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인으로 살아남기] <폭싹> 관식이는 아닙니다만, 사춘기 딸의 남자친구 신경 쓰이네요
'내향인으로 살아남기'는 40대 내향인 도시 남녀가 쓰는 사는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신재호 기자]
"여보. 민아가 남자친구 생겼어."
순간, 마음 안에 파고드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아무 말도 아무 움직임도 할 수 없었다. 슬픔, 고통, 분노, 증오 등등 세상의 모든 부정적 단어들이 하나로 합쳐지며 거대한 파장을 일으켰다. 여태껏 딸을 키우며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이 아니었을까. 충격을 애써 누르고 걷던 안양천 길을 멈추고 아내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눈앞에 보이는 물길도 내 맘 같은지 세차게 흐르는 듯했다.
"왜? 누군데? 언제부터야? 같은 반이야?"
"여보! 하나씩 물어봐. 흥분 좀 가라앉히고 좀."
마음을 차분히 하려 할수록 끓어 올랐다. 이러다간 아무 말도 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 입을 꽉 다물고 대신 부들거리는 몸을 붙잡고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폭풍 같은 감정이 누그러지니 아팠다. 바늘로 콕콕 찌른들 이보다 쑤실까.
이제 사귄 지 3일이 되었단다. 상대는 딸이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녀석이었다. 사건 경과는 이랬다. 올해 중학교에 올라가서 서로 다른 반이 되었음에도 계속 딸 반에 찾아와 괜히 툭 치고 지나간다든지, 이유 없이 사탕을 주고 가는 등 관심을 표현했단다.
그러면서도 고백은 하지 않고 주변만 뱅뱅 도는 모습에 딸은 냉가슴을 앓았다. 그러다 딸이 먼저 카톡을 보냈고,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나를 좋아하면 사귀자고 먼저 이야기해서 결국 알겠다는 답을 얻었다고 하는데. 참나. 얼마나 숫기가 없으면 딸이 먼저 고백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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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의 결혼식 '폭삭속았수다' 중 금명의 결혼식에서 관식의 말 |
ⓒ 넷플릭스 |
"아빠한테 냅다 뛰어와. 알지? 수틀리면 빠꾸."
금명은 그 자리에서 오열하고 만다. 관식이 아빠라는 말을 꺼내는 때부터 이미 난 닭 똥같은 눈물이 주체 없이 흘렀다. "꺼이꺼이" 소리까지 내면서. 내 눈엔 금명이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내 딸이 결혼하는 장면으로 겹쳐 보였다. 아빠로서 딸을 시집보내는 안타까운 마음과 더불어 내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시키는 '아빠어'였기 때문이다.
사실 관식은 살갑고 표현 잘 하는 외향적인 인물은 아니다. 그저 조용히 딸 뒤에서 커다란 고목처럼 든든히 지켜주는 내향인 아빠이다. 충섭(김선호 역)이 금명과 결혼하겠다고 제주도에 인사를 왔을 때도 겉으론 투덜거렸지만, 관식 자신을 보는 것처럼 금명을 보이지 않게 챙기는 모습에서 마음을 열었다. 그때 알았던 것 같다. 번지르르한 겉모습이 아닌 속 깊고 내 딸을 아껴 줄 우직한 충섭의 모습을.
딸이 지나가며 툭툭 하는 말을 종합해보면 남자친구는 수줍고 부끄럼이 많은 내향인인 듯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는. 딸이 좋아하는 간식을 기억했다가 쉬는 시간에 찾아와 쓱 주고 간다든지, 표현이 많지 않지만 깊게 생각하고 답을 준다고 했다. 딸은 답답해 죽겠다고 하지만 눈에서 보여지는 하트는 지울 수 없었다.
얼마 전 딸과 날이 좋아 인근 공원으로 산책했다. 팔짱을 끼며 다정하게 걷던 중 이때다 싶어 연애사를 물었다.
"요즘 그 친구는 잘 만나고 있어?"
"응."
"좋아?"
"모르겠어. 그냥 학교에서 잠깐 보고, 주로 카톡으로 대화만 하니깐."
"잘 해줘?"
"그냥. 근데 표현을 잘 안 하니 답답하긴 해. 아빠 같다랄까."
걱정했던 것보단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어 다행이었고, 아직 연애라는 것에 대해 실감도 잘 못 느끼는 듯했다. 하긴 딸도, 그 아이도 처음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을 테니 서툰 것이 당연했다. 이때다 싶어,
"그럼, 아빠랑 그 친구랑 물에 빠지면 누구 먼저 구할 거야?"
"유치하게 이럴래. 당연히 아빠지! 어이구."
세상을 다 얻어도 이보다 좋을까. 흥이 나서 함께 셀카 찍자며 카메라를 들이밀고 신나게 사진을 찍었다. 내향인 아빠이기에 표현은 부족하지만, 마음만은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할 만큼 깊고, 넓다. 생각보다 빨리 시작되었지만 앞으로의 숱한 연애 속에 얼마나 내 속이 뒤집고 태울까. 그래도 이 말은 꼭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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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의 결혼식 '폭삭속았수다' 중 금명의 결혼식에서 관식의 말 |
ⓒ 넷플릭스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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