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통장서 사라진 치매노인 돈…'치매머니' 154조 관리 비상

서울에 사는 80대 치매 환자 A씨는 평소 씀씀이가 크지 않은 편이었다. 그런데 4년 전부터 통장에서 주기적으로 수십만 원씩 돈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들 B씨가 조사해보니 A씨의 인지 기능이 떨어진 걸 알게 된 지인이 계좌 비밀번호 등을 파악해 돈을 빼간 것으로 드러났다.
B씨는 급히 은행에 요청해 추가 출금을 막았다. 하지만 고민은 여전하다. B씨는 "후견인 제도를 알아봤지만, 너무 복잡해 활용이 어려웠다"며 "가족들 간에도 불씨가 남아 있다. 향후 다른 가족들과 상속 분쟁이 벌어질까 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이에 따라 고령 치매 환자도 급증하면서 A씨 사례처럼 범죄나 분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자산의 규모도 크게 늘고 있다. 6일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저고위)는 고령 치매 환자자 보유한 자산, 일명 ‘치매 머니’가 154조원에 육박한다는 전수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국내총생산(GDP)의 6%를 넘는 규모다.
정부 차원에서 치매 머니를 조사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저고위는 국민건강보험공단·서울대 건강금융센터와 함께 의료비 청구 자료, 종합·연금 소득, 주택·토지 같은 재산 자료 등을 활용해 고령 치매 환자 전체의 5년 치 소득·재산 규모를 추산했다.
부동산만 113조…2050년 GDP 15.6%로

앞서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에서는 치매 머니가 이미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기초생활수급자였던 치매 고령자의 통장을 사망 후 확인해 보니 약 1100만엔(약 1억 1000만 원)이 예치된 게 알려져 화제가 됐다. 치매 부모를 병간호하는 자녀가 부모 자산을 활용하지 못해 파산하는 사례도 종종 보도된다. 지난해에는 치매 환자를 속여 시세의 10배에 부동산을 구매하는 계약을 맺은 이들이 사기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치매 머니가 빠르게 늘면서 이런 문제점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우선 치매 노인이 자신의 자산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틈을 악용한 범죄의 표적이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2021년엔 한 간병인이 자신이 돌보던 치매 환자 계좌에서 12억 원을 빼냈다가 들통이 났다. 지난해 9월엔 치매 환자의 손자 행세를 하며 1억 4100만 원을 빼돌린 20대 남성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치매 환자의 자산이 동결되면 가계가 보유한 자산이 소비·투자로 순환되지 않아 사회·경제적으로도 손해다. 은행은 고객이 치매에 걸린 것을 알게 되면 예금 인출 등 거래를 제한하는데, 이로 인해 환자나 가족이 경제적으로 곤란해지는 경우도 있다.
범죄 표적 위험에 "관리 대책 마련"

이미 현실의 문제가 된 치매 머니에 대해 정부가 서둘러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표적인 대책으로 꼽히는 '치매 공공후견인' 제도는 이용률이 저조하다. 정부가 수탁자가 돼 재산을 관리해주는 공공신탁 제도는 아직 시범사업 단계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생애 주기상 고령기가 굉장히 길어졌지만, 치매라는 취약성을 가지게 되면 자기 결정권을 어떻게 할 것인가 등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활성화돼있지 않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공공·민간 신탁 제도 활성화는 물론이고, 노인 연령에 접어들 때 자산을 전체적으로 평가하고 재설계할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전문성이 강화된 노후자산설계 상담서비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저고위는 이번 조사를 시작으로 매년 치매 머니 변동 상황을 분석해 공개할 계획이다. 주형환 저고위 부위원장은 "이번 치매 머니 규모 파악은 체계적인 대책 마련을 위한 실마리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며 "치매 머니 관리·지원 대책을 마련해 연말에 발표될 제5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에 반영하겠다"고 말했다.
남수현 기자 nam.soohyo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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