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보아에서 만난 근현대 인물

이상기 2025. 5. 13.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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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 포르투갈에 가다 ②] 호드리게쉬와 퐁발

지난 3월 8박9일 동안 포르투갈을 여행했다. 리스보아를 포함한 남부 지역, 코임브라를 중심으로 한 중부 지역, 포르투를 중심으로 한 북부 지역이다. 이들 지역의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역사, 자연과 지리, 문화와 예술 그리고 사는 이야기 등을 살펴볼 것이다. <기자말>

[이상기 기자]

리스보아 공원에서 만난 호드리게쉬
 아말리아 호드리게쉬 공원 표지석
ⓒ 이상기
리스보아 움베르투 델가두 공항에 내린 우리 일행은 점심을 먹기 위해 시내로 이동한다. 20분도 걸리지 않아 아말리아 호드리게쉬(Amália Rodrigues: 1920~1999) 기념공원 앞에 차가 선다. 그곳에는 호드리게쉬 공원이라는 표지석만 서 있지 특별한 구조물이나 안내문이 보이질 않는다. 자료를 보니 1996년 상부 공원(Alto do Parque)으로 문을 열었고, 2000년 아말리아 호르리게쉬 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환경을 고려해서 원형의 호수를 만들고, 그 뒤로 테라스가 있는 레스토랑 겸 바를 운영하고 있다.
아말리아 호드리게쉬는 포르투갈 파두(전통음악) 최고의 파디스타(Fadista, 파두를 부르는 사람)다. 아말리아는 리스보아 페나(Pena) 지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가난하게 자랐고, 리스보아 부둣가에서 과일장수를 하기도 했다. 노래를 처음 시작한 것은 1935년경이다. 1939년에는 무대에 게스트로 초대받아 전문적으로 파두 공연을 하게 되었다. 그때 고전음악을 공부한 작곡가 페데리쿠 발레리우(Frederico Valério)를 만났다. 그는 그녀의 음악적 잠재력을 알아보고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춘 곡들을 작곡해 주었다.
 아말리아 호드리게쉬 공원
ⓒ 이상기
'질투 나는 파두(Fado do Ciúme)', '오 모라리아(Ai Mouraria)', '신이여 저를 용서해 주소서(Que Deus Me Perdoe)', '당신이 떠난 이유를 모르겠어요(Não Sei Porque Te Foste Embora)' 등이다. 이를 통해 1940년대 초반 그녀는 이미 유명한 파디스타가 되었다. 1946년에는 파두를 소재로 한 영화 <검은 외투>(Capas Negras)의 여주인공으로 출연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제 그녀는 라디오 스타에서 무비 스타로 발전했고, 그녀의 자전적 스토리 영화 <파두: 어떤 가수의 이야기>(1947)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녀의 명성은 에스파냐와 브라질까지 알려졌고, 1949년에는 파리에 거주하기도 했다. 1950년 국제적인 자선쇼를 하면서 그녀의 노래 '포르투갈의 4월(Avril au Portugal)'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이 노래는 주세 갈랴르두(José Galhardo)가 작시하고, 하울 페랑(Raul Ferrão)이 작곡했다. 1950년대 초에는 포르투갈 유명 시인이 그녀를 위해 가사를 써줄 정도였다. 1953년에는 미국의 ABC-TV에 출연했고, 1954년에는 할리우드 클럽에서 노래를 하게 되었다.
 아말리아 호드리게쉬 앨범
ⓒ Public Domain
"나는 4월에 당신과 포르투갈에서 보내는 꿈을 이뤘어.
그때 우리는 결코 해보지 못한 사랑을 했지.
몸이 구름 위로 둥둥 뜨는 것처럼 제 정신이 아니었어.
그래서 나는 미친 듯이 말했지: 당신을 사랑한다고." (포르투갈의 4월)
1957년에는 파리 올랭피아 홀 공연 실황이 앨범으로 제작되어 배포되기도 했다. 그녀는 50년대와 60년대 파리의 유명한 아티스트가 되었고, 1992년까지 파리에서 10시즌을 공연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1974년 4월 25일 혁명 이후 국가보안국 비밀요원이었다는 이유로 기소되기도 했다. 그녀는 실제로 포르투갈 공산당을 재정적으로 지원했고, 독재자 살라자르를 찬양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로 해서 그녀는 심적으로 크게 위축되었고, 70년대 후반에는 이탈리아어로 앨범을 내기도 했다.
 아말리아 호드리게쉬
ⓒ Public Domain
70년대 말 건강이 나빠져 잠시 무대를 떠났고, 80년대 들어 그녀의 자작시 또는 발레리우의 시에 곡을 붙여 만든 작품이 크게 히트했다. 대표작이 '눈물(Lágrima, 1983)'이다. 이 앨범은 몇 달 만에 120만 장이나 팔렸다고 한다. 1985년부터 1994년까지 그녀는 전 세계를 돌며 공연을 해 큰 성공을 거뒀다. 1994년 리스보아가 유럽의 문화수도가 된 것을 축하하는 기념공연을 마지막으로 무대에서 은퇴했다.
이듬해 폐수술을 받았고, 그 후에는 방송 출연과 기고 등을 하며 살았다. 그리고 과거 앨범들을 리바이벌해 앨범을 발매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세그레두(Segredo, 1997)'가 있다. 1998년 리스보아 엑스포에서는 국가로부터 훈장을 받았고, 1999년에는 1974년 민주화 이후 가장 중요한 포르투갈인(25명) 중 하나가 되었다. 그해 10월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포르투갈 국립묘지에 묻혔다.
 4월 25일 혁명 기념탑
ⓒ 이상기
호드리게쉬 공원 뒤로는 교도소가 있다고 하는데, 가이드는 이곳을 국립호텔이라고 소개한다. 우리는 이제 호드리게쉬 공원 건너편 에두아르두 7세 공원을 찾아간다. 에두아르두 7세는 영국왕 에드워드 7세를 가리킨다. 그는 1903년 포르투갈을 방문해 포르투갈과 영국의 동맹을 확고히 했다. 에드워드 7세의 방문 이전, 이 공원은 자유공원으로 불렸다. 그래서 공원 남쪽으로 뻗은 대로가 자유로(Avenida da Liberdade)다.

