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서 한일 청년 100명이 추모... 한국은 이 여성을 기억하고 있나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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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군 ‘위안부’ 증언자 배봉기 할머니의 모습. |
| ⓒ 개인소장자 김현옥, 서울시 제공 |
지난 23일 도쿄 신주쿠역 앞에서는 일본 시민단체인 '일본군 성노예제 부정을 용서하지 않는 4·23행동'과 한일 청년 100여 명이 그를 추모하며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반성을 촉구했다. 보도에 따르면, 결성 10년을 맞는 이 단체의 명칭은 그의 사연이 일본 <조선신보>에 실린 1977년 4월 23일에 맞춘 것이다.
배봉기의 사연은 <조선신보> 보도가 나기 2년 전인 1975년부터 일본 언론들의 주목을 받았다. <일본연구> 2023년 제98호에 실린 이권희 단국대 초빙교수의 논문 '트랜스내셔널 서벌턴의 주체화에 관한 고찰 – 오키나와의 조선인 일본군위안부 배봉기의 사례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은 "<류큐신보> <오키나와타임스> 등 오키나와 지역지는 물론이고 <교도통신>의 발신에 의해 일본 전역의 미디어에서도 배봉기에게 관심을 보였다"고 설명한다.
4년 뒤 한국에도 그의 사연이 소개됐다. 1979년 5월부터 일본 곳곳에서 상영된 다큐영화 <오키나와의 할머니 증언, 종군위안부>를 보도한 그해 9월 21일자 <동아일보> '일(日) 사회에 정신대 충격'은 그가 곤도산이라는 일본인 남성의 알선으로 위안부가 된 일을 언급하면서 "이곳에서 아키코라는 일인의 이름으로 배 할머니는 하루에도 수십 명씩 일인 병사들의 노리개가 되어 지내다가 패전과 함께 오키나와에 남아 있게 되었다"라고 전했다.
가난한 여성들을 유인해서 착취한 일제
1914년에 충남 예산군 신례원리에서 삼남매의 둘째로 태어나고 1944년에 오키나와로 강제동원된 배봉기가 61세 때인 1975년에 언론 취재를 받아들인 것은 발붙일 데를 얻기 위해서였다. 딱히 의지할 데가 없었던 그는 오키나와 땅에라도 계속 머물고 싶었다. 이곳에 계속 체류하는 게 그의 목적이었다.
1879년에 오키나와의 유구왕국을 강점했다가 1945년에 빼앗긴 일본은 1972년에 미국으로부터 넘겨받았다. 그런 뒤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일본으로 들어온 한국인에게는 재류특별허가를 해준다'라는 방침을 세웠다.
위 이권희 논문의 제목처럼 배봉기는 정착지 없이 이국땅을 떠도는 초국가적인 하층 여성이었다. 그는 일본어는 물론이고 한국어도 읽거나 쓰지 못했다. 그런 그가 약 30년 전에 자신이 일본 땅에 들어왔음을 입증하기는 쉽지 않았다. 논문은 그의 환갑 때 있었던 일을 이렇게 알려준다.
"서류를 내지 못해 강제추방의 공포에 시달리던 배봉기는 1955년부터 10년간 일한 적이 있는 식당 린카이(臨海)의 주인 신조(新城) 부부에게 1944년 자신이 위안부로 오키나와에 와서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얘길 털어놓았고, 식당 주인은 이러한 사연을 담은 탄원서와 자신들이 신병인수인이 되겠다는 서약서를 나하입국관리사무소에 제출했다."
이 일은 배봉기가 일본 언론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이후 배봉기는 떠올리기 싫은 과거의 아픈 기억들을 소환해야 했으며, 각종 취재로 인해 현재의 일상 또한 본의 아니게 노출되었다"고 논문은 말한다.
배봉기의 아버지는 머슴이었다. 동학혁명이 일어난 1894년에 노비제도가 공식 폐지된 이후로 농업생산을 담당한 주력 부대는 배봉기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었다. 오늘날의 서적이나 영상에서는 이들의 지적 수준이 실제보다 낮게 묘사되지만, 이들은 일제강점기의 가장 평균적인 샐러리맨들이었다.
전부 다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대체로 가난했고, 배봉기 집은 특히 그러했다. "어머니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오는 뒤틀린 감정을 큰딸에 대한 포악질로 풀곤 했는데, 결국에는 철도 노동일을 하던 외간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갔다"고 논문은 말한다.
아버지는 주인집 농가에 기거했다. 그런 상태에서 어머니마저 나갔기 때문에 배봉기와 형제들의 삶은 어려서부터 기구하고 험난했다. 배봉기는 일곱 살 때부터 남의 집에 얹혀살며 구박을 감내했다. 민며느리 겸 가사도우미 등의 고된 노동을 하며 여기저기 전전하는 것으로 유년기와 청소년기는 물론이고 20대 시절도 보냈다.
