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현장르포] ② 사막 한가운데서 축구에 미치는 자들의 야망과 '근본'

김정용 기자 2025. 5. 6.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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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흘리 관중. 게티이미지코리아

[풋볼리스트=제다(사우디아라비아)] '풋볼리스트'는 국내 언론매체 중 유일하게 새로 개편한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엘리트(ACLE) 4강과 결승전을 현장 취재했다. 왜 아시아가 더 화려해지고 있는지, 직접 느낀 사우디아라비아 관중들은 어땠는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아시아 클럽 축구계에서 한국 팀들은 어떤 모델로 경쟁해야 할지 다각도로 조명한다. [편집자주]


사우디아라비아 프로축구는 시쳇말로 '근본'이 없고 돈만 많은 리그 취급을 받곤 한다. 최근에는 근본까지 돈으로 사려는 듯 보인다. 그런데 그들의 축구 역사와 열기를 좀 더 살펴보면, 아시아에서 가장 근본이 있던 리그가 이를 되찾아가는 중임을 알게 된다.


사우디 축구가 전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2022년 12월 충격적이었던 알나스르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영입부터였다. 호날두의 이적은 심리적 저항선을 확 바꿨다. 슈퍼스타들이 사우디행을 꺼리지 않게 됐다. 사우디 국부펀드(PIF)가 투자하는 리야드의 알나스르와 알힐랄, 제다의 알아흘리와 알이티하드가 4대 강호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그 뒤를 지난해 승격팀 알카디시야가 피에르에메릭 오바메양 등을 영입하며 추격 중이다. AFC는 이에 맞춰 외국인 출전제한 규정을 사실상 전면 철폐했다.


▲ 90년 넘는 역사, '근본' 있는 사우디 축구


스타를 많이 영입하는 구단이 문제를 겪는 경우는 크게 둘 중 하나다. 원래 축구 인기가 없는 지역에서 구단주가 무리하게 이적료만 지출했거나, 혹은 리그에서 한 팀만 성장해 전체적인 경쟁력에 문제를 일으키거나다. 전자는 관중석이 텅텅 비어 있는 카타르의 강팀들이 해당된다. 후자는 최근 급성장해 말레이시아의 대표 강호로 지위를 굳혔지만 나머지 말레이시아 축구계와 충돌하고 있는 조호르다룰탁짐의 불안요소다.


이들과 달리 직접 돌아본 사우디 축구는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축구 인기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우버 기사들은 종종 리야드 구단 알힐랄과 알나스르에 대한 적개심을 밝혔고, 주로 알아흘리를 응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길거리에도 알아흘리 유니폼을 입은 어린이들이 많이 보였다. 특히 놀라운 건 ACLE 결승전에서 알아흘리가 우승을 차지한 뒤 공항에서 본 풍경이었다. 일본으로 돌아가는 가와사키프론탈레 서포터보다, 국내선으로 사우디 다른 도시를 향해 돌아가는 알아흘리 서포터가 훨씬 많았다. '전국구' 인기였다.


구단마다 격차는 크지만 4대 부자 구단은 홈 경기마다 다섯 자리 관중을 꾸준히 유지할 정도로 동원력이 뛰어나며 이들 사이의 라이벌 경기는 자국 리그에서도 5만 관중이 든다. 한때 영국 'BBC'가 사우디 리그에 관중이 없다는 기사를 쓰곤 했지만, 그건 스티븐 제라드 감독과 조던 헨더슨 등이 뛰어 영국 매체들의 주목을 받았던 알이티파크가 비인기팀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4강에서 열린 알아흘리와 알힐랄의 대결은 ACLE 역사에 남을 만한 엄청난 열기를 뿜어냈다. 알힐랄은 사우디 최강팀인 만큼 전국적으로 안티도 많은, 독일로 치면 바이에른뮌헨 같은 존재다. 이날만 그런 게 아니라 두 팀이 만날 때는 중립 관중석이라는 게 아예 없다. 경기장 한가운데에 안전요원으로 인간띠를 만들어 정확히 경기장 절반을 갈라 응원전을 벌이게 한다. 관중 숫자, 응원의 전투적인 공격성, 여기에 서포터 숫자가 정확히 똑같다는 특징이 어우러지면서 세계 어느 곳에서도 경험하기 힘든 수준의 엄청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사우디 주요 라이벌전은 원래 관중의 심장마비 위험이 높은 경기로 꼽힌다. 이날은 관계자들도 팬심을 감추지 못했다. 흥분하다 발작에 가까운 증상을 보이더니 기도로 마음을 가라앉힌 관계자, 홧김에 눈 앞에 보이는 걸 걷어차다가 발 부상을 입은 관계자도 있었다고 한다.


아시아 축구 곳곳을 오래 관찰한 신만길 AFC 부총장은 "축구 관람 문화가 자리 잡지 못한 곳도 아시아에 많다. 하지만 전통과 축구 인기를 꼭 인정해야 하는 두 나라를 꼽는다면 사우디와 이란"이라고 이야기했다.


