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의 위기, 우리 공동체는 법관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주용수 2025. 5. 4.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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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짊어진 공적인 무게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자리에 설 이유가 없다

[주용수 기자]

법은 공동체를 유지하는 최후의 장치이며, 사법은 그 장치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다. 그 신뢰는 단지 판결의 결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판결이 도달하는 방식, 곧 절차의 정당성, 해석의 일관성, 판단의 독립성에 대한 사회 전체의 합의에서 비롯된다. 사법이 공동체 안에서 차지하는 독립적 지위는, 그 자체가 특권이 아니라 책임의 총합임을 전제로 한다. 그 책임은 제도보다 사람의 지적 자각 위에서 작용한다.

이 자각이 약화 될 때, 사법은 권위가 아니라 의심의 대상으로 바뀐다. 법관은 공동체의 보편적 이익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개인의 신념이나 정치 성향에 따라 판단하면, 법은 중립의 언어가 아니라, 특정 권력의 수사(修辭)로 변질한다. 그 순간 법은 갈등을 구조화하는 장치로 작동하며, 사법의 독립성은 폐쇄성과 자기 보존의 기제로 의심을 부르게 된다.

특정한 판결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공동체가 사법 제도에 기대했던 공공성과 품격은 현재 어디에 있는가. 법이 사회와 구성원의 보루가 되려면, 결과의 경로에 관한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 인간의 욕망은 시대를 넘어 늘 유사한 속성에 붙들린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만 같다.
▲ 대법원 가인 김병로 상
ⓒ 대한민국법원
왕에게서 가져온 시민 주권

민중은 왕에게서 권력을 찾아왔다. 스스로 깨어남은 자기 존재를 돌려받은 의미였다. 시민이 된 민중은 주권을 대의 기구에 위탁했다. 가까스로 회전을 시작한 민주제는 힘겹게 관성을 얻으며 돌았지만, 여기저기에서 위협을 마주해야 했다. 군부의 반역과 독재자의 만행은 왕정의 유령을 수시로 유혹했고, 여전히 세계는 불평등하게 돌아가고 있다. 피 흘림은 세상 어디에서도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다. 왕의 목을 칠 때 그랬고, 군부에 맞설 때도 그랬다. 오직, 세상은 이미 피를 흘린 나라, 지금 흘리고 있는 나라, 그리고 아직 흘리지 않은 나라로 나뉠 뿐이다.

공화국 주인이 직접 경영하기에 국가조직은 복잡하고 버거웠다. 민주 헌법 계약서에 서명하고, 조직을 입법, 사법, 행정의 세 부로 분립했다. 마름을 뽑아 곁에 두었고, 일꾼을 따로 채용했다. 그 일꾼을 통제할 감독관을 별도로 임명했다. 그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동안, 주인은 왕에게 되찾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그 믿음은 큰 위협에 노출되었다. 일꾼은 주인을 수시로 겁박했다. 무례함은 막장 같은 드라마였고, 칼은 곧 실력이었다. 그는 주인을 무서워하지 않았고, 감독관마저 그와 수시로 속삭였다.

작년 12월 3일, 45년 전 겪었던 죽음의 공포가 공동체를 다시 덮쳤다. 우리 사회는 위기에 빠졌다. 마치 칼을 든 일꾼이 주인 자는 방에 쳐들어가 협박한 것과 같았다. 자기 허물 감추기에 이만한 수단이 없었을 것이었다. 하마터면, 주인의 가족이 멸문지화를 입을 뻔했다.

검찰 조직의 해체는 물리적 어려움뿐 아니라, 오랫동안 여론을 충분하게 확보하지 못했다. 국민의 상식을 외면한 조직은, 이제 스스로 지은 카르마를 짊어지게 되었다. 공정성 시비와 조직원 감싸기로, 조직 혁파 당위의 빌미를 차곡차곡 제공하고 있다.
▲ 대법원 중앙홀
ⓒ 대한민국 법원
국민의 선택에 개입하지 말아야

2025년 5월 첫날, 감독관들마저 갈지(之)자로 걷기 시작했다. 국민이 설득하지 못할 판결이었다. 법체계 유지의 본질이 안정성인데, 그들은 집행 절차에 관한 예측 가능성을 몽땅 차단해 버렸다. 주인 가족은 밤새 분노했다. 힘의 균형을 잡으라던 주인의 명을 어기고, 자기 살림을 차린 지 오래되어 보였다. 민주제를 지키려는 주인 가족은 오랜 세월 그에게 당부하곤 했다. "네가 이 가문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다."

절대 영역 같아 보였던 최고 사법부도 이렇게 자기 공신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 직위가 오늘만큼 어쭙잖아 보인 적은 없었다. 국민의 사법부 존중은 그들의 공정함이나 우수함 때문이 아니었다. 공동체를 위하여, 온전하지 못한 조직이 변화하기를 기다려왔던 것이었다. 이제 어두운 터널의 끝을 그들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품격의 무게를 이미 잃었고, 조직은 우세스러운 처지에 놓여버렸다.

전체 대법관 중, 소수의견을 낸 사람은 불과 2명이었다. 결론은 이념으로 갈린 듯 보였다. 재판이 아니라 여의도 정치 같았다. 일주일 남짓 잠도 안 자고, 6만여 쪽의 자료를 읽었다는 것을 국민이 수용할 수 있을까. 추천인의 성향에 동조하여 판결할라치면, 조직 구성비는 처음부터 결과와 맞닿게 된다. 영혼 없는 재판관은 마치 눅진 곰팡이처럼 사회에 공헌한다. 축구 경기의 양 팀이 입법부와 행정부라면, 사법부는 심판 역할을 한다. 국민이 양 팀을 선출했지만, 심판은 그중 한 팀 주장이 임명했다. 심판이 더욱 공정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첫째, 대법관의 구성을 다양화해야 한다. 판사를 포함한 다양한 법조 관련 직군에서 선발할 수 있다. 둘째, 대법관 정수를 크게 확대하여 객관성을 담보해야 한다. 특권의식을 갖는 희소성을 제거해야 한다. 셋째, 대법관을 직선제로 선출해야 한다. 삼권 분립에 민의를 온전하게 반영하는 길이다.

대법관들이 행여 우월 의식을 가진 것은 아닐까. 자기는 신분이 다른 '특권 사회'의 귀족이라고. 이번 삼심 판결 결과와 절차에 많은 국민이 실망을 넘어 분노했다. 국민은 그들이 차기 국가 지도자 선택 과정에 개입하려는 의도를 읽었다. 그들은 이제 결정해야 한다. 심판관의 품격을 갖추든지, 시류를 탄 법조 종사자에 머물든지, 그 선택은 오롯이 자기 몫으로 남게 되었다.

축구 경기는 VAR 시스템을 도입하고 나서, 논란이 거의 사라졌다. 기계가 더 정확하다는 점을 모두가 인정했기 때문이다. 대법관이 자기에게 주어진 공적인 무게를 바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자리에 설 이유가 없다. 대법원 청사 입구에 써놓은 '자유 평등 정의'를 다시 읽어봐야 할 것이다. 국민은 명령하는 주권자다. 감히 주인에게 모멸감을 준 감독관과 조직이 불명예스러운 치리(治理)의 가능성을 스스로 높여가고 있다.
▲ 대법원 자유 평등 정의
ⓒ 대한민국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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