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 할머니' 도전하다 갈비뼈 부러졌지만… 한 수 배웠다"
[장혜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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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혜영 |
| ⓒ NEW, 수필름 |
극 중 레전드로 불렸지만 노쇠한 60대 킬러 조각을 연기한 배우 이혜영을 28일 삼청동의 카페에서 만났다.
'조각'은 이혜영이 아니라면 성사되지 않는 캐릭터다. 스스로도 '이게 될까?'라며 긴가민가 했던 부분을 민규동 감독과 만들어간 자부심이 커 보였다. 다양한 역할을 했다고 여겼으나 고정된 이미지가 있었는데 <파과>에서는 그게 힘을 받았다며 의외성을 매력으로 꼽았다. 이어 어떤 감독을 만나냐에 따라, 또 어떤 그릇에 담겨 변할지 본인도 기대된다고 말했다. 인생은 육십부터라는 말처럼, 이혜영을 보며 한 분야에 오래 정진한 고수의 향기가 느껴졌다.
다음은 이혜영과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내용.
"나이 들어도 늘 쓸모를 증명하게 돼"
- 우리나라를 떠나 해외에서도 쉽지 않을 캐릭터가 등장한다. <파과>와 만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젊은 배우에게도 기회가 없다는데 나에게 이런 역이 들어오다니 놀랐다. 오래 연기 해왔다고 늘 이런 작품을 만나는 건 아니다. <파과>는 특별하다. 사실 소설이 있는지도 몰랐다. 영화를 결정하면서 마니아의 존재도 인지하게 됐다. 무엇보다 킬러 할머니를 떠올리며 왜 나를 생각했을지 궁금했다. 조각이란 이름도 그렇고 능력자 할머니라는 수수께끼 같은 힘이 있었다. 그 힘의 원천이 관심 갔고 부러웠다. 이후 받은 시나리오는 소설과 좀 달랐다. 흔한 액션 영화나 말투도 아니라서 머릿속에서 그 언어가 상상되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편하게 배우를 할지, 도전할지 고민하다가 도전을 선택했다."
- 전설적인 킬러라는 설정인데, 고심하게 만드는 건 '액션' 아니었을까. <피도 눈물도 없이> 이후 본격적인 액션을 보여주었다는 생각도 든다. 액션 강도도 높아 선뜻 선택하긴 어려웠을 텐데.
"액션 첫날부터 부상을 입었다. 이태원 클럽에서 몸 싸움하는 신이다. 조각이 싱크대에 부딪히는 장면에서 갈비뼈가 부러졌다. 스케줄이 다 정해져 있어서 일단 강행했는데 한 개가 더 부러졌다. 휴식 없이 촬영을 이어가다가 총 3개가 부러졌다. 촬영 끝날 때까지 회복되지 않았다. 부상 입은 상태로 구르는 걸 찍고 몸 바쳐서 연기했다. 이제 나이 들어서 다쳐도 회복도 안 되고 더디더라. 이러다가 배우도 못하는 건 아닐지 걱정하면서 목숨 걸고 하는 거란 생각으로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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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파과> 스틸컷 |
| ⓒ (주)NEW |
"매일 일지를 쓰는데 다시 읽어보면 불만투성이다. 감독님은 저를 꽁꽁 묶어두었다. '너무 귀엽다', '너무 걸어갔다', '너무 친절하다', '감정을 빼고 더 쿨해야 한다'고 지적 사항만 늘어났다. 시나리오 수정도 잦았다. 30분마다 수정본을 보냈고 심지어 잘 때도 보내는데, 이걸 보려면 돋보기도 써야 하고 피곤하다 보니 안 보게 된다. 다음 날 다들 새 수정본으로 합을 짜서 왔는데 저만 다른 버전 시나리오가 입력된 상태로 그냥 가게 되는 거다. 대역 배우까지 다 세팅돼 있는 상황인데, 혼자만 못한다고 하면 어떡하냐며 감독님께 한 소리 들었다.
