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뇌출혈로 쓰러진 세 아이 엄마... '과로사' 인정 못 받은 이유 [김용균재단이 바라본 세상]
[박승권]
세 아이의 엄마가 쓰러졌다. 경리 일을 마친 후 퇴근한 그녀는 가족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하던 중 갑자기 경련하며 쓰러졌다. 30분 만에 도착한 응급실에서 심폐소생술을 받고 희미하게 의식이 돌아오기도 했으나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끝내 숨을 거뒀다. 뇌출혈이었다.
이후 과로사 산재를 신청한 남편을 산재여부를 판단하는 심의 장소에서 볼 수 있었다. 수척한 모습의 그는 시종일관 가족의 생활고에 관한 말만 반복했다. 본인도 신체가 온전치 않아 일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며 아내의 부재 이후 막대한 빚으로 인해 당장 어린 세 아이를 키워낼 재간이 없다고 했다. 아이들 때문에 겨우 숨만 붙어 있다는 말을 그의 핏기 없는 얼굴이 입증하고 있었다.
"이 자리는 그런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보다는 아내 분의 발병이 산재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시는 근거를 적극적으로 말씀해 보세요. 예를 들면 잔업이 많았다 라거나..."
중립적이고 냉철한 태도가 기본적인 자질로 여겨지는 심의위원의 본분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으나 남편의 딱한 처지를 애써 외면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가 제한된 진술 시간을 보다 의미 있게 활용하시도록 간접적으로나마 조력해 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본인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한탄만을 지속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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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근 후 쓰러진 워킹맘과 젖병을 든 채 우는 아이 챗GPT 생성 이미지 |
ⓒ 필자 |
이후 '있었던 사실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나의 요구를 뒤늦게 이해하였는지 그는 아내가 생전 회사에 남아 연장근무를 했던 일이 종종 있었던 점, 업무가 미숙해 퇴근 후에도 일감을 집에 가져와 집안일을 마치고 나서야 할 수밖에 없었던 경우가 빈번했던 점 등을 나지막이 언급하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구체성이 부족했으며 진술을 뒷받침할 근거는 거의 제시하지 못했다.
결국 마치 금과옥조처럼 여겨지는 주당 52시간 이상의 업무 수행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이유로 소수의견이나 보충 의견 없이 참석 위원 만장일치로 산재 불인정이 되었다. 평균임금이 이백만원이 채 되지 않던, 세 아이를 부양하던 한 여성 직장인의 죽음으로 인해 그와 그의 세 아이는 사회안전망의 빈틈 사이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산재는 기본적으로 '일 때문에' 생겼어야 한다는 것은 이미 깊게 자리 잡은 인식이다. 게다가 산재 관련 법에서도 산재보상제도의 목적을 '업무상의 재해를 신속, 공정하게 보상'으로 명시하고 있고, 법원에서도 직장 내 안전보건상 위험을 누구 개인이 아니라 다 같이 분담하는 것이 산재보험의 주된 취지라고 말하고 있듯 '업무상', '직장 내'라는 표현을 통해 업무와 질병 간의 '명백하고 상당한 인과관계'가 현재 질병 산재 인정의 기본 요건이자 핵심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재보험은 엄연히 사회보험이란 사실도 간과할 순 없다. 사전 예측이 어려운 건 사고나 질병이나 매한가지이며 이로 인한 소득 상실은 생계를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같다. 사회보험은 이러한 위험을 각자도생이 아닌 사회공동체의 연대를 통해 대처하는 것이 주된 존재 이유다. 그럼에도 원인주의에 얽매여 있는 현재 질병 측면의 산재보험제도가 과연 빈틈없이 두툼한 사회안전망의 기능을 다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사회 요구에 따라 변화해야 할 산재보험
상기 사례에서도 세 아이의 입장에서는 엄마의 발병 원인이 업무적 요인이건 개인적 요인이건 엄마를 잃음으로 인해 생계가 막막해진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정녕 산재 인정에 있어 '원인'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그 기준과 그에 따른 판단이 오롯이 '과학'에 의해서만 마련될 수는 없다. 눈부시게 발전해 왔다는 현대 의학과 과학기술을 통해서도 질병과 원인의 인과성은 규명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술적인 한계뿐만 아니라 사회안전망으로의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그 기준이나 판단은 과학적 근거에 기반하되 지속적인 사회적 대화와 합의로 마련된 세부 규정을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세 명의 취학·미취학 아동 부양을 병행하는 워킹맘의 전일제 업무 수행에 따른 신체 부담은 여타의 경우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은 과학보다는 상식의 영역이다. 하지만 근로기준법에서도 여러 차례 등장하는 '육아' 단어는 산재 관련 법령에서는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저출산 이슈가 부각되는 현 상황에서 워킹맘에게 일종의 특례를 적용하는 것도 사회적인 효과를 고려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육아 노동 수행 시간을 정량화하여 입증하긴 어려우니 거주 요건 등 일정 조건만 만족하면 하나의 가중 요인으로 참작하는 방안도 고려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관련 전문가 소수의 의견에 따라 결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형평성 시비 등을 사전 예방하기 위해 지속적인 사회적 대화와 합의로 결정하는 구조가 타당하다.
단순히 산재 대상을 확대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질병 측면의 산재보험이라는 사회안전망이 꼭 필요한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있을 정도로 헐겁진 않은지 혹은 그와 반대로 특정 부분에선 필요 이상으로 두툼해져 있는 건 아닌지 바꿔 말해 빠르게 변하고 있는 사회의 눈높이에 부합하는지 지속적인 판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지난해 사람으로 치면 환갑의 나이에 접어든 산재보험이 이제부터는 냉철한 이성과 따뜻한 가슴이 조화된 모습으로 발전해 나가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박승권 님은 김용균재단 이사이자 직업환경의학과 의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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