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무릎 안 꿇는 88세 시인, 40년 애독자를 울립니다

박향숙 2025. 5. 10.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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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편지> 황동규 시인의 전주 강연에 다녀왔습니다

[박향숙 기자]

"오늘 제가 드릴 말씀의 주제는 <피할 수 없다고 고통에 무릎 꿇지 않기>입니다. '천년 전주 시(詩)와 연애하다'의 첫 번째 시인으로 오게 되어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강연을 시작하면서 먼저 제가 일찍이 전주에서 얻은 깨달음 하나를 소개하고요, 노년을 맞으면서 찾아온 코로나 시기를 잘 이겨낸 제가 쓴 시 몇 편을 함께 읽으면서 여러분과 즐거운 만남을 갖겠습니다."

올해 미수(88세)를 맞은 황동규 시인의 첫 말씀이었다. 전주꽃심도서관에서 열리는 <2025년 천년 전주 시(詩)와 연애하다> 프로그램의 첫 시인으로 오셨다.
▲ 황동규시인의 강연주제 <고통에 무릎꿇지 않기> 주관자인 이종민교수(완주인문학당대표)의 스승이기도 황시인께서 인사말을 하시는 모습
ⓒ 박향숙
행사일은 지난 5월 8일. 약 한 달 전에 황 시인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대학 1학년 때 캠퍼스에서 시인의 시 <즐거운 편지>를 읽고 저 멀리 하늘을 올려다보았던 때가 저절로 기억이 났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즐거운 편지' 중에서)

타향, 전주에 있는 대학에 가면서, 나는 친구 대신 시집이나 책을 들고 다니며 혼자 있던 시절이 많았다. 아마도 지금, 책방 주인으로서의 내 모습은 그때 그 시절이 자양분이 된 것이리라.

황 시인께서는 영문학자이며 시인으로서 활동하시지만,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이 소설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 선생의 아드님이기도 하다. 시인의 딸인 황시내 님도 작가로서 활동하고 있는 소위 문학가 집안을 이루고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썼다는 <즐거운 편지>를 추천 받아 문단에 등단한 후 작년에 출간한 18번째 개인시집 <봄비를 맞다, 문학과 지성사 2024>에 이르기까지 노령의 나이가 무색하게 활발한 시 창작활동과 강연을 하고 계신다.

팔순 넘어 코로나 겪었지만... "고통 견디는 건 인간의 숙명"

이번 강연에서 황 시인은 팔순이 넘어 코로나를 맞은 당신께서 그 시기를 이겨낸 몸과 마음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강연 주제로 올렸다. '피할 수 없다고 고통에 무릎 꿇지 않기'다.

"인간은 누구나 고통이 있으며 그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피해지지 않는 고통을 견뎌내어야 하는 인간의 숙명입니다. 그리고 고통과 시련을 이겨낸 사람만이 지극히 인간다움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저는 코로나 이후 건강에 여러 (안 좋은) 증상이 늘어나고, 그중 허리에 많은 불편함이 있어서 오랫동안 서 있거나 움직이기가 힘듭니다. 그런데도 걸을 수 있는 한 끝까지 걸으려고 노력합니다. 누군가와 만날 때도 스스로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거리까지는 꼭 걸어갑니다."

이 시집에서는 곳곳에서 시인의 인생 후반,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 글이 많다. 작은 꽃잎, 풀잎 하나에도 우주 안에 함께 몸담고 살아왔던 동지애를 보여주고 있다.

'코로나 확장세를 뚫고 히아신스 한 다발을 보내왔다. / 비닐 옷 벗기고 꽃병에 담아 탁자에 올리자 / 바로 이때다! 꽃들이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내쉬는가./…. 가만 발코니에 내놔야 할까부다. / 꽃병에 손을 내밀자 / 꽃들이 손대지 말라는 듯 허리를 고쳐 세운다. / '지금 우리는 단 한번 주어지는 한창 삶 살고 있어요!...(하략) / <히아신스> 중에서.

