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에서 독립의 불꽃을 피운 오석 김혁 장군을 아십니까

용인시민신문 김학민 2025. 5. 8.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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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신민부 창설 100년, 용인 출신 독립운동가 김혁 탄생 150년을 기리며

[용인시민신문 김학민]

오석 김혁 장군은 1875년에 용인 농서동에서 태어나 1939년 4월 23일 고향에서 생을 마쳤다. 김혁 장군은 1919년 용인 기흥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으며,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흥업단 부단장·대한독립군단 군사부장·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성동사관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다.

특히 1925년 김좌진 장군과 함께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고 중앙위원회 중앙집행위원장이자 성동사관학교 교장을 겸임하며 무장독립운동 세력의 중심적 역할을 했다. 신민부 창설 100년, 오석 김혁 장군 탄생 150년을 맞아 특별 기사를 마련했다. - 기자 말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일제하 무장 독립운동
 오석 김혁 장군 초상화
ⓒ 용인시민신문
1919년 3.1운동과 동시에 국내·외에서 공화정을 표방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났다. 임시정부 수립 운동은 3.1운동으로 갑자기 돌출된 것이 아니라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할 무렵부터 시작됐다. 서울, 미국, 러시아의 연해주, 중국의 베이징·상하이 등지에서 분출돼왔던 '임시정부 수립' 논의가 3.1운동으로 가속화해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다.

이렇게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간 중국 땅에서 민주 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 주권 자치 실현을 목적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과 제국주의 열강의 냉대, 임시정부 내의 파벌 갈등, 재정 부족 등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자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후방인 상하이에서 출범한 초기의 임시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정부'로서 위계를 갖추는 '민정' 부문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국이 적에게 침탈돼 이역만리 타국 땅에 '망명정부'를 세웠다면, 그 일차적 과제가 '군정' 체계를 구축해 적과 맞서 싸우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취약했던 임시정부로서는 이를 수행하기 쉽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정부 수립 5년 후인 1924년경에야 만주에서 활동하던 참의부와 정의부 등 무장 독립운동단체와 연계할 수 있었고, 1940년 광복군 창설로 임시정부의 직할 무력을 갖출 수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 주만(駐滿) 참의부'는 1924년 만주 집안현에서 조직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직할의 독립군 단체이다. 이 단체는 1924년 6월 26일 임시정부로부터 정식으로 인준을 받아 집안·무송·장백·안도·통화·유화 등지에 거주하는 동포 사회를 관할하며 일본 군경 습격, 일제 통치기관 파괴, 친일파 숙청, 군자금 모금 등 각 방면에 걸쳐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일제의 기세로 1925년 후반부터 세력이 위축되고, 1929년 조직을 이끌던 김소하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해체됐다.

정의부는 1920년 청산리전투 후 일본군의 간도 학살과 1921년 자유시 참변 등으로 만주·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이 분산·침체하자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이 절실해 창설됐다. 1924년 7월 전만 통일의회 준비회가 소집되고, 대한통의부·군정서·광정단·의우단·길림주민회·노동친목회 등의 대표들이 길림성 유하현에 모여 통합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 그해 11월 독립운동연합체인 정의부가 탄생했다.
 오석 김혁장군 칠판 현판
ⓒ 용인시민신문
초기 정의부는 무장투쟁 노선을 견지했지만, 1926년부터 독립운동의 현실적 여건을 고려해 무력 행동을 삼갔다. 흥업실업사 설립, 농민조합·농민호조사 등 지방행정 조직 강화, 화흥중학교·동명중학교·화성의숙 등 일반교육과 함께 군사교육 및 사상문화 계몽에 힘을 쏟았다.

신민부 창설 주도한 오석 김혁 장군

1925년 초,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이 모여 효과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통합을 논의하는 '부여족(扶餘族)통일회의'가 길림성 목릉현에서 개최되고, 이 회의가 발전돼 1925년 3월 10일 영안현에서 통합 독립운동체 '신민부'가 결성됐다. 이 결성대회에는 대한독립군단(김좌진·최호·박두희 등)과 대한독립군정서(김혁·조성환·정신 등) 대표를 주축으로 각 단체 대표 및 여러 지역의 민선 대표와 국내 단체 대표들이 참가했다.

이날 대회에서는 신민부의 창립과 진로를 천명하는 선포문과 기관 명칭·제도·사업 방침·군사·재정·교육·헌장 등 12개 항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신민부는 공화주의와 민족주의를 기본으로 해 중앙집행위원회(행정기관), 참의원(입법기관), 검사원(사법기관) 등의 근대적인 삼권분립제로 조직됐다. 1924년에 창립된 참의부와 정의부가 '군정' 중심의 항일무장투쟁을 지향한 데 비해, 신민부는 북만주 지역을 통할하는 '임시정부' 같은 모양새를 갖춘 것이다.

신민부 창립 대회에서는,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김혁과 조성환·김좌진 등 9인을 위원으로 선출했다. 참의원은 원장 이범윤과 의원 김이윤·양재헌 등 15인, 검사원은 원장 현천묵과 검사원 강규상·노호산 등 10인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참의원과 검사원은 현실적으로 운영이 어려워 가동되지 못했고, 중앙집행위원회가 모든 조직을 관장하였다.

