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에 오래 잠자고 있던 이 맥주들이 생각난 이유 [윤한샘의 맥주실록]
[윤한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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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드비어셀 람빅 세미나, 게르츠 대표가 참석해 람빅을 설명했다. |
ⓒ 윤한샘 |
게르츠 크리스티앙 람빅 양조장 대표의 설명에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신맛이 의도가 아니라 그냥 결과라니. 보통 람빅이라는 맥주를 설명할 때 처음 언급하는 게 신맛이다. 많은 사람들이 람빅을 사우어 맥주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벨기에람빅협회(HORAL) 회장이기도 한 우드 비어셀의 게르츠 대표는 람빅을 사우어 맥주가 아니라고 했다. 지난 4월 12일 서울대입구역에 있는 펍 '링고'에서 진행된 람빅 세미나 자리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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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깐띠용에서 마셨던 럼 배럴 블랜딩 람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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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배럴을 사용한 람빅도 전통 람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와인배럴에 숙성한 람빅과 위스키 배럴에 숙성한 람빅을 혼합해도 전통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다는 말 아닌가? 람빅에서 말하는 전통은 무엇이고 범위는 어디까지인 걸까? 양조과정인가, 재료인가, 아니면 지역인가? 그렇다면 람빅에서 전통과 크래프트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이 아직 풀리지 않은 와중에 신맛이 람빅의 정체성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으니, 머릿속이 더 복잡해질 수밖에. 맥주에 있어 전통을 어떻게 정의하는지는 중요하다. 그 범위에 따라 정체성과 진정성의 정도가 결정된다.
예를 들어, 고려 시대 존재했던 술을 복원한다고 하자. 그 당시 사용했던 재료는 지금 재료와 다를 가능성이 높다. 발효 방식 또한 마찬가지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 있는 어쩔 수 없는 간극을 어떻게 합의하느냐에 따라 우리 술로 인정받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건 마시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번 세미나는 벨기에 람빅 양조사들의 전통에 대한 관점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람빅을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식문화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시간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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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람빅 세미나를 하고 있는 게르츠 대표 |
ⓒ 윤한샘 |
자연발효는 자연에 있는 효모와 박테리아를 이용해서 발효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고 맥즙을 그냥 밖에 둔다면 온갖 미생물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맥주를 만들 수 없다. 적당한 타이밍에 적절한 인간의 개입이 필요하다.
우선 계절이 중요하다. 람빅 양조는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해야 한다. 봄과 여름처럼 더운 계절에 맥즙을 노출시키면 잡균과 벌레의 습격에 녹다운을 당할 것이다. 맥즙을 공기에 노출시키는 시간도 중요하다. 보통 하룻밤 정도가 필요하다. 이때 쿨쉽(cool ship)이라는 장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쿨쉽은 이름 그대로 맥즙을 식히기 위한 배다. 금속 재질로 낮고 넓으며 평평한 모양을 갖고 있다. 쿨쉽에 담긴 뜨거운 맥즙이 70도 밑으로 떨어지면 양조장 지붕과 벽, 공기에 있던 미생물이 들러붙는다. 하룻밤, 길면 하룻밤 반 정도 노출 시킨 후 서둘러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불필요한 오염을 줄어든다. 이 방식이 람빅에서 말하는 자연발효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이와 유사한 방법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람빅의 수호자, 나무 배럴
미생물에 노출된 맥즙의 다음 행선지는 나무 배럴이다. 나무 배럴로 옮겨진 맥즙은 천천히 발효를 진행한다. 람빅 양조장에 가면 나무 배럴 구멍에 있는 거품 자국을 볼 수 있는데 모두 발효의 흔적이다.
람빅의 발효는 최소 6개월에서 1년 정도 걸린다. 길어야 보름 정도인 일반 맥주에 비해 엄청 긴 시간이다. 발효 과정도 복잡하다. 세균 발효, 상면 발효, 젖산 발효, 야생 발효, 네 단계를 거친다. 세균 발효는 각종 균이 산, 휘발성 물질, 화합물을 만드는 단계다. 혹시 상하는 거 아닌가 걱정되신다면, 마음 놓으셔도 된다. 이 세균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발효에서 발생하는 알코올과 젖산으로 모두 사멸하니.
다음 단계는 상면발효다. 맥주효모가 포도당과 맥아당을 먹으며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를 내뿜는, 보통 맥주에서 볼 수 있는 과정이다. 보통 3개월 정도 걸리며, 다량의 알코올과 둥글둥글한 느낌을 남긴다. 세 번째는 젖산 발효다. 젖산균이 남은 당과 유기물을 먹는 이 단계에서 맥주는 강렬한 신맛을 입게 된다. 낮은 pH로 인해 잡균도 사라진다.
자, 이제 마지막 주인공이 남았다. 브레타노마이세스 또는 브렛이라고 불리는 야생효모다. 이 녀석은 남아있는 당을 말끔히 먹어 치워 람빅을 깔끔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이상야릇한 향을 남기는데, 보통 외국에서는 말안장, 외양간 향이라고 표현한다. 나에게는 시골 야외 화장실 향과 비슷하다. 아니면 옛날 치과에서 나던 치약 같은 향의 극단적인 버전이 더 맞을 수도 있다. 호불호가 갈리는 이 향은 람빅의 정체성을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발효가 끝나면 숙성의 단계로 넘어간다. 나무 배럴은 짧게는 6개월 길게는 3년 넘는 기간 동안 람빅을 품는다. 이때 조심해야 할 게 산소다. 산화는 맥주의 적이다. 나무 틈 사이로 들어오는 산소는 식초 균과 만나 과도한 산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전에 언급했듯, 람빅에서 신맛은 결과이지 의도가 아니다. 불필요한 산화를 막기 위해 람빅 양조사는 나무 배럴을 뉘어 놓는다. 산소와 맥주의 접촉을 최대한 줄이려 하는 것이다.
