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성 사망 40년, 보안사가 조작한 '자살'의 진실 [민병래의 사수만보]
사수만보는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의 줄임말입니다. <편집자말>
[글쓴이: 민병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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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균관대교정에 있는 민주열사상과 이윤성추모비 오른 쪽이 이윤성 추모비다 |
| ⓒ 민병래 |
의문사위는 가족의 요청을 받아들여 2001년 1월 13일 이윤성의 의문사에 대한 조사개시를 결정한다. 의문사위는 정성희·김두황·한영현 등 강제징집 관련 의문사가 많지만 이윤성은 누구보다 타살의 의혹이 크다고 판단했다. 우선 보안부대로 끌려가 조사 중에 숨졌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또 그가 머물렀던 심사실은 외부에서만 문을 열 수 있고 24시간 감시병이 서 있기에 자기 마음대로 문을 열고 나갈 수가 없다. 그런데 심사실을 빠져나와 테니스 코트에서 목을 맨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윤성이 혁대와 군화 끈을 사용했다는 자살의 방식 또한 의문이다. 보안부대로 끌려가면 통상 명찰과 계급장이 없는 군복으로 갈아입는다. 물론 바지는 혁대 없이 단추로만 채운다. 군화도 벗고 고무신을 신는다. 혁대나 군화 끈으로 목을 맬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교도소에서도 마찬가지다. 자해를 막기 위해 어떠한 끈도 지니고 있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혁대와 군화 끈을 이용했다면 도대체 이를 어떻게 구했는지가 밝혀져야 했다.
사고 당일 매형 안용태가 이를 집중 추궁했으나 담당 수사관은 얼버무리기에 급급했다고 한다. 결국 헌병대의 수사에서 이 부분은 규명되지 않았다. 당시 검안의는 이윤성의 사체를 테니스장이 아닌 '어떤 실내'에서 접하고 사망 판정을 내렸다고 한다. 이는 시신을 (군의 발표를 인정하다면) 테니스장에서 옮겼다는 얘기이니 현장 보존은 아예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진상이 하나씩 드러나다
오랫동안 묻혀 있던 진상은 의문사위의 조사가 진행되면서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한다. 우선 사망 장소를 바꾸려 하고 사망 시각을 조작한 점이 밝혀졌다. 205보안부대장 장기환은 사고 당일 이윤성의 사망 장소를 '27연대 예하 소속대로 하자'고 헌병대장 유용채 중령에게 제안하는데 유용채는 이를 거절한다. 이윤성이 죽은 지 7개월 뒤인 1983년 12월, 5사단에서 서울대 79학번 한희철의 사망 사건이 발생한다. 유용채는 이때도 수사를 맡았는데 조사계 손영적이 한희철이 고문당한 정황을 보고하자 "보안사의 위상을 고려해 너무 깊숙이 개입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린다. 보안사에 엎드린 것인데, 이윤성의 사망 장소를 바꾸자는 205보안부대장의 이때 제안은 거부했다. 사망 장소를 바꾸면 조서가 소설처럼 꾸며져야 하는 부담 때문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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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윤성의 초등학교 때 졸업사진 누나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
| ⓒ 이인효제공 |
그런데 당시 205보안부대의 수사 관행을 엿볼 수 있는 증언이 하나 있다. 5사단 소속 박동열은 1982년 1월 근무 중에 북한 삐라를 주웠고 사회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것이기에 자신의 형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를 넣는다. 박동열은 (편지 검열에 걸려) 205부대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되었다. 이때 대공계장에게 4일 이상 구타를 당하여 결국 보안부대가 원하는 내용대로 써줬다고 한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정성희가 사망할 때 담당 수사관이 김흥대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정성희가 죽었는데도 문책을 받지 않았고 이윤성 사망 사건 때도 겨우 견책만 받았을 뿐이다. 이런 정황에 비추어 보면 이윤성은 205보안부대에서 심한 고초를 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가장 중요한 조작은 연행 경위를 거짓으로 꾸민 점이다. 27연대 보안반 대대주재관 유재명은 "(보안)사령부 간부들이 이윤성 사망 직후 나를 소환해 205보안부대로 갔는데, 어떤 보안사 간부가 사무실 통로에서 '이번 사건은 불온 삐라와 책자를 소지해서 월북 혐의로 조사하다가 일어난 걸로 알아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이는 장기환의 고백으로도 입증된다. 그는 이윤성이 보안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순화교육 목적으로 205보안부대에 온 것이며 "월북 혐의로 205보안부대에서 조사를 받다가 사망했다는 것은 조작된 것이다"라고 실토했다. 주무수사관이던 박진숙도 삐라 때문에 조사했다는 것은 허위라고 인정했다. 결국 5사단 헌병대의 수사는 부실했고 조작투성이였던 것이다.