그때 서로 이해하게 됐다. 감독님은 제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파악했다. 고통을 체험해야 연기가 나오는 편이다. 정해진 프레임 안에 갑자기 바뀐 시나리오라면 실력도 발휘되지 않고 인형처럼 굴게 된다. 그런 걸 서로 원하지 않으니까 감독님도 그 안에서 찾아가고 저도 맞춰 나가겠다고 합의를 봤다.
엄살과 불신이 깊어졌지만 속으로는 그 반대를 기대하는 양가적 감정까지 들었다. 절제하라고만 디렉팅 주는데 어느 배우가 살아남을까 싶었다. 그러다 보니 캐릭터를 가두는 제약 속에서 창의성이 필요했다. 감독님의 머릿속에서 이미 놔주고 당겨야 할 때를 그려내고 있었고, 결국 배우 조련을 잘 한 거다(웃음). 함몰당하는 배우가 아닌 싸우겠다는 투지력이 생겨났다.
그때는 너무 힘들었지만 베를린에서 완성본을 보자 미안했다. '감독님은 다 계획이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웃음). 제 스타일대로만 하고 통제가 안 되면 젊은 감독 누가 돼도 어려워할 수밖에 없는 거다. 여러 가지로 제가 한 수 배웠다."
- 오랫동안 웬만한 영화와 드라마 현장을 다녔다. 지금까지 디렉팅을 지시했던 감독이 없었던 건가.
"임권택 감독님도 저한테 안 그러셨다(웃음). 제 연기는 대충 하는 무지에서 나온다. 본능에 따르는 거다. 지금까지는 상상도 안 하고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하는 게 통했다. 그때 만들어진 희열을 즐겼다. 제 의견을 다들 존중해 줘서 잘 몰랐다. 지금 영화 현장과는 너무 다르지만 그때는 넉넉하고 여유로웠던 시절이지 않나. 상상해서 준비해 가도 막상 그것대로 안 되는 게 현장이었다. 제가 이쪽을 봐야 하는데 저쪽을 보겠다고 했기 때문에 카메라 워킹이 힘들어 벽을 뜯은 경우도 있었는 데 뭘...(웃음)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가 피곤했던 거였다. 남 신경 안 쓰고 지낸 사실을 이제야 느겼다. '상대 배우, 감독, 스태프 모두가 힘들었겠다' 하고 깨달았다."
- 내내 고생하면서 촬영한 게 느껴진다. 특별히 애착 가는 장면이 있나.
"조각의 외로움, 고독, 흔들림 같은 감정이 편집 때 다 사라졌다. 편집된 부분을 다 넣어서 3시간짜리 감독판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아쉬움이 크지, 제가 멋있게 나왔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 항상 부족했다고 생각했는데 주변의 긍정적 반응이나 노년이 무언가를 보여줬다는 말에 위로받게 되더라."
- 투우와 폐건물에서 벌이는 마지막 결투 장면 촬영 후 털썩 주저앉았다고 했다. 처절함과 애잔함 등 복합적인 감정이 뒤섞여 있어 인상적이었다.
"<파과>를 관통하는 단어는 '쓸모'다. 쓸모라는 단어보다 더 강하게 다가오는 건 '쓸모가 없다'였다. <파과>를 해냈다는 게 배우의 쓸모를 증명하는 일 같았다. 쓸모없는 인간이 쓰임새를 얻어 다시 살아간다. 조각은 류로 인해 쓰임새를 얻어 살아갈 수 있었다. 최선을 다해 무사히 끝내야 한다며 달려온 거다. 막상 마지막 장면 촬영을 마치니, 어디로 가야 하지 싶을 정도로 앞이 깜깜했다. 왜 끝나야 하는 건지, 보상받아야 하는 건 아닌지, 매달리는 감정까지 들 정도였다."
- 조각과 투우는 애증을 넘어선 성적 긴장감마저 든다. 유사 모자 관계, 존경과 질투의 대상, 에로틱한 분위기로 비칠 정도다.
