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만원으로 시작한 출판사… 애순이 말처럼 “나 너무 좋아”
인문교양과 문화예술서를 주로 만드는 1인 출판사 ‘혜화1117’의 이름은 서울 종로구의 오래된 한옥의 주소 ‘혜화로11가길 17’에서 따왔다. 책을 만드는 작업장이자 삶의 공간인 한옥이 이현화 대표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 1936년에 지은 후 한 번도 고치지 않아 허물어져 가던 한옥을 만난 것은 2017년이었다. 이 대표는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고 했다. 당시 20년 넘게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던 그는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빠져 고민하던 때였다. ‘동네 책방’을 해보자는 마음에 주말이면 틈틈이 전국을 돌며 적당한 장소를 찾고 있었다. 운명처럼 다가온 그 집은 이 대표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했다. 덜컥 계약하고 집수리를 해놓고 보니 책방에는 맞는 곳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는 여기저기 끌어모은 1000만원을 갖고 혼자서 출판사를 시작했다. 1000만원이 소진되면 다시 취직할 각오였다. 미래를 알 수 없었다. 혼자서도 단단한 출판사를 키워낸 이 대표는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주인공 애순이의 대사 “좋아 나 너무 좋아”를 달고 살고 있다고 한다. 최근 그 집에서 이 대표를 만나 그만의 ‘행복의 기원과 이유’를 들었다. 행복한 사람이 만드는 책이라야 더더욱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이 대표에게 책은 “어떤 의미를 따로 부여할 필요가 없는 대상”이다. 그는 “일상과 분리하는 게 불가능한, 그냥 피부 같기도 하고 살 같기도 한, 그냥 곁에 늘 존재하는 그 무엇”이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부터 이 대표는 늘 책과 함께였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모서리’와 ‘성가대’, 두 개의 단어가 떠오른다고 했다. 모서리는 책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먼저 성가대부터 잠시 설명하자면,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이 대표는 늘 교회에서 생활했고, 초등학교 때부터 성가대 가운을 입었다. 이 대표는 “그 덕분에 모든 노래를 찬송가 톤으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책으로 다시 돌아오면, 이 대표는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항상 방 한쪽 귀퉁이 모서리에 등을 대고 책을 보고 있었다. 그는 “책상이 없던 것도 아닌데 벽과 벽이 마주하는 그 모서리에 등을 대고 이불을 당겨 덮고 책을 읽었다”면서 “방 중앙에 형광등이 켜져 있으니까 모서리는 침침한데, 어쩐지 그 조도가 좋았던 같다”고 말했다. 책장에 꽂힌 수많은 전집류 책들을 ‘도장깨기’하듯, 이번 달엔 여기서 저기까지 읽겠다고 다짐하고 실천했다. 중학교 때는 “잘 모르면서” 막연히 한국 문학을 다 읽어버리겠다고 마음먹었다. 채만식, 김말봉, 염상섭 등의 작품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이 대표는 “나중에 그 작가들의 책을 다시 읽으면서 도대체 어린 내가 뭘 안다고 이런 걸 읽었을까라는 생각에 혼자 웃기도 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도장깨기의 대상은 세계문학전집이었다. 집에 있던 책들도 모자라 학교도서관에서 책들을 빌려 읽느라고 늘 바빴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속 문장을 노트에 써서 외우기도 하고, 좋아하는 책의 문장들은 말린 꽃잎이나 나뭇잎이랑 코팅해서 지니고 다니기도 했다.
어른이 되면 작가가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게 꿈이야, 그랬다기보다 그냥 작가가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면서 “막연히 글을 쓰는 게 좋았다”고 했다. 하지만 글로 먹고사는 작가가 되지는 못했다. 안타깝지만, “글 옆에서 살 수 있는 길을 찾자”는 생각에서 자연스럽게 ‘책 만드는 일’로 진로를 정했다. 그렇게 1994년 출판계에 입문한 이 대표는 한길사, 돌베개 등에서 경력을 쌓았다. 특별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로 문화예술 분야의 책을 만들었다. 그림과 자료 등 다양한 요소가 많아 편집자가 개입할 여지가 많은 책들이다. 지금도 이런 책을 만들길 좋아한다. 혜화1117에서 나온 30여종의 책 가운데 한 권만 번역서고 나머지는 전부 국내서다. 그는 “이미 완성된 번역서보다는 기획 단계부터 저자와 함께 의논해서 만들 수 있는 책들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유일한 번역서는 일본에서 나온 ‘이중섭, 그 사람’이다. 그나마 이 대표는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일본인 저자와 연락하며 표지도 달리하고, 내지의 그림 배치도 다르게 하면서 텍스트만 같을 뿐 일본 책과는 다른 새로운 번역서를 만들어 냈다.
