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현장르포] ③ K리그가 사우디와 실력으로 '비비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와사키가 준 교훈

김정용 기자 2025. 5. 8.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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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이 고타(가와사키프론탈레, 왼쪽)와 호베르투 피르미누(알아흘리). 게티이미지코리아

[풋볼리스트=제다(사우디아라비아)] '풋볼리스트'는 국내 언론매체 중 유일하게 새로 개편한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엘리트(ACLE) 4강과 결승전을 현장 취재했다. 왜 아시아가 더 화려해지고 있는지, 직접 느낀 사우디아라비아 관중들은 어땠는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아시아 클럽 축구계에서 한국 팀들은 어떤 모델로 경쟁해야 할지, 3부작에 걸쳐 다각도로 조명한다. [편집자주]


돈을 펑펑 쓰는 데 안주해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자금력을 극대화할 수 없다. 축구 전통과 저력이 있다고 자위하는 태도만으로는 동아시아의 전통을 국제 경쟁력으로 바꿀 수 없다. 고정관념에서 한 발 더 나아간 팀이 아시아 정상에 도전할 자격을 얻는다.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엘리트(ACLE) 형태로 개편한 첫 대회에서 결승에 오른 두 팀의 행보는 상징적이다. 우승한 알아흘리, 준우승한 가와사키프론탈레는 각각 장점을 극대화했다. ACLE는 8강부터 중립 지역에서 열리는 단기 토너먼트 형태로 개편됐는데, 다음 시즌 사우디를 비롯해 한동안 중동에서 개최될 가능성이 높다. 동아시아 팀이 연봉 열세에 낯선 환경까지 극복하면서 좋은 성적을 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중동 눈치를 보느라 형평성이 떨어진다'고 불평만 하기에는, 중동 자본이 들어왔기 때문에 대회 규모가 엄청나게 커진 것 역시 사실이다. 이번 가와사키처럼 준우승만 해도 과거 ACL 우승 상금 이상을 벌 수 있다.


호베르투 피르미누(가운데) 등 알아흘리 선수단. 게티이미지코리아

▲ '해줘' 축구에서 벗어나자 더 강해진 사우디 구단, 알아흘리


알아흘리는 사우디에서 전폭적인 투자를 받는 4강 중 하나지만 그 중에서는 선수단이 가장 덜 화려하다. 지난 2023-2024시즌 순위도, 진행 중인 2024-2025시즌 중간 순위도 사우디 프로 리그 3위다. 그런 알아흘리가 ACLE에서 우승한 데에는 약간의 행운도 따랐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원래 개최지가 리야드였다가 파이널 스테이지 약 2개월 전 급히 제다로 바뀌었는데 그러면서 알아흘리 홈 구장에서 대회를 치르게 됐기 때문이다.


알아흘리에서 가장 스타라 할 만한 선수는 알제리 대표 리야드 마레즈, 잉글랜드 대표 아이반 토니, 브라질 대표 출신 호베르투 피르미누 등이다. 확실히 유럽 빅 클럽 수준이 멤버 구성이긴 하지만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알나스르), 카림 벤제마(알이티하드)에 비하면 명성 측면에서 한 수 아래였다.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K리그 출신 말컹, K리그를 거쳐 중동에 갔다가 현재 인천유나이티드에 와 있는 바로우 등이 알아흘리 소속이었을 정도였다.


알아흘리가 다른 사우디 팀과 다른 첫 번째 특징은 야심만만한 감독이다. 유럽에서 전성기를 보내고 적당히 건너온 유명인이 아니라, 떠오르는 1987년생 신예 감독을 택했다. 마티아스 야이슬레 감독은 독일의 차세대 명장 후보로 꼽혔다. 오스트리아 구단 레드불잘츠부르크에서 탁월한 전술적 능력을 발휘했다. 그런데 알아흘리의 거액 러브콜을 받고 2023년 중동으로 건너왔다.


이후 야이슬레 감독은 구단이 사 주는 스타 선수들에 안주하지 않았다. 선수를 더 사달라고 구단과 마찰을 겪었는데 사우디 구단 감독으로서는 특이한 행보였다. 그 결과 올해 1월 PSV에인트호번의 어린 수비수 마테오 담스, 포르투의 20대 윙어 갈레누를 영입했다.