공원 북쪽 길옆에 독특한 구조물이 있다. 이것은 주앙 쿠딜레이루(João Cutileiro)가 1974년 4월 25일 무혈혁명을 기념해서 2004년에 만든 기념탑이다. 혁명을 통한 파괴와 건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기념탑 남쪽으로 조경이 잘 된 녹지가 펼쳐진다. 그 면적이 무려 26ha나 된다. 공원 북서쪽에는 세 개의 온실로 이루어진 식물원이 있다. 1933년 문을 열었다고 한다.

퐁발 광장에서 알게 된 퐁발 후작의 정치
 에두아르두 7세 공원
ⓒ 이상기
에두아르두 7세 공원은 1945년 건축가 프란시스코 아마랄(Francisco Keil do Amaral)의 설계로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공원의 남쪽 끝 퐁발(Marquês de Pombal: 1699~1782) 광장에는 퐁발 후작 동상이 세워져 있다. 퐁발은 개혁군주인 주세(José) 1세가 통치하던 1750년부터 1777년까지 장관과 수상을 지낸 정치가이자 외교관이다. 그는 1755년 지진이 일어나자 구조활동을 벌이고, 폐허가 된 리스보아를 복구하는데 앞장 섰다. 그는 또한 행정, 경제, 종교 관련 조직을 개혁해 포르투갈 계몽시대를 이끌었다. 그래서 포르투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재상으로 이름이 높다.
그러나 정치에 있어서는 독재권력을 휘둘러 시민권을 제한하고 정적을 제거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받는다. 그는 코임브라대학 졸업 후 군대에서 경력을 쌓았고, 1733년 귀족 가문의 조카와 결혼하면서 신분상승을 꾀할 수 있었다. 그 덕에 1738년 주앙 5세에 의해 영국대사로 임명되었다. 1745년 오스트리아 대사로 옮겨가 1749년까지 재직했다. 1750년 주세 1세가 왕위를 계승하자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어 외교 사령탑이 되었고, 1755년에는 왕의 신임을 얻어 선임장관이 되었다.
 리스보아 대지진 후 복구와 재건을 지휘하는 퐁발 장관
ⓒ Public Domain
1757년 국무장관이 되었고, 1758년 타보라(Távora) 가문이 왕을 시해하려는 사건이 일어났다. 퐁발은 1759년 이 사건을 수습하면서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1777년 주세 1세가 죽고 마리아(Maria) 1세가 즉위하면서 퐁발이 실각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1781년에는 타보라 가문이 복권되기도 했다. 1759년에는 그가 제수이트 교단의 핵심인사들을 제거하면서 종교계의 힘도 약화시켰다. 그 결과 퐁발은 1759년 백작이 되었고, 1769년 퐁발 후작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퐁발 후작은 포르투갈어로 이스트랑제이라두쉬(Estrangeirados)라 불린다. 이 말은 외국의 선진문물을 수입해 국민을 계몽하고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운동에 앞장선 지도자를 말한다. 퐁발 후작은 영국과 오스트리아 등 선진국의 대사를 하면서 계몽주의 사조와 상공업의 발전을 목격했고, 이를 포르투갈에서 실천해 보려고 했던 것이다. 모든 산업을 지배하는 왕립 회사를 만들고, 상업적인 개혁을 추구했다. 대표적으로 포르투 와인의 생산과 교역을 통제해 가격안정을 꾀했다. 외교적인 면에서도 영국과 동맹을 이용해 7년전쟁(1756~1763)에서 에스파냐의 침공을 물리칠 수 있었다.
 퐁발 광장의 퐁발 동상
ⓒ 이상기
그리고 흑인노예의 포르투갈 수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그는 또한 유대교나 이슬람교로부터 개종한 사람들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했다. 내치에서는 독재적인 정책을 취하면서 검열을 강화하고 시민계급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했다. 그러나 1777년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마리아 1세가 등극하면서 제수이트교를 탄압한 퐁발을 꺼리게 되었다. 그녀는 퐁발이 자신으로부터 20마일 이내로 접근할 수 없도록 접근제한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성난 시민들이 리스보아에 있는 퐁발의 저택을 불태우려고 할 정도였다.

그는 결국 모든 직위를 잃고, 퐁발 근처에 저택을 마련하고 은둔생활을 하다 1782년 죽었다. 그는 포르투갈 사람들에 의해 긍정과 부정 양면으로 평가받는 사람이다. 그의 이름을 딴 광장과 지하철역이 있을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다. 시내 곳곳의 관광안내소나 기념품점에서는 바스쿠 다가마와 마르케스 드 퐁발의 실물 모형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퐁발 광장에 설치된 그의 동상은 1934년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만들어졌다는 한계가 있다. 당시 일부 지성인들은 동상의 철거를 요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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