한편 이윤성의 과동기인 81학번 최영미(고전연구회회장)는 1983년 4월 이윤성의 연락을 받고 학교 앞에서 만났는데 같이 활동한 적이 없는데도 "너희 써클은 잘 되냐? 별일 없냐?"등을 묻더니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며 이윤성이 자리를 떠 의아스러웠다는 증언을 했다. 또 철학과 81학번 이옥희는 "성대 정문 근처, '시골집'이라는 술집 앞에서 군복 차림의 이윤성이 하얀색 계통의 셔츠를 입은 남자와 함께 서 있었던 것 같다"라는 진술을 했다.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고 휴가를 나와 정보 수집을 한 것으로 보이는 정황들이다.
보안사에 대한 직접 조사, 좌절되다
의문사위는 이런 의미 있는 증언을 확보하면서 기무사에 대한 직접 조사를 시도했다. 의문사위는 우선 이윤성의 죽음을 포함해 다른 강제징집 피해자에 관한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기무사는 2001년 12월 "녹화사업 관련 자료는 그 분량이 라면 박스 5∼6개였다, 사령관의 지시로 1990년 소각했다"라고 회신하고 문서규정집과 같은 기본 자료조차 기밀사항이라며 협조를 거부했다. 이는 당시 녹화사업을 주관한 보안사령부의 책임자 서의남 중령이 한 증언과 배치된다. 그는 의문사위에서 "녹화사업 심사자 1천여 명, 전체 관련자 5천여 명의 존안 자료를 생산했고, 이는 철제 캐비넷 17개 분량이었으며, 이를 인수인계 했다"라고 증언했다. 또한 "인수인계 목록은 영구보존문서로 분류되어 기무사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며 관련 자료목록이 보관되어 있음을 확인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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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고 졸업식 사진 1981년 2월 둘째 매형 안용태와 함께 |
| ⓒ 이인효제공 |
2005년에 출범한 국방부 과거사위도 의문사위의 결론을 재확인했다. 과거사위는 조사에 나서 <특변자 사고 관계철>(83.1.~84.12)을 확보했다. 이 철에는 '동향조사서'와 '피의자 자살 보고'와 같은 다양한 자료가 담겨 있었다. 국방부 과거사위는 이들을 분석해 이윤성이 '녹화사업대상자'였으며 보안부대로부터 주기적으로 동향 파악을 당했음을 확인했다.
한편 이윤성이 연행된 날 만들어진 '전언통신문' '텔렉스 전문', '긴급보고' 등 6건의 문서도 분석했다. 이중 '긴급보고' 외에는 접수 및 지시에 따른 내부 결재가 없고 성명⋅문장부호⋅부연설명 등이 가필(加筆)되어 있으며 '송⋅수신 시간' 및 '결재일'이 수정된 흔적을 발견했다. 국방부 과거사위는 이 문서들이 '사망경위를 은폐' 하기 위해 사후에 작성된 것으로 판단했다. 두 개의 국가기관 의문사위와 국방부 과거사위가 이윤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할지라도 보안사에 의해 죽음에 내몰렸다고 인정하게 된 것이다.
