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어진 공간에 작품 2점뿐, 그래도 놓치면 후회할 걸요

오순미 2025. 5. 11.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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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객 위해 정교하게 설계된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수요일 밤 가시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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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미 기자]

5월의 싱그러운 첫날, 우리 부부는 내리는 빗속을 헤치고 서울 용산에 위치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에 가본 기억이 언제인지도 가물거린다는 남편의 말에 나도 떠올려 보니 생각나는 게 거의 없었다. 마침 노동절이기도 하니, 바로 행동에 옮겨 박물관을 찾아간 것이다.

사실 박물관은 설명 속 전문 용어가 쉽게 이해되지 않고 일상과 단절된 느낌이어서 내게는 '지루하다, 어렵다'는 인식이 강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주 찾지 않게 돼 마지막으로 갔던 게 언제인지 기억도 까마득했다.

그러나 남편과 오랜만에 찾아간 박물관은 거의 180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멀찍이서 구경만 하던 이전과는 달리 직접 관객들이 만질 수 있는 복제품들이 널려있었고, 사용자가 입력하면 바로 출력되는 디지털 체험 공간도 다양했다.

그래서인지 젊은 연인들 모습이 제법 눈에 띄었고, 2030으로 보이는 나 홀로 방문객도 간혹 보였다. 다들 전시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2층에 들어서자 충격 받았다, 왜냐면

우리는 전체를 훑어볼 요량으로 관심 분야를 정하지 않았다. 선사~근세관까지 시대별 역사 중심인 1층부터 시작할까 하다 조각공예관과 세계문화관이 실생활과 밀착됐을 것 같아 3층부터 내려오면서 거꾸로 관람하기로 정했다. 2층에선 기증관과 사유의 방, 서화관을 둘러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3층 공예실 전시품*왼쪽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 음각·양각·투각·상감·상형 등 모든 장식기법을 동원한 고려청자*오른쪽 위 <청자 귀룡무늬 주자> 연꽃 위에 거북이가 앉아 있는 모양의 주전자. 등에 '왕王'자를 하나하나 새겨 넣음. 얼굴은 용의 형상. 고려청자*오른쪽 아래 <청자 상감 구름·학무늬 베개> 고려 문인 이규보의 시에 청자 베개는 이상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매개체로 묘사.
ⓒ 오순미
전시실마다 휴식 공간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어, 쉬엄쉬엄 산책하듯 다니기 편했다.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 <청자 귀룡무늬 주자>, <청자 상감 구름·학무늬 베개> 등 청자의 아름다움에 빠져 3층을 관람하고 나서 드디어 2층, '사유의 방'에 들어섰을 때다.
헉, 3층 공예관이 잊힐 만큼 강렬한 전시관 모습에 깜짝 놀랐다. 전시의 개념을 깨는 새로운 시도 때문이었다. 여백을 극대화한 독립적인 전시실은, 마치 유물보다 사람을 위한 공간 같아서 관람객이 숨 돌릴 틈과 여유를 갖기에 충분했다.
 프랑스 비디오 아티스트 장-줄리앙 푸스의 흑백 영상
ⓒ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진입로는 어둡고 긴 복도로 이어진다. 복도 끝에선 장-줄리앙 푸스(프랑스 비디오 아티스트)의 흑백 영상이 물결의 순환 과정을 끝없이 펼치며 관람객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마음도 몸도 차분해지는 시간이다. 터널 같은 어둠에 익숙해질 때쯤, 비로소 복도 끝 '사유의 방'에 들어설 수 있다. 적은 양의 흰 물감을 뿌린 듯한 밝기가 눈에 편하게 스며든다.

전시실 전체를 둘러싼 적벽엔 어떤 설명도 없다. 관람객 스스로 느끼고 해석하게 하려는 의도란다. 소극장만한 방엔 오직 두 점의 반가사유상만 관람객을 향해 미소 짓고 있다. '적을수록 깊다'는 의미가 온전히 전해진다. 절제된 공간에서 나는 숨을 깊게 마시며 사유상을 향해 걸어 갔다.
 '사유의 방' 전체 모습. 반가사유상 두 점만 전시. 미세하게 경사진 바닥, 기울어진 황토벽, 2만여 개의 금속봉 조명으로 구성된 전시실.
ⓒ 국립중앙박물관
두 점의 조각상을 비추는 섬세한 빛이 나에게도 서서히 닿는 듯하다. 유리관도 없이 손에 닿을 듯한 거리에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에 가볍게 얹은 '반가(半跏)'를 하고서 골똘히 '사유(思惟)'하는 모습이 유려하고 세밀하다.
정면만 바라보던 기존의 방식을 무너뜨리고, 반가사유상의 뒷모습까지 볼 수 있는 사유상은 처음이다. 나로서도 색다른 경험이다. 관람객들은 두 점의 사유상을 묵묵히 바라보다 탑돌이 하듯 전시대 둘레를 돈다. 나도 그랬다.
 (왼쪽 반가사유상 - 국보 제78호, 화려한 보관 씀, 6C 후반 백제로 추정, 날카로운 콧대와 뚜렷한 눈매, 화려한 장신구, 정제된 옷주름)(오른쪽 반가사유상 - 국보 제83호, 단아한 보관 씀, 7C 전반 신라로 추정, 단순하고 절제된 양식.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반신, 간결한 장신구, 반면 무릎 아래 옷주름은 입체적이고 역동적)
ⓒ 국립중앙박물관
'저들은 자신의 사유를 고민하는 걸까? 아니면 회복하는 중일까?'