전통이라는 시각에서도 동아시아 구단들이 '너희들은 근본이 없다'고 말하기엔 멋쩍다. 홍해 항구 도시라 축구가 유입되기 쉬웠던 제다에서는 알이티하드가 1927년 창단해 무려 97년 역사를 갖고 있으며, 알아흘리는 1937년 창단했다. 리야드 연고의 알나스르는 1955년, 알힐랄은 1957년 역사가 시작됐다.


호날두(알나스르). 서형권 기자
세르게이 밀린코비치사비치(알힐랄). 게티이미지코리아

▲ 영화제, ACLE를 거쳐 네옴시티 프로젝트까지… 사우디의 초대형 프로젝트 속 축구


산업으로서 축구가 발전하면서 사우디 선수들의 실력도 덩달아 상승하고 있다. 한때 자국 선수들이 설 자리를 잃는다며 우려의 목소리도 컸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는 그 좁은 출전기회를 뚫고 살아남은 선수들이 오히려 빅리그 수준의 경쟁력을 증명한 셈이다. 여전히 알힐랄 주전 공격수로 활약하며 ACLE 득점왕을 차지한 살렘 알도사리가 대표적이다. 또한 자국리그의 고액연봉에 안주해 왔던 선수들이 오히려 유럽진출을 모색하는 뜻밖의 순기능도 생겼다. 현재 사우디 대표급 선수 중에는 유럽파가 4명이며 그 중 사우드 압둘하미드는 무려 AS로마 소속이다. 이는 지난 2022 카타르 월드컵 엔트리가 전원 국내파였던 것과 딴판이다.


다만 자국리그 인기가 많다는 것과 대형 이벤트 개최 인프라를 갖추는 건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사우디는 자가용과 택시 위주 문화다. 대중교통이 빈약하다. 운전 문화가 거칠다는 게 영향을 미쳐, ACLE 결승전 경기장 주변에서 교통사고가 여러 건 발생해 안 그래도 심각한 체증이 악화됐다. 제다 국제공항도 수많은 방문객을 맞이하기에는 절차가 불필요하게 복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우디가 국제대회를 유치하는 건 오히려 자국의 각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사우디는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었다. 메카의 수호자이자 이슬람 문화권의 중심이라는 자부심, 그리고 세계 3위 석유 생산량(2023년 기준)에서 오는 부유함에 머물러 폐쇄적인 상태가 오래 지속됐다. 과거에서 벗어나 문화산업을 육성하는 게 사우디의 국가적인 기조다.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왕세자 겸 총리가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비전 2030의 일환이다.


사우디의 국가적인 필요와 맞물리며 여성인권도 빠르게 나아지고 있다. 이슬람 수니파 근본주의가 우세한 사우디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이 가족과 동행하지 않으면 외출할 수 없을 정도로 보수적이었다. 당시 사우디에 진출한 외국인 선수의 가족들은 외부와 차단된 외국인 거주지구에 살았다. 그러다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가 권력을 잡던 2017년 즈음부터 여성 운전과 취직의 기회가 대폭 확대됐다. 교육열과 취직열이 높은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비전 2030의 실현에 필수적이었다. 여기에 외국인 여성들은 긴 바지에 반팔 티셔츠 정도면 의복을 더 제한하지 않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카타르 도하와 별 차이가 없었다. 변화를 과시하듯 ACLE 경기장에서 열린 공연도 대부분 여자 DJ, 여자 가수와 연주자들로 구성돼 있었다.


▲ '문화의 용광로' 제다와 '최첨단 도시' 네옴


사우디는 도하(카타르), 두바이, 아부다비(UAE) 같은 국제도시를 여러 개 개발하려 한다. 기존 대도시 중 제다를 관광도시로 발전시키기 위해 레드씨(홍해) 영화제를 개최하는 등 노력 중이다. 외국인들 입장에서는 황당한 수식어지만 제다의 홍보 문구는 '문화의 용광로'다. 사막 한가운데 새로 짓는 최첨단 신도시 네옴시티는 세계적인 화제를 모으고 있다.


축구도 국가 프로젝트를 따라 이동한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사드 알라지즈다. 알라지즈는 한동안 프로 리그 부회장직을 맡았다. 호날두를 시작으로 스타 선수 대부분을 영입해 온 핵심 인물이다. 각 구단이 개별적으로 영입하는 게 아니라 리그 차원에서 영입 및 관리를 맡아 왔다. 그런데 알라지즈가 지난 3월 부회장직을 사임했다. 네옴SC를 1부 우승후보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라는 보도가 쏟아졌다. 알라지즈는 ACLE 결승전 전날 VIP 대상 강연을 진행했는데 여전히 특정 구단 소속으로 소개되진 않았지만 사실상 네옴 관계자로 인식되고 있었다. 원래 네옴시티 근처 지역의 3부 리그 팀이었던 것을 2023년 네옴SC로 이름을 바꾸고 전폭적인 투자를 시작, 2년 연속으로 승격해 다음 시즌에는 프로 리그까지 올라온다. 이러면 기존의 4대 강팀, 알카디시야, 여기에 네옴까지 6대 강팀 체제로 리그가 더 성장하게 된다. 강팀의 숫자를 더 늘리는 방향으로 발전 중이기 때문에 유럽 출신 스타들도 갈수록 더 영입할 것이다.


글= 김정용 기자


사진= 게티이미지코리아, 풋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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