김혁은 대한제국의 무관학교 1기 출신으로, 참여자 중 가장 연장자인 데다 정규군 장교 경력이 있어 이견 없이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됐다. 김혁은 1907년 일제가 구한국군을 해산시키자 1년여 동안 무장독립운동을 벌일 근거지를 찾아 북만주를 답사했다. 고국에 돌아와서는 대종교에 입교, 이름을 '김학소'에서 '김혁'으로 바꾸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인들을 만나 군자금을 모아 1919년 3.1운동 후 만주 무송현으로 망명했다.
 일본군에 체포된 김혁 장군을 비롯한 신민부원을 호송한다는 기사가 실린 신문. 1928년 3월자.
ⓒ 용인시민신문
신민부는 창립 이후 지역 조직을 확장·강화하는 한편, 총기로 무장한 500여 명의 별동대와 보안대를 편성해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 김좌진의 통솔하에 무장독립운동을 벌였다. 그 뒤 항일전에 대비할 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목릉현 소추풍에 성동사관학교를 설립, 500여 명의 졸업생을 독립군 간부로 배출했다. 이는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 김혁이 모두 관장했다.

신민부는 둔전제를 실시, 관할 지역의 모든 장정에게 군사 훈련을 시켜 항일전 준비 및 상비군을 구축하려 했다. 1927년에는 이중삼 등 특수 공작대를 국내에 밀파하여 일본 군경의 배치 상황과 작전 지도를 작성했고, 수시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또한 해림 지역의 초대 조선인민회 회장 배두산 등 북만주 지역의 친일파 및 친일 단체를 습격, 응징했다.

신민부는 농촌의 계몽과 교육 및 산업 발전에도 적극적이었다. 한인 자녀의 의무 교육을 목표로 50여 개 소학교를 설립하고, 마을마다 노동 야간 강습소를 설치, 운영했다. 1925년 4월 기관지 <신민보>를 발행해 문맹 퇴치와 항일 독립정신 고취에 힘을 쏟았다. 또한 산업의 진흥을 꾀해 실업부를 설치하고 공농제 실시, 식산조합 및 소비조합 설치, 부업 장려 등을 권장했다.

그러나 현대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일제 경찰의 공격을 피해 가기는 쉽지 않았다. 1926년 12월 모연대장(募捐隊長) 황일초 등이 하얼빈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혔고, 1927년 2월에는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아 중앙집행위원장 김혁을 비롯하여 유정근 등 주요 간부들이 체포됐다. 신민부는 결성 이후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3부 통합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내부의 갈등과 김혁 등 주요 간부의 체포로 세가 급속히 약화돼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김혁 장군 탄 150년을 기리며
 64세로 순국한 김혁 장군은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에 안장돼 있다.
ⓒ 용인시민신문
오석 김혁 장군은 1875년 10월 6일, 용인시 기흥구 농서동에서 법부 참서관이었던 아버지 김태식과 어머니 윤현숙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장군은 태어나 장년기까지는 문중의 항렬에 따라 지은 '학소(學韶)'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1912년 대종교에 입교한 후에는 김혁(金赫, 또는 金爀)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장군은 어린 시절 용인향교에서 동전(東田) 맹보순(孟輔淳) 선생에게서 배운 후 1898년 6월, 대한제국 무관학교의 1기생으로 입학했다. 김혁 장군은 1년 6개월가량 교육과 훈련을 마치 후 1900년 1월 육군 보병참위로 임관했다. 그해 7월 황실 직속의 친위 제1연대 제1대대에 부임한 후 이어 고종황제를 근접 보위하는 시위 제1연대 제3대대에서 근무했다.

1907년 일제의 강압적 군대 해산으로 육군 정위로 퇴임하고,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장군은 만주로 떠났다. 장군은 만주 땅을 근 1년여 동안 답사하면서 같은 뜻을 갖고 활동하는 지사들을 만나고, 다시 국내로 돌아와 1912년 대종교에 입교했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김혁 장군은 용인의 만세운동을 이끌어 기흥지역에서도 일제에 항의하는 시위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그해 5월, 장군은 가까스로 일제의 눈을 피해 중국 봉천성 무송현으로 망명해 그해 8월, 윤세복, 김호 등의 동지와 수백 명의 애국청년을 규합해 흥업단을 조직했다. 흥업단은 겉으로는 산업을 진흥시키며 동포 간 친목을 도모한다고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독립기지 건설에 심혈을 기울였다.

1920년 장군은 홍범도, 이청천 등과 함께 의용군을 조직, 북로군정서로 확대했다. 1921년 1월에는 밀산현 부근에서 대한독립군을 조직하고 군사부장으로 대일항쟁을 총지휘했다. 1922년 8월, 장군은 노령 지역에서 다시 만주로 돌아와 대한통의부를 결성, 군사부감으로 취임했다. 1923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 국민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24년에는 현천묵, 조성환, 나중소, 김규식 선생과 함께 대한독립군정서를 조직해 활동했다.
 기흥구 구갈동 김혁 공원에 설치된 오석 김혁 장군 독립운동기념비
ⓒ 용인시민신문
김혁 장군은 1925년 3월 영안현 영고탑에서 김좌진과 함께 신민부를 결성하고 최고 책임자인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했다. 또 신민부가 독립군 양성을 위해 목릉현 소추풍에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하자 장군은 교장, 김좌진은 부교장에 취임했다. 1926년에는 위하현 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일제의 요인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살왜단(殺倭團)'을 조직했다.

그러나 조국의 광복을 위해 무장투쟁을 이끌었던 김혁 장군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28년 1월 25일, 석두하자에서 신민부 총회를 개최하던 중 일제 경찰의 급습을 받아 체포된 것이다. 장군은 1929년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 중 1935년 5월 26일 병세가 위중하여 출옥하였다. 1939년 4월 23일, 김혁 장군은 오랜 감옥 생활로 극도로 쇠약해진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64세로 순국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민씨는 사단법인 오석김혁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입니다. 김학민 이사장은 1948년생으로 용인시 기흥구 하갈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경기문화재단 문예진흥실장, 한국사학진흥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경기아트센터 이사장과 도서출판 학민사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용인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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