"상대 역 때문에 제가 '섹스어필'이란 말까지 듣게 된 건 순전히 김성철 배우의 매력이다. 어린 상대가 훅 들어오는데 압도당하면서도, 때릴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는 복잡한 감정이 되살아난다. 저돌적이면서도 청순한 에너지가 조각과 투우의 관계를 만들었다. 감독님은 다 계산돼 있었겠지만 투우만의 매력을 보여주는 건 본인이고 조각과의 관계도 김성철이 만들어 냈다고 생각한다. 투우는 조각에게 과거의 실수이자 처리하지 못한 오점이다. 조각은 하나하나 발견해 나가지만 투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감정을 유지해야 해서 힘들었을 거다."
- 류(김무열)의 죽음 이후 곁을 내어 주고 지켜야 할 생명체를 다시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노년에는 강 선생(연우진)과 무용(강아지)으로 변화된 감정이 커진다.
"조각은 강 선생이 류의 환생이라고 생각한다. 류에 대한 감정은 남자, 스승, 아버지, 보호자 등 손톱의 겉싸개 같은 존재다. 과거 손톱(신시아)이던 시절, 쓸모를 류로부터 배웠던 거다. 류가 죽자 따라 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은 것도 그런 이유다.
그러다가 최근 강 선생이 류를 연상케 했다. 강 선생과 그의 딸(해니)을 지키기 위해 죽을 각오를 하게 된다. 그 마음을 담아 마지막에 절 같은 90도 인사를 하면서 충분히 전달하는 거다. 무용을 연기한 강아지는 영특했는데 알다시피 동물과 촬영이 어려워 오래는 못 했다. 무용은 조각의 인간성을 표현하는 도구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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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파과> 스틸컷 |
| ⓒ (주)NEW |
"한창 연습 중이다. 초연 때와 같은 연출 감독과 재회했고 국립극단의 다시 보고 싶은 연극 순위에 들어 기쁘다. 예전에 원로 배우 김의경 선생의 칭찬에 고무돼 환상에 빠졌었다. 그해 상도 2개나 받았는데 사실 회상하면 부끄럽기만 하다. '헤다'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유니크한 캐릭터라 착각했던 거다. 지금은 그때의 유니크함이 사라져서 못한다고 거절했더니 '자신 없냐'는 답이 돌아왔다. 오히려 도전 의식이 생겨 수락하게 됐다. 지금에서야 그 깊이감을 이해할 나이가 됐다. 이영애씨 버전도 궁금하고 기대 중이다."
- 연기의 원동력, 힘의 원천이 무엇인가. 그리고 앞으로 도전하고 싶은 게 뭔지 궁금하다.
"무지함?(웃음) 알기도 귀찮고 아는 것도 없다. 저의 세계에만 갇혀 있다. 남들 다 아는데 나만 몰라서 상상하고 기대하다 나중에 실망하고 혼자 욕한다(웃음). 연기 교육을 정식으로 받는 사람도 아니었고, 어릴 때부터 통제당하는 삶을 살아보지 않았던 사람에다가 배우가 신이라고 생각하며 살아던 사람이다. 해보고 싶은 역할보다는 <파과> 같은 도전을 해볼 생각이다. 천성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새롭게 만나는 감독의 그릇에 따라 변신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 세월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배우다. 대중에게 오랫동안 사랑받는 매력이 무엇이라고 보나.
"한 행사에서 보톡스를 안 맞아서 민 감독님이 절 선택한 것 같다고 말했는데 아직 답을 안 줘서 그건 모르겠다. 다만 늙으면 보톡스를 맞든 안 맞는 흉한 건 사실이다(웃음). 아무튼 저만의 매력이라면 나이 들어도 달라지지 않는 목소리가 아닐까. <피도 눈물도 없이> 때 택시 운전사 역할을 맡았는데 누가 사모님 목소리라며 지적했었다. 조각 목소리도 사모님 분위기가 나오면 안 되나 걱정해서 다양한 목소리를 흉내 내봤는데 그게 연기하면 더 웃길 것 같아 관뒀다.
감독님도 배우가 변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던 거 같다. 오히려 선입견을 품을 만한 나이 든 여성 킬러 레퍼런스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민규동 감독의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를 좋아하는데 필모그래피 중 의외라 놀랐다. 댄스 실력도 있고 리듬감도 좋더라. 저도 뮤지컬 배우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뮤지컬 영화로 또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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