혜화1117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출판사를 직접 운영한 뒤부터 이 대표는 “확실히 이전에 비해 훨씬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람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아마도 저만의 영토가 만들어진 덕분”이라며 “불필요한 곳에 에너지를 쓰지 않고 이 영토를 가꾸고 질서를 부여하면서 저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즐거움이 크다”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자신만의 영토에서 기존의 책과는 다른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다. 혜화1117의 모든 책의 뒤에는 책 만든 과정을 담아 ‘이 책을 둘러싼 날들의 풍경’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싣는다. ‘한 권의 책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어떻게 만들어지며, 이후 어떻게 독자들과 이야기를 만들어가는가에 대한 편집자의 기록’이다. 초판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은 물론 증쇄를 할 때마다 출간 이후 독자들과 만나서 책이 성장해 가는 과정이 두루 적혀 있다. 편집자로서는 여간 품이 많이 들어가는 게 아니다. 혜화1117의 독자들은 책을 사면 먼저 ‘풍경’부터 찾아 읽는다고 한다. 책이 나온 뒤 사라져 버리는 편집자의 시간과 흔적을 남겨두고 싶은 이 대표의 마음이 담겨 있다.
책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하겠다는 신념은 이 대표가 ‘미안하다’고 언급한 책과 얽힌 일화에서도 드러난다. 이 대표는 2019년에 언어학자인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가 인연을 맺었던 국내외 도시 14곳의 이야기를 담은 ‘로버트 파우저의 도시 탐구기’를 펴냈다. 이 대표는 오래된 앨범 같은 느낌을 주고 싶어 흑백으로 만들었지만 독자들로부터 “도시와 관련된 책이 흑백이어서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는 불만이 나왔다. “저자와 책에 너무 미안했다”는 이 대표는 지난해 2쇄를 찍을 때, 새로운 내용을 보완하고 이미지도 더 많이 넣어서 올컬러로 만들어 ‘도시독법’이라는 제목의 전면 개정판을 냈다. 이 대표는 “만들어놓고 보니 진작 그랬어야 했구나라고 반성했다”면서 “그래도 그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고, 책에 대한 미안함에서도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으니 결론은 해피엔딩이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매번 책을 만들 때마다 “혜화1117의 책을 통해 독자들은 유익하며 저자들은 행복하고, 노동자이자 대표인 나는 그것을 위해 복무한다”는 다짐을 한다. 그러면서 해마다 “작년보다 일을 덜 해야겠다”는 또 다른 다짐도 덧붙인다. 어찌 보면 모순된 것 같기도 한데, 이 대표의 설명은 이렇다. “일 년에 네다섯 권의 책을 만들 수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해요. 차츰차츰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일이 늘어나고 있어요. 이 일을 오래오래 하고 싶은데 노동의 강도가 너무 세면 오래 하기 어려우니까, 완급을 조절하면서 즐겁게 일하고 싶거든요.” 독자들의 유익과 저자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책 만드는 노동자의 행복이 전제돼야 한다는 얘기다.
처음 출판사를 차린다고 했을 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말렸다. 이미 사양 산업의 길로 접어든 출판업에 자본도 없이 그것도 혼자서 뛰어들겠다는 무모함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대표는 “그때 그 말을 듣고 안 했다면 어땠을지 아찔하다”고 말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막막할 때면 어린 시절 읽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길을 잃은 앨리스에게 고양이가 건넨 말을 떠올리곤 한다. “어디로든 가면 어디든 가 있을 거고, 중요한 건 어디냐가 아니라 어디로든 가는 것이라는 말이에요. 저는 그냥 성실하고 꾸준히 이 길 위에 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원하는 미래에 가 있기 위한 저의 선택입니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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