이 두 명을 추가로 영입한 게 마지막 퍼즐이었다. 사우디 자국 리그는 U21 포함 외국인 선수를 10명 투입할 수 있는데, 대부분 구단은 10명을 보유한다. 그런데 알아흘리는 현재 12명을 보유하고 있다.


스타 선수인 피르미누를 자국 리그에서 등록 제외해 버렸다. 피르미누는 이때부터 ACLE 전용 선수가 됐다. 몇 주 동안 휴식을 취하다가 ACLE 경기에만 등장해 응축된 힘을 폭발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결국 피르미누는 ACLE 대회 MVP를 차지했다. 파이널 스테이지 3경기에서 총 2골 3도움으로 공격 포인트 5개를 쏟아냈다.


세련된 전술가 야이슬레 감독은 스타의 개인역량에 맡기는 '해줘 축구'가 아니라 선수들이 자신의 지시를 잘 이행하는 축구가 필요했다. 그러려면 활동량이 필수적인데, 평소에는 더 어린 선수들로 활동량을 채웠다. ACLE에서는 이 임무를 피르미누가 해냈다. 피르미누는 전성기 때도 창의성이 아니라 감독이 시키는 임무를 최선으로 수행하는 게 특기인 '노동자형' 스타였다. 비록 34세가 되었지만 푹 쉬고 나온 피르미누는 리버풀 시절을 연상시키는 영향력으로 우승을 이끌 수 있었다.


알아흘리가 ACLE에서 세계적인 트렌드에 가장 맞는 팀이었다. 요즘 강팀의 조건은 운동능력 좋은 센터백이다. 알아흘리의 야생마 같은 센터백 이바녜스는 대회 최고 경기력을 보여줬다. 최대 빅매치였던 4강전에서 알아흘리가 알힐랄을 꺾은 결정적인 차이도 팔팔한 이바녜스와 전성기에서 내려온 알힐랄 센터백 칼리두 쿨리발리의 운동능력이었다. 쿨리발리가 이바녜스의 돌진에 휘말려 퇴장당하면서 승패가 갈렸다.


반면 스타의 개인역량에 심하게 의존한 알나스르의 경기력은 엉망진창이었다. 사우디 구단들도 앞으로 트로피를 따내려면 경기력의 질을 더 높여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유럽을 떠나 사우디로 가는 건 갈수록 창피하지 않은 일이 되어가고 있다. 사우디는 더 많은 20대 초반 스타, 더 많은 전술가형 감독을 모셔 와 축구의 질까지 높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알나스르처럼 한중일 팀이 꺾어볼 만한 '구멍'은 점점 줄어든다.


정성룡(가와사키 프론탈레). 서형권 기자

▲ J리그에서는 중위권, 가와사키가 사우디 상대로 선전한 비결은


가와사키는 일본 전통의 강호가 아니다. 2005년 이후 강등된 적 없이 쭉 J1리그에 머물렀지만 12년 동안 무관이었다. 이 기간 동안 준우승은 세 번 했지만 내려가면 11위까지 떨어졌고, 컵대회에서도 결승에 오른 적이 있을 뿐 트로피를 들지 못했다.


대한민국 대표팀 주전 골키퍼 출신 정성룡은 가와사키를 일본 정상급 팀으로 올려놓은 개국공신이다. 정성룡 영입 2년차였던 2017년 첫 J1 우승을 차지하면서 진정한 강팀이 됐다. 이때부터 5시즌 중 4시즌 우승을 차지했다. 여기에 컵대회를 포함하면 첫 우승 후 8년간 트로피 10개를 쓸어 담았다.


사실 최근 가와사키의 경쟁력은 가장 좋았던 시절과 거리가 있었다. 두 시즌 연속 리그 8위에 그쳤고, 이번 시즌도 ACLE를 마친 시점에서 14위까지 떨어져 있다. 사우디에 다녀오느라 자국리그 일정이 밀렸기 때문에 돌아가자마자 강행군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면 J1리그 중위권에 불과하며 아시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낸 적 없는 팀인데도 불구하고 ACLE 결승에 갔다는 뜻이다.


