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여행 가기 전에, 이건 기억합시다
[이준목 기자]
|
|
| ▲ tvN <벌거벗은 세계사> 방송화면 갈무리 |
| ⓒ TVN |
하지만 하와이는 본래 미국의 땅이 되기 전 원주민들의 터전이었다. 하와이가 오늘날의 평화로운 지상낙원으로 거듭나기까지, 전쟁과 폭력, 학살, 착취 등 수많은 비극의 역사를 거쳐야 했던 아픈 과정이 있었다.
13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비극의 섬 하와이는 어떻게 최고의 휴양지가 됐나'편이 그려졌다.
하와이의 어원은 '신들이 머무는 땅'이라는 의미다. 약 600여 년경 이곳에 정착했던 최초의 원주민이자 해양민족인 폴리네시아인들이 하와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가 됐지만, 20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하와이는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섬에 불과했다. 지리적으로 각 대륙들과 수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태평양의 외딴 섬이어다보니 외부에서 접근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여기에 넓은 영토가 140여 개에 이르는 수많은 섬으로 흩어지며 섬 사이의 교류도 부족해, 각 섬의 원주민들은 각자 고립된 생태계로 발전해왔다.
지금의 동아시아 대만 인근에서 거주하던 폴리네시아인들은, 나무로 만든 카누를 타고 오직 노를 저어서 육지에서 무려 8천 킬로미터 가까이 떨어진 바다를 넘어 하와이에 도착했다. 이후 하와이 원주민 사회는 부족 단위로 발전했고, 신분제도에 따라 고유한 종교와 문화 및 엄격한 사회체계를 형성했다.
외부세력의 등장, 비극의 시작
18세기 후반 평화롭던 하와이에 지각변동을 불러온 것은, 외부세력인 영국의 등장이었다.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은 1778년 하와이를 처음으로 발견한 인물이다. 원주민들은 쿡과 영국인들을 신성한 존재로 생각하고 공물을 바쳐가며 예우했다.
하지만 영국인들의 방문은 하와이에는 비극과 재앙의 시작이었다. 영국인들로 인해 오랜 항해 기간 발생했거나 유럽에서 가져온 전염병들이 원주민들에게 전파됐다. 1년만에 매독과 임질, 결핵 등이 급격히 확산됐다. 70만 명이던 하와이의 전체 인구가 반세기 만인 1840년대에는 11만명까지 줄었을 정도였다.
영국이 하와이에 가져온 또다른 비극은 '금속 무기'의 등장이었다. 하와이인들의 문명 수준은 당시만 해도 석기시대에 머물러 있었다. 원주민들은 영국인들이 가져온 금속 무기의 파괴력에 열광했다. 하와이에서 강력한 세력을 이끌고 있던 원주민 족장 카메하메하 1세는 영국에서 총잡이를 고용하고 총과 대포를 구입하며 5번의 주요 전쟁을 일으켜 하와이의 대부분을 복속시켰다. 1795년, 카메하메하 1세는 최초의 통일왕국인 '하와이 왕국'을 수립했다.
19세기 미국의 등장은 하와이의 판도를 또 한번 흔들어 놓았다. 미국인 선교사들은 하와이에 기독교를 전파하며 엘리트 지배계층으로 자리잡아갔다. 카메하메하 1세의 왕비 카아후마누 여왕은 아예 기독교로 개종했고 미국 선교사들의 하와이 백성 교육을 허가했다.
미국 선교사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하와이의 전통 신앙과 문화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원주민들의 제사의식이었던 '훌라'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이단으로 규정하며 금지시켰다. 미국인들은 점차 정부 요직에 진출해 정치까지 개입하기에 이른다.
미국 자본가들도 기회의 땅인 하와이에 진출했다. 그들은 고온다습하고 강우량이 풍부한 하와이의 기후를 이용해 헐값에 곳곳에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을 조성했고, 저임금으로 원주민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며 막대한 수익을 거둬들였다. 1850년대부터 중국, 일본을 통해 아시아에서도 노동자들을 데려왔고, 1903년에는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에 도착한 최초의 한인 이민자들도 등장했다. 이는 훗날의 하와이가 대표적인 다문화 사회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1850년에는 '외국인 토지 소유법'이 통과되며 외국인들도 하와이에서 정식으로 토지 소유가 가능해졌다. 하와이 왕국 토지의 전체 99%는 고위층과 미국 자본가들의 차지가 됐다. 1875년에는 하와이산 설탕을 미국에 무관세로 수출하는 조약이 체결되면서, 왕국의 수출중 95%의 비중을 설탕이 차지한다. 이로서 하와이 왕국은 사실상 미국의 경제 식민지로 전락했다.
심지어 하와이에 진출한 미국인 자본가와 엘리트들은 비밀 결사대인 '하와이안 리그'를 창설하고 왕국의 각종 법을 미국인들에게 유리하게 개정하면서 자신들의 이익과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1875년 미국은 하와이 왕국에 무관세 혜택을 주는 조건으로 진주만 사용권을 요구했다. 미국은 지리적 요충지였던 진주만을 태평양 진출을 위한 전진기지로 삼으려고 했다.
하와이 왕국이 진주만을 내주는 것을 거부하자 하와이안 리그는 민병대를 동원해 왕궁을 포위하고 조약을 승인하도록 협박했다. 당시 칼라카우아 국왕은 무력 압박에 굴복해 미국과의 조약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미국인들은 하와이 왕국의 정치를 장악하기 위하여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일정 이상의 재산을 지닌 이들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했다. 가난한 하와이 원주민들은 투표권을 잃고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됐다.