가족의 싸움, 길고긴 투쟁, 2021년의 법정 승리
이윤성의 의문사는 2021년 민사법정에서 다시 한번 다뤄졌다. 안타깝게도 이명률은 2001년 4월에 숨져 이 법정에 서지 못했고 의문사위의 조사 결과조차 접하지 못했다. 함흥 출신인 그는 홀로 월남하여 한국전쟁 당시 소년병으로 국군에 자원 입대했다. 전투 중에 무릎에 파편이 박히는 부상을 입어 상이군인으로 제대했고 평생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런데 딸 다섯을 낳고 얻은 아들을 '월북 기도'라는 거짓 혐의에 의해 잃었으니 그는 누구보다 분단의 아픔을 안고 평생을 산 사람이다. 이명률은 길을 가다가도 대학생을 보면 눈물을 흘리고 창가에 석양이 비껴들어도 눈물을 떨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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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년에 열린 이윤성 42주기 추모제 모습 해마다 사학과학생회와 성균관대민주동문회는 추모제를 연다. |
| ⓒ 민병래 |
이런 거듭된 판결에도 이윤성은 진정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이윤성을 죽음으로 몰고 간 보안사의 책임자에 대해 형사적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문과 프락치 강요 같은 반인도적 범죄는 공소시효 없이 끝까지 책임을 묻는 법률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보안사가 이윤성에게 가한 고문과 고문행위의 당사자는 역사의 심판을 받고 그 이름이 기록되어야 한다. 국가는 또한 반인도적 범죄를 당한 피해자에게 국가가 손해배상을 했을 때는 책임을 져야 하는 해당 공무원에게 반드시 구상권을 청구해야 한다.
이근안의 사례는 중요한 본보기다. 전북 김제에서 농사를 짓던 최을호 가족은 1982년 북으로 납치되었다 돌아왔다. 그런데 이근안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40여 일 동안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내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을 만들었다. 그 결과 최을호는 사형을 언도 받아 1985년 집행당했고 최을호의 조카 최낙교는 검찰조사 중 구치소에서 숨졌다. 또 다른 조카 최낙전은 9년을 복역하고 교도소에서 나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최씨의 유족은 오랜 세월이 지나 재심을 신청했고 2017년 6월 무죄가 확정되어 국가로부터 116억 원의 손해배상금을 받았다. 국가는 이 배상금 중 33억 6천만 원을 고문책임자 이근안에게 물어내라고 소송을 걸었고 2024년 7월 서울중앙지법에서 확정 판결이 내려졌다. 이근안은 형사처벌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됐다.
이윤성은 어떤 의문사보다도 타살의 정황이 뚜렷하다. 북한강에 흩뿌려졌던 이윤성의 죽음에 대한 진정한 씻김굿은 이윤성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을 형사법정에 세우는 일이다. 또한 그들에게 이윤성과 그 가족이 입은 피해를 보상하게 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1) 권정달에 관한 청원내용은 2024년 1월 13일에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1381회 이윤성편에서 매형 박정관이 증언한 내용이다.
2) 이윤성 사망 사건 이후 보안사령부에서 205부대에 강도 높은 감찰을 했다. 이 감찰관련 문서는 자·타살과 사망 경위를 확인하는 데 중요한 문서이나 방첩사는 관련 보고서가 없다고 주장한다.
3) 이윤성 사건을 조사한 진화위 이지원 조사관은 당시 205보안부대에서 녹화사업을 당한 5명을 참고인으로 불렀는데, 허리 띠 없는 군복으로 갈아입었는지, 군화를 벗었는지에 대해 진술이 엇갈렸다고 한다. 이지원 조사관은 예하 보안부대에서 지침을 제대로 숙지하지 않은 탓에 제각각이 아니었나 판단한다.
4) 박동열을 수사한 대공계장과 이윤성을 수사한 대공계장은 동일인물이다.
5) 박진숙은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연행 경위의 진실을 증언했다. 한편 매형 안용태는 사고 당일 조서에 '월북 혐의'가 담겨있어 강력히 항의했더니 담당 수사관이 고쳐서 다시 작성하겠다고 했고, 잠시 후 수정한 조서를 가져왔다고 한다
6) <특변자 사고 관계철>에는 이윤성에 대한 동향조사서를 비롯해 조사중간보고, 내사결과 보고,피의자 자살 보고, 불온유인물 소지자 조사 중 자살사건 조사 결과 보고 등 다수의 자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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