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경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작가가 던지는 메세지

노태헌 2025. 5. 2.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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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관객이 먼저 '감각하는 자' 돼야... 피에르 위그전 <리미널>, 7월 6일까지

[노태헌 기자]

소설 속 문장들 속에서 유독 오래 가슴속 깊이 파고들어 삶으로 그 문장을 옮기고 싶은 문장들이 있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허클베리 핀이 노예 짐을 생각하며 말하는 문장도 그런 것 중 하나인데 다음과 같다.

"좋아, 그렇다면 지옥에는 내가 간다." ("All right, then, I'll go to hell.")

소설 속에서 허클베리 핀은 자신이 정의라 믿는 올바른 세계를 담고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 죄인이 될 것을 감수하고 노예인 짐을 도와주기로 결심한다. 도망친 짐을 지켜내기 위해 스스로 지옥행을 택하고, 정의와 사회가 충돌하는 지점 - 그 경계에 서서 소년은 자신이 온몸으로 느낀 진실을 행동으로 옮긴다.

리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피에르 위그 : 리미널 전은 소년이 담담히 내뱉은 "좋아, 그렇다면 지옥에는 내가 간다"라는 말, 쉽지 않은 현실과 달콤한 허구라는 경계 위에서 무엇을 담고 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전시였다.

Liminal, 리미널은 경계를 말한다. 경계는 실제와 허구, 현실과 비현실, 욕망과 간절히 원함의 세계를 해체하기 전 사이의 공간이다. 어쩌면 새로운 세계로 가기 전, 발 돋음 디딛기 전,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기 전이다. 피에르 위그의 세계로 들어가면 빛이 깜박이고, AI가 알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고, 난해한 영상과 조형물이 세계의 경계에 들어왔음을 느끼게 된다.

장 보드리야르, 실제 세계와 이미지의 세계를 연구한 철학자가 있다. 그의 용어 중에 시뮬라르크(Simullacrum)가 있는데 이는 "모방의 모방"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그림은 풍경의 시뮬라르크이고, 영화는 현실의 시큘라르크다.

보드리야르는 "우리는 점점 더 진짜 보다 '진짜 같은 가짜"에 속으며 살고 있다고 경고한다. 반대편에는 시뮬라시옹(Simulation), "현실을 가장한 비현실"이 있다. 단순한 모방이 아닌, 현실을 대체해버린 가짜.

기호와 이미지로 대변되는 현대사회는 시뮬라시옹 사회다. 현실, 생명, 본질 같은 것은 아래에 가라앉아 있고 그 위로 기호가 진짜처럼 떠다니고 있는 것이다. 마치 'SNS 속의 나', '브랜드와 명품의 이미지로 소비되는 나'처럼 욕망하고 소비되는 현대적 시뮬라시옹 사회인 것이다. 내게 피에르 위그 전시의 첫인상은 시뮬라르크와 시뮬라시옹의 경계였다.

피에르 위그는 생명체, AI, 기계, 그리고 사람의 경계를 흐리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인지 시뮬레이션인지 무엇인지 덤덤히 툭 던져 놓는다.

이미지와 신호의 시뮬라시옹 안에 갇혀 있는 우리들을 자각하게 또는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전시실 안에서 마주친 대부분의 것들에서 나는 인간성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작품)들은 분명히 움직이고 있고, 부유하고 있고,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 기계-조명-연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주변부를 계속 돌아보았다. 무엇이든 하나를 끄집어 냈으면 좋으련만.
ⓒ 노태헌
처음에는 난해했고 우리의 언어로는 그의 작품들을 해석하고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문득 이건 '무언가 말하는 듯' 하지만, 언어가 아닌 신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차가운 것들, 생명과 영혼이 없어 보이는 것들.
살아온 경험으로는 해석이 되지 않는, 어떤 영상들은 심지어 불편하기까지 한. 그것들은 과연 무엇을 지칭하고 있는 것일까.
▲ 기계와 사람의 뼈 기계는 사람의 뼈를 탐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 노태헌
실제로 전시관 안의 조형 작품물마저 제목이 붙어 있지 않았고, 작품을 설명하는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친절하게 "이 작품은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에요"라고 하는 전시가 아니다.

피에르 위그는 '전시'라는 형식을 해체하고 기계, 조명, 진동, 침묵 같은 것에 대한 감각을 관객들에게 넌지시 보여준다. 보통의 전시들은 '보는 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이 전시는 '감각하는 자'를 깨워야 한다. 관객의 몫이다.

피에르 위그의 <리미널>은 고정된 형식을 깨고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를 탐구해 온 작가의 아시아 최초 개인전으로, 신작 <리미널>(2024–현재), <카마타>(2024–현재), <이디엄>(2024–현재)과 대표작 <휴먼 마스크>(2014), <오프스프링>(2018), 수족관 시리즈 그리고 인간과 기계의 협업으로 생성되는 (2016–2025), <암세포 변환기>(2016) 등 총 12점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 수족관안에 있는 돌과 마스크 어딘가 모를 물속 깊은 곳, 그곳에 얼굴이 잠겨져있다. 무의식속에 기억하고 있는 소중한 사람처럼.
ⓒ 노태헌
작가의 '리미널'은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를 의미한다. 피에르 위그에게 전시와 작품은 완성된 결과물이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는, 살아 있는 환경이며,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생명체들이 진화하는 세계이기도 하지만 예측 불가능한 '불확실성의 세계'다.
전시와 동명의 작품 <리미널>에는 얼굴 없는 인간 형상이 등장하는데, 이 여성형 형상은 마치 어떤 미지의 행성에서 그 행성의 표면과 경계를 학습하고 기억을 쌓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 얼굴없는 여인 이 여인은 낯선 혹성과 같은곳에서 배회한다. 대지를 느끼고, 움직이고, 때론 몸부린친다. 그리고..
ⓒ 노태헌
여성이 행성의 끝 절벽과 같은 경계에 얼굴 없는 모습으로 우뚝 서서 저곳 너머를 바라볼 때 마치 내가 저편 너머의 곳, 어딘가를 향하는 이국적이고 미지를 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어 그 여성은 곧 나의 의식 속으로 깊게 들어와 감각되어지기도 했고, 절벽과 같은 경계에 서있는 사람이 비단 작품이나 나만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의식의 잔상이 오래오래 남았다.

"나는 이야기의 형태가 선형성을 벗어날 때 흥미를 느낀다. 역사를 넘어선 서사 밖의 허구에 관한 것이다. 시뮬레이션은 혼돈을 지날 수 있게 해 주는 여러 가능성의 투영이다" ㅡ 피에르 위그
▲ 이미지의 낙인 경계에선 얼굴없는 형체. 경계는 무엇이란 말인가. 삶이란, 생명이란, 우주란.
ⓒ 노태헌
*전시정보
피에르 위그 <리미널(Liminal)>, 리움미술관 - 그라운드갤러리(블랙박스)
전시 기간: 2025년 2월 27일(목) ~ 7월 6일(일)
관람료: 16,000원 (현대미술 소장품전 포함 통합권: 20,000원)
운영 시간: 오전 10시 ~ 오후 6시 (입장 마감: 오후 5시) (매주 월요일 휴관)
한강진역 도보 7분,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로55길 6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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