어디 남아 있겠나" 하며 기일이 오기만 기다리더라.

이때에 도인(道人)들은 전후의 방책을 토의·결정하기 위하여 고부(古阜) 서부면(西部面) 죽산리(竹山里) 송두호(宋斗浩)의 집으로 도소(都所)를 정하고 매일 운집하여 순서를 결정하니 그 결의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목을 베어 매달 것.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군수에게 아첨하여 백성들을 괴롭힌 탐관오리들을 처단할 것.
전주 감영을 함락하고 한양으로 곧바로 진격할 것.

거사는 1894년 1월 10일로 정하고 말목장터에 집결하도록 극비리에 연락하였다. 이날 새벽에 모인 동학도 1천여명은 죽창과 곡괭이 등을 들고 고부읍을 습격하였다. 조병갑은 담장을 넘어 도망쳤고 고부관아를 점령한 동학농민혁명군들은 옥에 갇힌 백성들을 풀어주고 강제로 징수한 수세미(水稅米)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만석보 아래 새로 만든 보를 부수어 버렸다.

동학군이 고부관아를 점령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각지의 동학접주들은 동학군들을 거느리고 고부읍으로 모여 들기 시작하였다. 3월 중순경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은 무장에 4천여 명을 집결시킨 후 호남창의소 명칭으로 창의문을 발표하고 고부읍을 습격하였다. 고부읍 점령 이후 백산에서 편제를 마련하고 전봉준을 동도대장으로 추대, 총영관에 손화중, 김개남을 총참모에 김덕명, 오시영 등 조직을 정비하고 4대 강령과 12개조 기율을 정하였다.

백산에서 대오를 정비한 동학군들은 금구와 부안을 점령하고 황토현에서 대승을 거두게 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용인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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