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인으로 살아남기] 여름휴가 계획 내라는 회사, 생각만 해도 피곤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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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향인으로 살아남기'는 40대 내향인 도시 남녀가 쓰는 사는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이혜란 기자]
5월이 되자 회사에서는 서서히 휴가 계획을 받기 시작한다. 이번 우리 팀의 인력 조정으로 회사에서는 벌써부터 여름휴가 계획을 묻는다. 휴가라니, 올해도 또 오는구나. 모든 직장인의 꿈이자 일년에 한 번 받는 공식적인 방학 앞에서 나는 어쩐지 또 망설이고야 만다.
"이 차장은 어디 안 가?"라고 묻는 직장 동료의 말에 꾸욱하고 침을 삼키며 잠시 생각하는 척을 했지만, 아무래도 생각나는 곳이 없다. 올해도 역시나 구체적으로 가고 싶은 곳은 없다. 여름휴가로 받는 5일에 주말 휴일을 모두 붙인 긴 여행을 떠올리기만 해도 벌써 마음이 피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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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수산책길 조용한 산책코스 |
| ⓒ 이혜란 |
나도 그런 낭만이 있는 청춘이 되려고 노력했고, 여행지에서 보고 느끼고 경험했던 그것들을 나 역시 예찬하고 감동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곳을 가도 나는 3일만 지나면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매일이 다른 낯선 하루, 낯선 잠자리, 낯선 사람들. 그러니까 이 낯선 경험을 위해서 떠나온 곳임에도 나는 이 낯선 외부 자극 때문에 쉬이 불안했고 지쳤다. 아주 잠깐의 감동과 설렘을 느낀 후, 이곳이 내 동네가 아니라는 사실에 곧잘 피로해졌다.
능통하지 못한 영어, 낯선 음식, 매 순간 실수투성이로 예측하지 못한 사고들이 누군가에겐 살아있는 생동감이 된다면, 나에겐 지속적인 스트레스가 되었다. 특히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와 함께하는 해외여행은 그 일주일을 내리 초각성 상태의 초인적 엄마 모드로 견뎌냈다.
'3인 가족, 일년에 한번 해외여행'이라는 그럴듯한 목표를 가지고 일 년동안 열심히 모으고 저금한 돈은 일주일 동안 낯선 타국에서 불안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여행은 좋은 거니까, 아이에게 분명 좋은 경험이 되었을 거니까, 고생도 불안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될테니까. 그래, 정말 그게 맞는거겠지?
그러다 한국 입국행 비행기를 타러가는 여행의 마지막 날, 나는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이제 집에 간다. 이 비행기 끝의 일정은 내 집이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캐리어를 정리한다. 여독으로 피로한 몸이었는데, 익숙한 내 집으로 돌아오니 에너지가 차오른다. 그 날 나는 기어코 모든 짐을 정리해 버리고야 말았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때 낯선 숙소가 아닌 내 침대 위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비로소 여행이 끝났음을 느끼며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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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 고양이와 함께하는 고요한 일상 |
| ⓒ 이혜란 |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멀고 긴 여행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피로감이 물씬 차오른다. 여행 한번을 위해서 갖춰야하는 조건들이 즐비하다. 육체적인 피로감과 정신적 불안, 경제적 조건과 시간적 여유, 더하여 함께 떠나는 이들의 컨디션까지 두루 살펴야만 한다. 나에게 긴 여행은 휴식이 아니라 숙제가 되는 셈이다. 그러니 여행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말이 없어진다.
여행을 가지 않고 휴가를 보낼 수는 없을까. 익숙하고 편안한 내 집에서 늦게 자고 일어나 조금은 특별한 점심을 먹고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들으며 오래 천천히 걷다가 하루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 가족들과 저녁 메뉴만을 고민하는 아주 '일상적인 휴가'를 꿈꾼다. 어디로 떠나지가 아니라, 어떻게 머무르며 보낼지를 느긋하게 고민하는 일. 나는 그런 휴가를 여행이라고 부르고 싶다.
새로운 경험과 성장, 휴식과 재충전, 가족과의 추억 등 우리는 여행을 통해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한 무언가를 기대한다. 나 역시 분명히 그랬고, 그러한 시간들을 통과했다. 그러나 점차 여행을 떠나는 대신, 나만의 세계에 몰입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가 소중해졌다. 여행을 통해 얻는 외부의 신선한 자극 대신, 좋아하는 소설 쓰기 강의를 등록하고 수업을 듣는 일처럼 내부의 세계가 확장되는 것이 즐겁다. 멀리 가지 않아도 내 안의 세계는 충분히 커져 간다.
여행처럼 특별함이 주는 인생의 이벤트도 좋지만, 요즘은 자꾸만 일상의 조용함이 좋아진다. 하루 한번, 산책을 나선다. 같은 거리와 코스를 매일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호수를 품은 산책로의 사시사철을 관찰하고 감상한다. 익숙한 환경과 예측되는 일상이 주는 안정감은 외부로 향하는 모든 자극을 조용히 꺼두고 나의 세계를 열어줄 안테나를 켜게 한다. 그 안에서 나는 평안함을 느끼며 매일을 작은 여행처럼 지낸다.
조용한 게 좋다. 심심한 건 편안하다. 나른한 건 안정적이다. 짜릿함은 여전히 즐겁지만, 뭐랄까, 조금 피곤하다. 예상치 못한 일은 이제 기쁜 이벤트가 아닌 새로운 숙제다. 어제와 같은 하루가 나쁘지 않다. 즐거워할 일은 없지만 실망할 일도 없는 이 일상에 감사하게 된다. 나도 이제 어른이 다 됐나 보다. - 책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
여행 대신 일상이 좋아지는 나, 나도 이제야 어른이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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