곰곰이 생각하다 나도 천천히 공간을 걸었다. 걷다가 문득 멈추어서 하염없이 바라봤다. 멈춤과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오랜 시간을 그곳에 머물렀다.

'그대도 번민 속에 있음을 안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사유의 길에선 그대도 평안에 이를 수 있다'는, 이런 나직한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마음에 왜인지 안도감이 번지기 시작했다.

기울어진 바닥에 틀어진 천장, 이게 다 의도된 건축이라니

멈추어 바라본 두 점의 반가사유상은 닮은 듯 달랐다. 하나는 가늘고 부드럽고 신적인 20대 청년(왼쪽)인 반면, 다른 하나는 우직하고 단단하고 인간적인 천진난만 10대(오른쪽) 같았다. 자세히 바라볼 때마다 미묘한 차이를 느끼며 그 사유의 깊이에 가까이 가는 듯했다.

알듯 말듯 서로 다른 미소를 바라보며 그 너머 깊은 사유를 짐작해 보았다. 차기 부처로서 미래 세상에 내려와 어떻게 중생을 구원할지 고민하고 답하고를 반복하지 않았을까? 그런 번민의 끝이 미소 아닐까. 고민의 끝이 미소라는 건, 아마도 현명하고 지혜로운 결론에 도달한 때문일 터이다.

'내 사유는 어디쯤 닿은 걸까? 나도 언젠가 온당한 미소를 띨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느린 시간을 돌고 돌았다. 천천히 돌다 제자리로 왔을 때 마주한 미소는, 마치 내게 이전보다 가벼운 마음이 되었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관객의 시선이 반가사유상에 꽂히도록 미세하게 경사진 바닥, 사유상을 감싼 기울어진 황토벽, 2만여 개의 금속봉에 조명을 달아 별빛 반짝이는 우주를 연상케 한 천장 풍경 등. 그런데 이 모든 게 관람객을 위한 건축가의 의도된 설계였다.
 사유의 방 설계의도를 설명하는 영상('사유의 방' 건축가가 말하는 요즘 힙하다는 반가사유상 관람법, 비디오머그, SBS 2021년 12월 23일)
ⓒ SBS
미륵보살(미래불)의 미소가 밴 '사유의 방' 모든 구상은 예술적·철학적 체험이 일어나도록 정교하게 기획된 거란다. '사유'라는 행위에 집중할 수 있도록 '건축가 최욱'은 거리, 규모, 배치, 빛, 소리까지 설계했다고 한다. 관람객이 '사유를 보다'가 '사유하게 되는' 체험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단다.

한편, SBS 뉴스에 따르면 이 반가사유상은 국립중앙박물관을 대표하는 작품일 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전시하고 싶다고 요청하는 한국 문화재 중 1위로 꼽힌다고 한다.

반가사유상과 그 방이 좀 더 궁금하다면 전시실 밖 복도에 국문과 영문, 중국어, 일어로 인쇄된 설명 자료가 비치돼 있으니 참고해 보아도 좋을 일이다. '사유의 방'을 설계한 의도와 장-줄리앙 푸스의 영상에 대한 의미, 반가사유상의 미학 및 소장 경위, 제작 기술까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사유의 방 설계의도를 설명하는 영상 중 초기 사유의방 기획 구상그림 ('사유의 방' 건축가가 말하는 요즘 힙하다는 반가사유상 관람법, 비디오머그, SBS 2021년 12월 23일)
ⓒ SBS
국립중앙박물관의 모든 전시는 연중 무료 관람이다. 그중에서도 박물관이 기획한 새로운 설계 안에서 하루쯤 나를 잊고, 그들과 마주하고 싶다면 사유의 방에도 가보길 권한다.

이 사유의 방은, 박물관 상설 전시여서 언제든 볼 수는 있지만,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오롯이 마주한 사유상 앞에서 내면이 회복되길 원한다면 비교적 관람객이 적은 수요일 밤이 최적이다.

관람시간은 보통 저녁 6시 마감이나 매주 수/토요일엔 오후 9시까지 연장된다. 종교와 이념을 떠나 누구든지 깊은 사색의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1층 전시. 경천사 10층 석탑.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석탑 중 하나. 고려 충목왕 때 원나라 영향을 받은 양식. 한국적 이미지와 달리 화려한 장식이 특징.
ⓒ 오순미
그날 우리는 사유의 방에서 나와 설명 자료를 본 후 관람을 마쳤다. 기증관의 '손기정 투구'가 코앞이었지만 다리가 얼얼해서 더 둘러보는 건 무리였다. 1층에 전시된 '경천사 10층 석탑'까지 관람했다. 조만간 다시 방문해 여유롭게 재관람하자고 남편과 약속했다.

우리 부부는 박물관을 나왔다. 그런데 1층 간이 야외무대에서 사유상처럼 분장한 '퍼포먼스 아티스트'와 마주쳤고, 그의 깜박이는 눈동자와 눈이 마주쳐 함께 웃었다.

입장 시엔 없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것이니, 어린이와 가족 단위 관람객이 많은 휴일이라 박물관 측에서 일회성으로 준비한 공연 같았다. 마지막까지 재미를 준 박물관과 어쩐지 더 친숙해진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찾은 박물관, 치밀하게 설계되고 의도된 방에서 사유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체험은 내게는 무척 신비로웠다. 이 체험이 언젠가 당신의 몫으로도 피어나길 바란다(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전시설명 바로보기).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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