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백여 명 학살, 얼마나 잔혹했길래 이런 이름 붙었을까
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내포에서 융성한 불교는, 지리적으로 태안이 그 시원이다. 중국에서 뱃길로 태안반도에 닿은 불교가, 웅진과 사비를 향하며 골마다 번성해 나갔다. 가야산 동쪽 분지, 흥선대원군 아버지인 남연군 묫자리도 본 주인은 대사찰이었다. 풍수지리를 신봉한 대원군이 가야사를 불사르고 묘를 쓴 일화는 지금도 입방에 오르내릴 지경이다.
서산 운산에 가면 바위를 뚫고 나온 '서산마애삼존불'을 만날 수 있다. 백제의 미소라는 삼존불은 온화함과 평온 그 자체다. 마주하는 이는 물론 주변 초목도 미소 짓는다. 마음으로 주고받는 염화미소의 정수다. 옅게 남은 붉은 입술에선 사그라든 정염의 오묘함마저 느껴진다. 이런 소회가 존엄엔 무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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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산마애삼존불 '백제의 미소'라는 칭송을 받는 서산시 운산면 소재 마애삼존불.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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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안마애삼존불 백화산 태을암에 있는 태안마애삼존불. 땅에 아래가 묻혀있던 걸 파낸 당시 모습이다. 지금은 집을 지어 보존 중이다. |
| ⓒ 국가유산청 |
어느 날 갑자기 태안이 다시 돌아왔다. 땅이 새로 열린 개벽처럼 말이다. 1914년 일제가 서산에 편입시킨 후 75년 만인 1989년이다. 고려 말과 조선 초, 왜구의 극심한 침탈에 당시 수령들이 아전 몇과 함께 서산과 예산을 전전한 역사에 비하면 그나마 다행이라 여겨야 하나?
호위무사 거느린 듯한 이 읍성
태안읍성 뒤에 선 산이 상서롭고 기품있다. 그리 높아 보이진 않으나, 노출된 바위가 굵은 뼈대를 연상케 하는 골산이다. 해발 284m의 백화산이다. 그 앞에 앉은 읍성이, 기골이 장대한 호위무사를 거느린 듯 편안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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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안(해동지도) 태안읍성이 강조된 해동지도. 편 손바닥 모양의 태안반도가 잘 그려져 있다. 태안읍성-안흥진성-소근진성으로 이어진 방어체계가 한 눈에 보인다. |
|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
고려 충렬왕 때 이곳 출신 환관 이대순이 원나라 황제의 은총을 입어 얻은 이름이 태안이다. 국태민안(國泰民安)에서 파생했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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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화산성 백화산 정상 봉화대 아래에 일부 남아 있는 백화산성의 성벽.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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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안읍 백화산 정상에서 본 태안읍과 남면 방향. 사진 가운데, 누런 흙이 드러난 곳이 태안읍성이다. |
| ⓒ 이영천 |
다른 나라 외교관 자주 머물렀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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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안읍성 동문 복원된 태안읍성의 동문과 성곽.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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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애당 태안현의 동헌으로, 삼문 앞 회양목이 고을과 동헌의 나이를 짐작케 한다.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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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이정 태안읍성 남문 터 앞에 앉아 있는 경이정.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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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안읍성(1872년지방지도_부분) 태안읍성의 성곽과 주요 시설 및 남문 앞 경이정이 그려져 있다. 뒤 백화산엔 '고산성지'라고 씌여 있다. |
|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
목 졸라서, 매 맞아서, 작두로... 희생당한 민중들
교형은 목을 매다는 형벌이다. 장형은 곤장이라면 이해가 쉽다. 암벽은 이들 형벌의 앞 글자를 따서 교장(絞杖)바위가 되었다. 선생님의 지칭이 아니다. 얼마나 잔혹한 학살이 자행되었으면, 저런 끔찍한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1894년 9월(음) 전라도 삼례에서 반외세를 외치며 재봉기한 동학군에 호응하여 충청도 동학도 봉기에 나선다. 그달 말 해월 최시형의 통문에 내포에서도 수천 명이 기포한다. 10월 1일엔 태안과 서산 관아를 잇달아 점령한다. 태안읍성이 이때 크게 훼손된다. 다음날 이들이 합세하여 해미읍성마저 함락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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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장바위 1894년, 태안에서 붙잡힌 1백 수십 동학농민군이 여기서 교형과 장형 등으로 희생당했다 해서 이름이 '교장(絞杖)바위'가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일본인 교장 선생의 고마움을 기려 '교장(校長)바위'라는 주장도 있다. |
| ⓒ 이영천 |
악랄하기로 호가 난 이두황이다. 여기서 그칠 인사가 절대 아니었다. 태안 깊숙이 진군, 10명이 1개 조로 밀정을 앞잡이 세워 동학군 색출에 나선다. 태안에서만 수백 명이 붙잡힌다.
이들 중 1백 수십을 읍성에서 총 개머리판으로 쳐 죽였단다. 11월 15일이다. 나머지 일백 수십을 교장바위에서 말 그대로 목을 졸라서, 매를 쳐서, 심지어 작두로 목을 베어 죽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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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안 동학농민혁명 추모탑 1978년 희생자 후손들이 십시일반 모금으로 세운 추모탑. |
| ⓒ 이영천 |
태안마애삼존불이 걷는 길은 어떤 길일까? 두 여래불이 인도하는 관음보살의 길이 문득 궁금해졌다. 부분 복원된 태안읍성에서, 마애삼존불 길의 끝자락이나마 엿볼 수 있길 바랐다. 그런 간절한 열망이 연무처럼 백화산을 감싸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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