대진운이 좋았던 것도 사실이다. 동아시아팀 중 유일하게 8강에서 사우디 구단을 피했다. 카타르의 알사드와 연장 접전 끝에 승리했다. 4강에서 만난 사우디 팀 알나스르도 그나마 가장 쉬웠다. 40세 호날두는 황당할 정도로 활동량이 적었다. 기자는 호날두가 뛰는 실전을 27세부터 여러 번 현장 취재했는데, 공을 잡을 때의 스피드는 전성기와 큰 차이가 없었지만 오프 더 볼 움직임은 말도 안 되게 줄어들어 있었다. 이를 다 감안해도 가와사키가 체력부담과 원정의 불리함을 뚫고 가장 선전했다는 건 분명하다. 결승전도 결정력 외에는 크게 밀리지 않았다.


정성룡을 직접 만나 들어본 설명에 따르면, 가와사키의 저력은 풍부한 선수층과 그동안 쌓아 놓은 구단의 저력에서 나온다. 결국 육성이다. 가와사키는 "유럽으로 많이 보내주는 팀"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다. 그래서 많은 유망주들이 모여든다. 유럽 진출 전까지, 또는 유럽진출이 무산될 경우 더 오랫동안 가와사키의 일원으로서 힘을 보탠다. 때로는 유럽에서 돌아와 활약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팀에는 베테랑과 어린 선수가 공존한다. 해외에서 경험한 선수도 있고, 유스에서 올라온 선수들의 기량차가 예전보다 훨씬 좁아졌다. 가와사키는 유럽으로 매년 간다는 이미지와 국가대표를 배출한다는 이미지가 있어서 좋은 유소년이 많이 입단한다." (정성룡)


실제로 가와사키는 최근 7년 연속으로 유럽파를 배출했다. 일본 선수들이 유럽 진출을 워낙 선호하기도 하지만 탁월한 실력이 아닌 선수라도 도전의식을 보이면 임대 후 완전이적 형태를 수락해주는 등 가와사키는 협조적이었다. 그 중 2019년 이타쿠라 고, 2021년 미토마 가오루와 모리타 히데마사 등 유럽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국가대표팀에서도 자리 잡는 선수가 여럿 등장했다.


많이 보내는 만큼 유럽파도 많이 확보한다. 현재 가와사키 스쿼드에 유럽 경험 있는 일본인(혼혈 포함)은 4명이다. 그 중 이에나가 아키히로는 울산HD에서 활약한 것으로 한국 축구팬들에게 친숙한데 사실 스페인 진출 후 잘 풀리지 않아 돌아오는 과정에서 울산을 택한 경우였다. 즉 유럽파 출신이다. 동시에 요즘 일본 추세에 맞게 외국에서 태어나 J1리그로 합류하는 혼혈 선수들을 영입해 국제적인 감각을 유지했다.


ACLE는 유럽 진출의 교두보도 될 수 있다. 21세 센터백 다카이 고타는 차세대 스타로 꼽힌다. 다카이는 알나스르의 호날두, 존 두란을 잘 막아내면서 실시간으로 주가가 올랐다. 기자가 정성룡을 만나러 찾은 가와사키 숙소 근처에서 에이전트 등 많은 축구계 관계자들이 스쳐 지나갔다.


가와사키는 매번 선발 멤버를 5명씩 바꾸며 체력을 안배했다. 특히 알나스르를 상대할 때 파격적인 라인업을 꺼냈다. 최전방 공격수 간다 소마, 공격형 미드필더 오제키 유토 모두 20세였다. 둘 다 팀내 간판 유망주라 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상대 수비형 미드필더 마르첼로 브로조비치에 대한 전방압박을 비롯해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다 수행했다. 가와사키의 플레이스타일이 유소년팀 및 2진까지 다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누가 올라오더라도 즉시 1군 경기에 적응할 수 있다는 게 정성룡의 설명이다.


구단이 유럽 진출의 교두보일 수 있다는 걸 거부하지 않고 이를 오히려 꾸준한 전력 유지의 원천으로 삼는다. 일본 내에서 최고 전력은 아니지만 국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이는 '자국리그에서 체급으로 옆동네 팀을 누르는' 접근법으로는 타국 구단과 상대하기 힘들다는 반증으로도 볼 수 있다. K리그 구단들이 이번 시즌 ACLE에서 전반적으로 부진했던 것과 비교해 보면 차이가 더 도드라진다. 동아시아 구단들도 수많은 귀화 선수를 통해 국제화를 진행 중인 것과 비교해 보면 K리그는 아직 '우리들만의 리그'인 성격이 강하다.


글= 김정용 기자


사진= 게티이미지코리아, 풋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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