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사랑은 대체 뭘까요
얼마 전 친구들과 오랜만에 시시콜콜한 대화를 했다. ‘사랑해 봤어?’ ‘언제 처음 했어?’ ‘몇 번 해봤어?’ 따위 질문을 술도 아닌 사이다 한 캔을 까놓고 했다. 왠지 낯간지러운 마음이 들어 낄낄거리는 웃음을 덧붙인 채. 연애를 꽤 많이 한 편이지만 그 질문에는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관계에 연인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면 사랑한다는 말은 무언의 약속이 되는 법이니까. 그 약속이 모여 습관이 되기도 한다. 내 마음을 의심해 볼 여지도 사라진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시끄러운 교실 한구석에 쑥덕거리며 모인 학생들이 보인다. “무슨 일 있어?” “얘 헤어졌대. “진짜?! 어쩌다가?” “요즘 좀 계속 안 좋았대. 근데 웃긴 게 뭔 줄 알아? (목소리를 줄이며) 어젯밤에도 얘 남친이 사랑한다고 했다는 거야. 그래놓고 오늘 헤어지자고 했대.” 그러자 또다른 친구가 비장하게 덧붙인다. “존나 배신자네.”
길가의 돌멩이처럼 흔하고 한없이 가벼운 사랑과 자주 마주한다. 그러다 보니 다 똑같이 생긴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애초에 그런 것은 그냥 사랑이 아닌 돌멩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수지 아가씨. 사랑은 대체 뭘까요?” 〈짱구는 못 말려〉에서 한 보디가드가 쓰러져 있는 수지를 들어 안으며 읊조리는데, 짱구가 특유의 심드렁한 말투로 경쾌하게 말했다. “망설이지 않는 거요.”
그래, 다시 생각해 보면 망설이지 않을 것 같다. 자려고 누우면 찾아오는 오만가지 상상 속에서 나는 우리 집 애들을 구하기 위해 망설이지 않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간다. 칼을 막고, 폭탄으로부터 애들을 감싼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살면서 사랑을 최소 네 번은 했네. 짱구는 그렇게 대답하는 나를 보며 씨익 웃어보이는 것 같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루에 몇 번이나 할까? 세어보지 않았지만 50번은 하지 않을까. 아침에 일어나 아침 인사를 하면서, 뒤통수를 쓰다듬으면서, 만지면 싫어하는 배 부위는 피해 빗질을 하면서, 캣 휠을 타는 삼삼이를 보면서. 하지만 마음껏 하지는 못한다. 마음 같아서야 입 안에 솜뭉치를 집어넣고 호로록 빨아들이고 싶은데, 사랑은 상대가 싫어하는 짓은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 애들과 함께 산다는 건 커다란 사랑을 마음속에 담아놓고 사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귀찮게 하면 금세 자리를 떠나버리는 탓에 나는 온 사랑을 손바닥에 모으는 능력을 얻고야 말았다. 그리고 ‘에네르기파’를 쏘듯 쓰다듬기 아니면 사랑을 입에 가득 담아 대화를 시도하기. “밖에 뭐 재밌는 거 있어?” “걱정 있어? 뭐 부족해?” “요즘 서운한 건 없니?” 온종일 중얼중얼 끊임없이 말을 거는 것, 이것이 내 사랑법이다.
고양이들은 또 자기들만의 방법이 있다. 설거지할 때 조용히 다가와 다리에 이마 박치기를 해서 내 다리 꺾기. 겨우 잠이 들려고 할 때 나를 질겅질겅 밟으며 귓가로 다가오기. 노트북을 펼치고 일하는데 자판 위로 난입해 대신 글 써주기. 택배를 뜯을 때, 화장실 모래 전체 갈이를 할 때, 퍼즐 같은 작은 취미생활을 할 때, 이케아에서 산 책상을 조립할 때, 부엌에서 칼질을 할 때, 밥 먹을 때 근처에서 늘 기웃거리며 무언의 압박을 주는 것. ‘뭐 해?’ 애들은 자신이 내게 관심이 많다는 걸 어필하는 식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 어필이 충분했다 싶으면 미련 없이 자리를 뜬다. 나는 덩그러니 남겨진 채 떠나는 애들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사랑은 궁금한 걸까? 궁금해서 사랑인 걸까? 그렇다면 모든 걸 다 알게 되면 사랑이 끝나는 걸까. 그럴 리가 없다. 자다가 갑자기 벼락을 맞곤 얘네를 속속들이 다 알게 되더라도 나는 사랑을 그만할 수 없을 거야. 창밖을 바라보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조금 궁금하지만, 사실 몰라도 별로 상관없다. 그냥 같이 있으면 좋아서 자꾸 너희 옆으로 간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모르는 것투성이 세상에서 나는 너희가 주는 사랑만큼 매일 또렷이 만나는 셈이다.
너를 처음 만난 날을 자주 떠올린다. 술을 잔뜩 먹고 들어온 날, 술김에 트위터를 켰던 날, 너의 입양처를 구한다는 글을 본 날. 철장에서 오들거리던 너를 본 날. 동물병원에서 뛰어다니던 너를 본 날. 나를 보고 조그맣게 하악질을 하던 날에 우리는 가족이 됐다. 망설인 적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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