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사랑하다 헤어집니다, 축하해 주세요
[김성호 평론가]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 한 커플이 있다. 14년 열애 끝, 헤어짐을 앞둔 남녀다. 말이 14년이지 웬만한 부부보다 더 산 둘이다.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도 남았을 사이, 세상 가까운 친구이자 연인인 두 사람이 그 관계의 끝을 고하고자 한다.
만나면 헤어지는 게 인간사 순리다. 그러나 끝 앞에 초연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 것인가. 때가 되어 보내는 부모의 죽음 앞에서도 통곡하는 게 우리 인간이다. 하물며 인생사 한창 가운데 갈라져서 각자 볼일 보자는데 웃으며 헤어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둘의 마음이 한날한시에 꼭 같이 소실되는 경우는 세상에 얼마 되지 않는다. 어느 쪽은 마음이 한 스푼쯤 더 남았고, 어쩌면 스푼이 아니라 국자, 아예 대접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이별이 어찌 담담할 수 있을까.
여기 이 커플은 14년의 열애 끝에 깔끔한 갈라짐을 준비하는데, 나름대로 철학에 기반한 일이라 한다. 저들 자신의 철학은 아니고, 현대 철학을 즐겨 읽는 여자의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해왔다는 말이라고. 연인 간에 진정으로 축하받아야 할 일은 만남이 아니라 헤어짐이라는 이야기. 헤어짐이란 둘이 더는 관계로써 행복할 수 없다는 것으로, 헤어짐이 더 나은 삶을 위한 선택이라는 얘기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해 기꺼이 오늘의 문제를 타파하는데 어떻게 축하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의 중심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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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 스틸컷 |
| ⓒ M&M 인터내셔널 |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는 주변에서 가장 이상적인 커플이란 평가를 한 몸에 받는 알레(잇사소 아라나 분)와 알렉스(비토 산즈 분)의 이야기다. 성격이면 성격, 취향이면 취향, 그야말로 모든 게 잘 맞아 천생연분이란 말이 절로 나오던 이 커플이 어째서 헤어지기로 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영화의 시작부터 둘은 헤어짐을 작정하고 있고, 어쩌다 말이 나온 김에 이별파티를 제대로 열어보기로 결정한다. 결혼식은 아니더라도 이별파티 한 번은 제대로 열자고, 주변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을 모아보자고 말이다.
영화는 알레와 알렉스가 파티에서 연주할 연주자부터 참석할 친구들까지 한 명씩 섭외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알레는 영화감독으로 신작을 준비 중에 있고, 배우인 알렉스는 다음 작품을 고르는 데 열중이지만, 무엇도 이별파티보다 큰 일이 될 수는 없다. 자칫 이별파티가 엉망이 되지 않도록 마치 결혼식처럼 세심히 준비하는 과정이 어딘지 낯섦 가운데 익숙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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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 스틸컷 |
| ⓒ M&M 인터내셔널 |
철학을 즐기는 노인의 딸과 기꺼이 예술의 도구가 되는 업을 가진 남자의 관계다.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의 분명한 재미 가운데 하나는 영화 가운데 니체며 쇼펜하우어와 같은 철학자, 잉마르 베리만과 하워드 혹스, 프랑소와 트뤼포 같은 감독, 사무엘 울만 같은 작가의 이름들이 거론된다는 점이다. 전 시대의 유명한 지성이며 예술적 감성의 화신을 꺼내어 지적인 대화를 이어가니, 이런 류의 작품을 기다렸던 관객에겐 정말이지 희소한 즐거움이다.
114분의 결코 짧지 않은 영화는 통상적인 극의 전형적 전개를 따르지 않는다. 주인공들을 가로막는 대단한 위기나 역경, 극복 같은 건 전혀 준비돼 있지 않다. 시작부터 결별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던지지만 이들은 그를 삶의 새로운 시작으로 받아들이겠다며 파티를 준비하지 않는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별에 흔히 따르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담담히 관계의 각도를 조정하는 모습이 흡사 이삼 회차 인생을 사는 이들의 삶처럼 느껴질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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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 스틸컷 |
| ⓒ M&M 인터내셔널 |
말하자면 이들이 겪는 진통은 그 세부적 모습이 얼마쯤은 다를 지라도 지구 반대편에 사는 이들에게까지 소구력이 있는 보편성을 획득한다. 이 세상을 사는 누구나 관계를 맺는다. 그 양상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저마다 삶 가운데 가장 가까운 이를 동반자로 두기를 꿈꾼다. 그와 같은 관계는 곧 삶을 대하는 자세, 철학과도 긴밀히 닿아 있는 것이어서 영화는 그저 어느 커플의 괴상한 행사를 넘어서는 의미에 마침내 다다른다. 대단한 철학은 아닐지라도 삶의 이정표가 되는 깨달음, 또 그를 향해 다가서는 사색의 장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 얼마나 매력적인가. 보는 이를 사고하도록 한다는 게 말이다.
흔히 트루에바의 영화에서 거듭 엿보이는 자세, 극적 연출보다는 카메라를 멈춰두고 사람들의 일상 속 대화를 진지하게 경청하는 태도가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에서도 두드러진다. 특별한 사건 대신 자연스레 변화하는 모습에 집중한다거나, 어느 순간 전환적인 결말로써 분위기를 환기하며 끝을 맺는 구성 또한 여전하다. 이 작품 또한 다분히 트루에바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영화의 각본을 두 주연배우 앗사소 아리나, 비토 산즈와 함께 집필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서로 다른 개성과 해석으로 저만의 캐릭터를 창조한 두 배우를 동등한 작가로 인정하며 군림하지 않고 평등한 지위에서 작품을 연출한다. 대화는 끝까지 이어진다. 그것이 본 줄기와 상당히 동떨어져 있을 때조차 카메라는 진득한 시선으로 인물들을 응시한다.
세심한 관찰력은 곧 관객 앞에 서로 다른 살아 있는 인물은 물론, 공간과 온도, 소리까지 그대로 옮겨 펼쳐낸다. 그 안에서 느리지만 분명히 변화하는 인물들의 감상이, 그들이 빚어내는 관계의 형태가 이 영화의 독자적 분위기를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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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 포스터 |
| ⓒ M&M 인터내셔널 |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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