하와이의 8대 국왕이었던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은, 미국에 대항해 자주권을 찾으려고 했던 인물이다. 여왕은 원주민 투표권을 회복하고 진주만 사용권을 포함해 미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무효화하려고 했다. 이에 반발한 하와이안 리그는 1893년 수도 호눌룰루에서 쿠데타를 주도했다. 하와이안리그는 미군 해병대를 끌어들여 왕궁을 점령하고 여왕을 감금하며 퇴위와 임시정부 수립 승인을 요구했다.
여왕은 결국 인명피해를 막기 위하여 퇴위했으나 이후로도 국제사회에서 하와이 왕국의 억울함을 알리며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도 하와이에서는 마지막 군주였던 릴루오칼라니 여왕을 기리는 행사가 매년 개최된다. 여왕의 퇴위를 끝으로 원주민이 세운 최초의 통일 하와이 왕국은 98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어떻게 세계적 관광도시가 됐나
1894년 미국인들의 주도로 수립된 임시정부는 하와이 공화국을 선포한다. 사실상 미국의 위성국가였지만, 미국 정부는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을 의식하여 처음엔 하와이 공화국 합병에는 신중한 입장이었다. 그런데 1898년 필리핀에서 미국-스페인 전쟁이 벌어지면서 태평양의 전진기지로 하와이의 군사적 중요성이 부각된다. 그해 7월, 마침내 하와이를 미국의 정식 영토로 병합하는 '뉴랜즈 결의안'이 의회에서 통과된다.
이처럼 비극적인 역사를 겪었던 하와이는 어떻게 오늘날의 세계적인 관광도시가 됐을까. 20세기 들어 세계의 패권국가로 올라선 미국은 태평양의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하와이의 군사력을 증강했다. 1908년 진주만에 최초로 육해군 공동 기지가 건설됐고 1930년대 들어서는 일본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군사 기지가 더욱 확장됐다. 이로 인해 각종 산업시설과 숙박, 의료시설, 쇼핑, 요식업 등 다앙한 생활-문화 인프라도 구축되기 시작했다.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폭격으로 비롯된 태평양전쟁은, 번영하던 하와이에 잠시 위기를 불러왔다. 하지만 전쟁 이후에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하와이가 미국의 군사거점으로 적극 활용되면서 인구가 오히려 늘어났고, 전후에는 군용선박을 활용한 크루즈 관광산업이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군사시설로 활용되던 공항도 전후 민간인을 위한 공항으로 재단장했다. 또한 '제트비행기'의 등장으로 최초로 미국 본토에서 하와이로의 직항 운행이 가능해지면서 한층 접근성이 좋아진 하와이는 휴양지로서 더 주목받게 된다.
1959년 8월 21일, 미국 정부는 하와이를 미국의 50번째 주로 승격시키로 결의한다. 하와이 공화국을 병합한 이후 미국 영토이기는 했지만 정식 주로 편입된 상태는 아니었다. 이로서 더많은 경제적 지원이 가능해지면서 하와이의 인프라는 더욱 발전하게 된다.
하와이의 매력은 역시 천혜의 자연환경을 빼놓을수 없다. 하와이는 바다 서핑에서 활화산 체험까지 다양한 대자연을 두루 경험할수 있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하와이의 매력을 널리 알리게 된데는 대중문화의 영향력도 크게 작용했다. 1960년대 당대의 스타 엘비스 프레슬리가 주연한 <블루 하와이> 등의 헐리우드 영화들은 하와이를 배경으로 하여 관광지로서의 인지도와 호감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미국 정부는 1960년대 중반 이후 베트남전 참전군인들을 보상 차원에서 하와이로 휴가를 보내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참전 영웅들의 안식처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 또한 본래 하와이 원주민들의 문화였던 서핑은, '하와이 서핑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듀크 카하나모쿠 같은 인물들에 의하여 유명세를 타면서 관광객들과 서퍼들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다.
현재도 하와이는 이러한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와이에서는 자연 경관과의 조화를 위하여 유명 프랜차이즈 'M사'의 트레이드 마크인 빨간 비중과 로고를 지양하기도 했다. 산호초를 보호하기 위해 바다에 들어갈 때 선크림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이러한 꾸준한 노력과 관리 덕분에 하와이는 지금도 전세계인들이 사랑하는 힐링의 명소로 그 역사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하와이에 있을때 나는 한번도 사업, 걱정, 슬픔, 피곤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대문호 마크 트웨인이 하와이를 경험하고 남긴 헌사다. 오늘날 하와이는 더 이상 태평양의 머나먼 외딴 섬이 아니라 매년 전세계 수백만 명의 인구가 찾는 최대의 핫플레이스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그 성장의 이면에는,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희생당한 하와이 원주민의 역사와 아픔이 있었던 사실도 한번쯤은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건물 퇴거 요청에... 결국 목숨 끊은 노숙자
- 나보다 잘나가던 친구와 6년 만의 재회, 상황이 난감해졌다
- "영화 산업 위기... 독립영화인들, 생계 위해 가욋일도"
- "주우재 노래 잘하네..." 15년 만에 녹음, 멜론 1위 '이 곡' 뭐길래
- 뻔한 외출 지겹다면, 5월에만 갈 수 있는 축제 어떤가요
- 6년 동안 창고에 있던 영화, 배두나가 살렸다
-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역대급'이란 말 나오는 까닭
- 칸 영화제, 올해부터 레드카펫 '파격 노출' 없다
- 실제 연인인 두 배우가 주인공, 홍상수 영화의 비하인드
- 해외 입양인의 친부모 찾기, 감독이 20년 동행한 까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