람빅에는 새 배럴은 사용하지 않는다. 나무의 탄닌이 녹아 쓴맛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10년은 길들여야 최고 수준의 람빅이 나온다고 알려져 있다. 배럴에서 숙성을 거친 람빅은 다시 병에서 1년 정도 2차 숙성을 해야 한다. 람빅의 탄산은 병 숙성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병 입을 할 때, 맥즙이나 당을 넣으면 맥주에 남아있는 효모가 2차 발효를 통해 자연탄산을 녹여낸다.
아무리 봐도 돈과 품이 많이 들어가는 맥주다. 계절의 한계, 발효와 숙성 시간, 적당한 나무 배럴 그리고 병 숙성까지, 한 병에 수십만 원은 받아야 이윤이 남을 거 같은데. 이런 부분을 감안하고 람빅을 세상에 내놓는 게르츠 대표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우드(Oude)의 의미
세미나 중간중간 게르츠 대표 또한 전통 수호와 비즈니스 사이에 겪고 있는 고충을 내보였다. 전통을 지키려면 돈과 시간이 들지만, 가격을 높이면 회전이 되지 않아 양조장 운영이 녹록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벨기에 전통이 담긴 맥주를 이어가고 있다는 그의 표정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람빅 문화에서 전통을 의미하는 표식으로 우드(oude)가 있다. 자연발효와 나무 배럴을 이용해 양조한 람빅에만 이 우드를 붙일 수 있다. 우드는 영어로 올드(old)와 같지만 전통으로 해석하는 게 적합하다. 전통 방식을 따르지 않는 람빅에는 '우드'가 허락되지 않으며 유럽연합(EU)에 의해 법으로 보호받기에 아무 맥주에나 붙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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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릭과 괴즈, 게르츠 대표의 사인이 들어있다. |
ⓒ 윤한샘 |
크릭(Kriek)이라는 스타일도 있다. 람빅에 생 체리를 넣어 향과 맛을 입힌 것을 크릭이라고 한다. 보통 1년 이상의 숙성 기간을 거치는데, 일반 체리는 이 시간을 견딜 수 없어 사우어 체리라는 품종을 사용한다. 조금씩 과육이 람빅에 스며들고 씨의 풍미까지 녹아들면 농밀한 체리 향과 섬세한 아몬드 풍미가 아름다운 크릭이 완성된다. 우드 괴즈와 마찬가지로 우드 크릭은 체리 과즙이나 퓌레가 들어가지 않은 우드 람빅을 이용했다는 뜻이다.
전통적인 방법을 따르지 않는 람빅을 만들거나 팔 수 있을까? 가능하다. 예를 들어, 신맛과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가당을 하거나 체리 과즙이나 퓌레를 넣어도 람빅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단, '우드'는 붙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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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드비어셀 크릭, 사우어 체리가 들어간 우드 크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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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가 말미로 접어들면서 깐띠용 람빅 양조장에 갔을 때 들었던 의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의문, 람빅을 럼 배럴에 넣은 것은 전통에 위배되는 거 아닌가? 아니다. 럼 배럴이든 와인 배럴이든, 위스키 배럴이든, 모두 나무 배럴 아닌가. 자연발효를 거친 람빅을 나무 배럴에 넣어 발효와 숙성을 진행했기에 문제가 없다.
람빅의 정체성은 자연발효와 나무 배럴 그리고 오랜 시간에 있다. 람빅이 사우어 맥주가 아닌 결정적인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양조사의 의도가 들어간 사우어 맥주와 달리, 람빅에서 신맛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만약 람빅 양조 과정에서 자연발효와 나무 배럴을 통했음에도 신맛이 나오지 않는다면? 상관없다. 우리는 그 맥주를 우드 람빅이라고 부를 수 있다.
두 번째 의문, 람빅으로 먹고살 수 있는가? 쉽지 않다.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는 많은 돈과 시간이 들어간다. 회전율이라도 높거나 고급 위스키처럼 고가에 팔 수 있으면 좋으련만. 벨기에 사람들에게도 람빅은 일상적으로 마시는 맥주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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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비꽃이 들어간 람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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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호랄에서도 '우드'가 가진 진정성을 높이기 위해 명확한 기준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우드 괴즈에 1~2년 된 람빅을 섞어도 됐지만 지금은 3년 이상의 람빅을 섞어야 한다든지, 람빅에 지역성까지 포함시키는 법을 EU에 요구하는 것 같은 노력을 예로 들었다.
게르츠는 그런 기준을 지키며 람빅을 만든다면, 다른 방향으로 확장은 얼마든지 허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람빅 방식을 이용한 사과 발효주, 시드르를 만들 수도 있고, 위에서 언급한 꽃을 넣은 람빅도 가능하며, 샴페인 방식으로 양조할 수도 있다고.
그제야 람빅의 속살을 볼 수 있었다. 람빅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었다. 그 속에는 지역과 재료가 녹아있었다. 무엇보다 돈보다 열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들어있었다. 그동안 신맛이 싫어서 람빅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람빅 속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갑자기 냉장고에 오랫동안 잠자고 있는 람빅들이 생각났다. 이제는 람빅을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익숙하지 않은 문화를 포용할 줄 아는 태도, 신맛 가득한 람빅은 오십 줄에 접어든 나에게 달달한 교훈을 남기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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