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살 딸에게도 안심하고 보여준 방송인데... 막 내린 EBS 실험정신
[이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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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BS <딩동댕 유치원> 관련 자료사진 |
| ⓒ EBS |
딸을 키우는 양육자 입장에서 반가웠던 것은 하리와 조아처럼 전통적인 성역할 고정관념을 벗어난 캐릭터의 등장이었다.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최신 페미니즘 담론이 오가는데, 아이를 위한 그림책이나 애니메이션을 보면 다른 세상에 와있는 것 같았다.
암컷 비버인 루피는 요리를 잘하고 다정하나 겁이 많으며, 에디는 과학자가 꿈인 수컷 사막여우로 어떤 기계든 뚝딱 만들어낸다(<뽀롱뽀롱 뽀로로>). 파란색 경찰차 폴리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자지만, 핑크색 구급차 엠버는 다른 멤버들에 비해 딱히 잘하는 게 없을 뿐더러 후반부로 갈수록 '병풍' 노릇을 한다(<로보카 폴리>). 로미는 12세 소녀지만 어림잡아도 9등신 몸매이고, 얼굴에 반을 차지하는 큰 눈을 가진 미소녀다(<캐치 티니핑> 시리즈).
수많은 그림책에서 모험을 떠나 무서운 괴물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하는 것은 남자아이고, 여자아이는 모험을 떠나더라도 다른 이를 돌보는 능력을 통해 누군가를 구한다. 아빠는 엄마에게 반말을 하지만 엄마는 아빠에게 존댓말을 하는 설정도 깜짝 놀랄 만큼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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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딩동댕 유치원>의 별이와 별이엄마 |
| ⓒ EBS |
여러 캐릭터 중에서 단연 화제를 모은 건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별이다. 별이는 레미콘과 불도저를 구별하는 '자동차 박사'지만 소리와 냄새, 빛에 예민하고 혼자만의 놀이에 빠지면 친구의 인사를 듣지 못한다. 딩동쌤은 친구들에게 별이의 특성을 설명해주고 친구들은 별이의 머릿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각종 자동차가 나름의 질서와 법칙을 가지고 떠다니는 별이만의 우주로.
'잘했어 별아' 에피소드에서 친구들은 고민에 빠진다. 점심을 먹은 후 식판을 정리하지 않는 별이, 이를 닦은 후 컵에 칫솔을 꽂아놓지 않는 별이, 손을 닦다가 거품 놀이에 빠져버린 벌이를 어쩐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펙스(PECS, Picture Exchange Communication System의 줄임말로 자폐 아동의 소통을 돕기 위한 시각 보조물)를 이용해 원활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돕지만, 이것이 완벽한 대안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딩동댕 유치원의 친구들은 '쉽게 이해하기 힘든 친구와 함께 하기'라는, 어렵고도 보편적인 과제 앞에 서 있다.
'별난 아이들' 에피소드에는 별이와 친구들의 공존을 위한 또다른 이야기가 담겼다. 딩동댕 유치원의 운동회 날, 멀리 있는 풍선을 손으로 치고 돌아오는 게임 규칙을 잊은 채 별이는 풍선을 치는 일에 몰두한다. 그때 별이의 마음속에는 바깥 세계와는 독립적인, 둥둥 소리가 나는 풍선 다발로 이뤄진 세계가 있다. 이 에피소드는 친구들이 "풍선 치기 재미있다"라며 별이의 마음속 풍경에 동참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별이엄마의 속마음도 외면하지 않는다. "엄마는 매일 잠잘 때마다 같은 꿈을 꿔. 별이가 엄마와 눈맞추고 '엄마' 하고 불러주는 꿈."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를 재현하는 일은 어려운 과제다. 무해하고 불쌍한 피해자로 그리는 것도, 위대한 인간 승리의 주인공으로 그리는 것도 윤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성별·장애·인종 등의 정체성을 고정해 본질화하면 '정체성 정치'의 위험에 빠지기 쉽다.
<딩동댕 유치원>은 하리, 하늘이, 조아, 마리, 별이의 일상·고민·세계를 세밀하게 그려내는 것으로 소수자 재현에서 빠질 수 있는 위험을 비껴간다.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이라는 특성상)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이 단순하거나 '착할' 수는 있지만 적어도 등장인물들이 겪는 차별·안전 등 첨예한 문제들을 모른 척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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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권도를 좋아하는 하리 |
| ⓒ EBS |
바쁜 조아엄마는 조아와 어린이날 놀이공원에 가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지만, 조아할머니는 조아엄마에게 말한다. "우리 딸 밥은 잘 챙겨먹었어?" 조아엄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조아할머니에게 묻는다. "엄마는요?" 놀이공원에 가지 못해 속상한 조아의 마음에 집중하면서도, 양육자가 밥을 챙겨 먹었는지 안부를 묻는 세심함에 감동한 순간이다.
<딩동댕 유치원>의 캐릭터들은 우리가 어린이에게서 상상하는 전형성에서 어딘가 조금씩 벗어나 있다. 이는 이 캐릭터들이 소위 말해 '핸디캡'을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혼가정의 조아는 가족 그림을 소개하는 시간에 "그럼 아빠는?" 묻는 아이들 앞에서 쭈뼛대고, 갈색 피부에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가진 마리는 "우리 동네에서 외국 애는 처음 봐"라며 신기해하는 행인들 앞에서 속상해한다.
이러한 캐릭터가 정치적 올바름을 과시하기 위한 장치라고 비판하거나 반감을 갖는 이들도 있다. 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엄마 아빠가 같이 살며 모두 한국인인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 장애가 없으며 얌전하고 책을 좋아하는 여자아이, 태권도를 좋아하고 활발한 남자아이만 유통되는 것이 오히려 판타지 아닌가. 성장 과정에서 '정상'이라는 기준에 맞추기 위해, 그렇지 못한 부분을 감추기 위해, 스스로 단속하느라 우리는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써왔던가.
안타깝게도 이 프로그램의 '실험정신'은 2025년 개편과 함께 끝이 났다. 지난 3월 이후 기존의 캐릭터를 버리고 EBS의 인기 캐릭터들을 활용한 <딩동댕 딩동댕>을 선보이고 있다. 하리와 하늘이, 조아, 마리, 별이가 사라진 자리는 <한글용사 아이야>와 <최고다! 호기심 딱지> 의 화려한 캐릭터들로 채워졌다.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안전하게 등교하기', '화장실 혼자 가기' 등을 연습하던 하리와 하늘이, 조아, 마리, 별이는 초등학교 적응을 잘 마쳤을까? 나의 아이와 동갑내기인 이 아이들의 고민·빛깔·세계는 이제 어떻게 이어지고 확장될까? 궁금하지만 더이상 이들의 세계를 엿보는 기쁨을 누릴 수 없다. 이들은 다시금 우리 사회에서 있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됐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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