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영국의 중고 자선상점 엿보기

김성수 2025. 5. 11.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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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옷은 가고, 마음은 남는다

[김성수 기자]

지난 35년간 영국에서 살고 있다. 영국 여성과 결혼해 애 낳고 살며 느낀 점이 '밤하늘의 별' 만큼 많다. 자녀들은 초중고대를 영국에서 나와 지금은 다 독립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아무리 영국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도, 나는 자주 한국이 그립다. 한국의 문화, 냄새, 심지어 소음까지도 그립다. 전에 가족과 함께 한국에 갔다. 그런데 한국에 머무는 동안, 이번에는 영국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영국의 문화, 풍경, 심지어 영국의 날씨까지도 말이다. 이상하게도, 영국에 있을 땐 한국이 그립고, 한국에 있을 땐 영국이 그립다. 어쩌면 나는 욕심쟁이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중국적자' 는 아니지만 분명히 '이중감정자' 다. 하지만 그게 바로 나다. 삶이 힘들고 슬플 땐, 우리는 평화로운 천국을 그리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평화로운 천국에 있더라도, 우리는 이 바쁘고 소란스러운 삶이 그리워질 수도 있다. 자, 이제 그러면 내가 느끼는 한국과 영국의 중고 자선상점에 대해 나누고 싶다. - 기자말
 한영기
ⓒ 김성수
중고 한 벌, 가치 두 배

요즘 누군가가 헌 옷을 입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절약이 아니다. 그것은 지구를 위한 선택이며, 윤리적 소비의 표현이고, 때로는 미니멀리즘의 실천이다. 그 중에서도 중고 자선상점은 소비의 방향을 바꾸는 '착한 소비' 의 실험실이다. 그렇다면 영국과 한국의 중고 자선상점 문화는 어떻게 다를까?

영국, 자선과 자원봉사가 일상인 나라

영국에는 약 1만 개에 달하는 중고 자선상점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영국 중부 레스터셔의 인구 2만 5천 명의 작은 마을에도 7개의 자선상점이 운영 중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옥스팜, 브리티시 하트 파운데이션, 캔서 리서치 UK 등이다. 옥스팜만 해도 영국 전역에 600여 개 매장을 통해 연 2억 파운드(약 3400억 원)의 수익을 내며, 이를 빈곤퇴치와 긴급구호에 사용한다.

영국에서는 중고 자선상점에서 쇼핑하는 것을 윤리적 소비로 여기며, 오히려 자랑스러워 한다. "이 재킷? 옥스팜에서 단돈 5파운드에 샀어요"는 흔한 자랑거리다.

운영 주체도 특이하다. 상근 매니저 1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원봉사자들이다. 은퇴한 노인, 주부, 학생, 구직자들이 함께 매장을 운영하며, 이곳은 단순한 일터가 아닌 지역 공동체의 공간이 된다. 자원봉사자들은 손님보다 즐겁게 웃고, 손주 이야기를 나누며 삶의 의미를 찾는다. 어떤 자원봉사자는 "여기서 일하며 노후 우울증이 나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나도 전에 1주일에 2번씩 동네 옥스팜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내 자녀들도 학교 다닐 때 1주일에 1번씩 옥스팜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한국, 이제 막 꽃피우기 시작한 '착한 소비'

반면, 한국의 자선상점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아름다운가게', '굿윌스토어', '굿네이버스 굿쇼핑' 등이 있지만, 매장 수는 100여 개 남짓으로 영국의 1% 수준이다.

아름다운가게는 2002년 시작된 사회적 기업이다. 시민들로부터 기증받은 물품을 판매하고, 그 수익을 사회에 환원한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아이에게 남의 쓰던 옷을 입힐 수 없다" 는 인식이 존재한다. 중고는 낡은 것, 누군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라는 부정적 시선도 여전하다.

다행히 변화가 감지된다. MZ 세대를 중심으로 당근마켓, 번개장터 같은 중고거래 앱이 급성장하며, 중고 소비에 대한 인식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기부와 거래, 문화의 차이

영국의 중고품은 '기부' 중심이다. "버리기 아까우면 기부하자"는 문화가 일상화돼 있다. 반면, 한국은 '판매' 중심이다. "이거 얼마에 팔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영국은 중고 자선상점이 마을의 일상이고 공동체의 일부인 반면, 한국은 아직 낯설고 낡은 것이라는 인식이 더 크다. 하지만 변화는 가능하다. 서울 강남의 아름다운가게 앞에 줄을 선 사람들, 특히 명품 기증 행사가 있는 날의 풍경은 그런 가능성을 보여준다.

헌 옷 한 벌, 읽은 책 한 권이 만드는 보물창고

영국 자선상점의 또 다른 재미는 '보물찾기' 다. 어떤 날은 1파운드짜리 티셔츠를, 어떤 날은 고급 빈티지 드레스를 발견할 수 있다. 오래된 레코드판이나 왕실 기념품도 종종 눈에 띈다. 한 영국 친구는 중고 재킷 주머니에서 50파운드(약 9만 원)를 발견한 후 그 돈을 다시 기부했다고 한다(믿거나 말거나지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사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속옷, 양말, 손수건 3가지를 빼고), 정장 양복, 꽃병, 찻잔, 공예품, 역사책 등 전부다 중고 자선상점에서 샀다.

한국의 아름다운가게도 다양한 공익 캠페인과 환경교육을 통해 의미 있는 소비문화를 확산시키고 있다. 또한 '그린 마케터'와 같은 매장 활동가, 시니어 일자리 프로그램, 장애인 자립지원 등 사회적 가치 창출에도 힘쓰고 있다.

자선상점의 진짜 힘은?

영국이든 한국이든, 중고 자선상점의 가장 큰 가치는 '헌 물건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 한다'는 데 있지 않을까. 옷장 속에 잊힌 안 입는 옷 한 벌, 책꽂이에 다 읽은 책 한 권이 누군가에게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희망과 힘이 된다. 그리고 그런 큰 변화의 작은 시작은 내 옷장, 내 책장 한 구석에서 출발할 수 있다.

결국 중고 자선상점은 한국과 영국에서 물건을 순환시키는 공간이자, 동시에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장소다. 우리는 조금 덜 소비하고, 지구는 조금 덜 아프고, 세상은 조금 더 따뜻해진다. 내가 입던 헌 옷 한 벌, 내가 읽고 난 오랜 책 한 권이, 누군가의 손에 쥐어지며 이 세상을 새롭게 바꾸는 힘과 꿈이 된다. 이제, 믿어볼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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