그 누군가가 '한창 삶'을 살고 있다면 건드리지 않는 일이 모든 동승자의 도리가 아니냐며 시인은 자연으로 되돌아가려는 노년의 준비를 시를 통해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저는 70대 중반부터 죽음에 대한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어느 때 세상 문을 나가더라도 그동안 참 잘 살아왔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셨다. 강연장은 순식간에, 인생의 스승이 들려주는 묵중한 울림으로 진동했다.
▲ 황동규시인과 함께 40년전 시인의 시 <즐거운 편지>를 만난 후 처음으로 시인을 직접 뵈었다. 영광이었다.
ⓒ 박향숙
시인에게 코로나는 상상을 뛰어넘어 상당히 긴 터널이었다고 한다. 당신의 나이에서 보면 해방 이후 우리 현대사에서 6.25 사변을 제외하고 당신과 주변인의 삶을 장기간 흔든 사태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숨만 쉬며 사는 늙은이가 되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했다고 고백했다. 늙음의 불편과 코로나 역병에 짓눌리지 않는 삶을 살려고 시 창작으로 맞섰다며 다음 시를 읽어주기도 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오래 집콕 하다 / 마스크 쓰고 산책 나갔다 / 마을버스 종점 부근 벚나무들은 / 어느샌가 마지막 꽃잎들을 날리고 있고 / 개나리와 진달래는 색이 한참 바래 있었다. / 그리고 아니 벌써 라일락! / 꽃나무들에 눈 주며 걷다 / 밟을 뻔했다,
(중략)
아는 풀 모르는 풀이 함께 시멘트 터진 틈 비집고 나와 / 거리 두지 않고 꽃 피우는 지구는 역시 살고픈 곳! / 그 지구의 얼굴을 밟을 뻔했다. ('밟을 뻔했다' 중에서)

시인은 시를 읽을 때마다, 특히 느낌표(!)가 있는 구절은 힘찬 목소리로 두 번 세 번 낭독하셨다. 당신의 마음속에서 열망하는 삶에 대한 사랑과 배려, 그리고 역동성, 창조성을 글을 통해서라도 독자에게 전해주고픈 마음이 가득했다.
▲ '2025 천년전주 시(詩)와 연애하다' 프로그램 포스터 제1회 황동규 시인을 비롯하여 천양희, 안도현 시인에 이르기까지 유명시인들과의 만남예정
ⓒ 박향숙
시집의 타이틀 시 <봄비를 맞다>에서는 시인의 묘비명 같은 문장 – 이 세상에 다 써버린 목숨 같은 것은 없다 –이 40년 애독자인 나를 절절하게 흔들었다.

봄비를 맞다 – 황동규

'휙휙 돌아가는 계절의 회전무대나
갑작스런 봄비 속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때는 벌써 지났네'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자 마음이 말했다.
'이마를 짚어봐.'

듣는 체 마는 체 들으며 생각한다.
어제 오후 산책길에 갑자기 가늘게 비가 내렸지.
머리와 옷이 조금씩 젖어왔지만
급히 피할 수는 없었어.
지난가을
성긴 잎 미리 다 내려놓고
꾸부정한 어깨로 남았던 나무
고사목으로 치부했던 나무가
바로 눈앞에서
연두색 잎을 터뜨리고 있었던 거야.
이것 봐라. 죽은 나무가 산 잎을 내미네,
풍성하진 않지만 정갈한 잎을.
방금 눈앞에서
잎눈이 잎으로 풀리는 것도 있었어.
그래 맞다. 이 세상에
다 써버린 목숨 같은 건 없다!
정신이 싸아했지.
머뭇대자 고목이 등 구부린 채 속삭였어.
'이런 일 다 집어치우고 싶지만
봄비가 속삭이듯 불러내자
미처 못 나간 것들이 마저 나가는데
어떻게 막겠나?
뭘 봬주려는 것 아니네.'

이마에 손 얹어보니
열이 있는 듯 없는 듯.
감기도 봄비에 정신 내주고 왔나?
일어나 커피포트에 불을 넣는다.

애독자로서 황동규 시인의 건강과 안녕을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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