그러다가 29세 때인 1943년 늦가을에 함경남도 흥남에서 '여자 소개꾼'들을 만났고, 이 남성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갔다. 위 논문에 인용된 일본 작가 가와다 후미코의 <빨간 기와집: 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 여성 이야기>는 '여자 소개꾼'들이 배봉기를 유인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여자 소개꾼의 말은 그럴싸했어요. '일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곳이 있는데 가보지 않을래?'라는 거예요. '일하지 않고 어떻게 돈을 벌어요? 누가 돈을 주는데요?' '일단 가면 벌어. 옷도 필요 없으니까 이불도 버리고 가. 더운 곳이라 그쪽 사람들은 벌거벗고 산다고. 과일도 지천이야. 파인애플·바나나는 산에 가서 나무 밑에 누워 입을 벌리고 있으면 저절로 떨어진다고.' 게다가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살지' 이런 말도 하고. 그래서 나는 '나무 위에 집을 지으면 시원하겠네' 했어요."
위안부가 피해자들임을 부정하는 극우 논객들은 배봉기가 유인당하는 위와 같은 상황을 가난에 찌든 여성들이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섰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이들이 가난에 찌든 것은 일본제국주의의 가혹한 착취 때문이었다. 빈곤의 근본 원인은 일제의 착취였다. 이들이 빈곤 때문에 위안부가 됐다는 극우들의 주장은 이들이 일본의 착취 때문에 위안부가 됐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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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해 9월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인근에서 열린 제1666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 ⓒ 연합뉴스 |
감언이설에 넘어갈 당시의 배봉기는 마치 복권에 당첨된 사람 같았다. <빨간 기와집>에 따르면, "아무튼 돈을 벌 수 있어"라며 "너 혼자 그 돈 어떻게 할래?"라는 알선업자의 말에 그는 귀가 솔깃했다. "그런 돈이 있으면 어떻게 할까 하고 이것저것 생각하니까 밥이 목구멍으로 안 넘어갈 정도였어요"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막상 가보니 큰돈을 벌기는커녕 당장에 '조센삐'라는 놀림부터 맞닥뜨려야 했다. <석당논총> 2020년 제76집에 실린 이진아 동아대 아세안연구소 교수의 논문 '조선인 위안부를 둘러싼 제국 남성의 시선과 언어'는 "일명 '빨간 기와집'이라고 불렸던 오키나와 위안소에 있었던 배봉기 할머니의 구술에 따르면, '삐'라는 놀림과 조롱은 위안소 안의 병사들한테만 받은 것이 아니었다"라며 섬 전역의 주민들이 그렇게 부르며 구경과 엿보기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말한다.
놀림도 놀림이지만, 전쟁통에 목숨을 부지하는 것도 큰 문제였다. 오키나와는 전쟁 발발 이전에 일본 영토가 된 곳 중에서 연합군과의 지상전이 벌어진 유일한 지역이다. 이런 격전지에 놓인 위안부들은 미군 폭격기의 공습을 피해 다녀야 했다. 나무 밑에 누워 있으면 바나나가 떨어지는 지상낙원이 아니었다. 잘못하면 미군 폭탄을 맞는 곳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미군에 붙들려 포로수용소에 끌려갈 수 있는 곳이었다.
섬인 데다가 전쟁터였기 때문에 이곳 경제 사정은 더욱 열악했다. 배봉기는 미군 공습을 피해 낮에는 울창한 숲에 몸을 숨기고 밤에는 마을 인근에 내려가 계곡물로 목을 축였다. 밭을 파헤쳐 고구마를 캐내기도 했다. <빨간 기와집>는 이렇게 말한다.
"닷새 동안 아무것도 못 먹어서 배가 무척 고팠어요. 스즈란이 갖고 있다가 조금씩 나눠준 흑설탕과 그것을 핥아먹으면서 그나마 허기를 달래는 정도였지요."
큰돈이 생기면 어쩌지 하는 행복한 고민을 하며 음식을 힘겹게 목구멍으로 넘긴 일이 있다. 이곳에서는 그렇게 넘길 음식조차 없었다.
처음에 소개받은 것과 전혀 다른 상황에 놓여 죽을 고비들을 간신히 넘긴 배봉기는 일제 패망 직전에 미군에 투항해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 뒤 풀려나 가사도우미도 하고 술집 직원도 하고 성매매도 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그러다가 오키나와에 체류할 자격마저 상실할 상황이 되자 1975년에 자신의 피해 사실을 현지 정부에 알리게 됐다.
배봉기의 존재가 그때부터 양국 언론에 보도되고 다큐영화의 소재로 활용됐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별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이권희 논문은 "한국 정부의 반응 또한 냉담했다"라며 오키나와의 한국 영사가 "처음 있는 케이스로, 영사관에서는 본인의 호적만 확인한 상태이며 그다음 일은 듣지 못했다"고 발언한 사실을 알려준다.
한국 정부는 배봉기라는 위안부 피해자가 오키나와에 있고 본적이 충남이라는 정도만 확인한 채, 그 이외의 사항은 확인하지 않았다. 오키나와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불법·부당한 대우는 받지 않았는지, 일본 측이 약속한 금전이 실제로 지급됐는지 등은 파악하지 않았다. 마땅히 책임져야 할 한국 정부로부터도 외면을 받는 이런 삶을 살다가 그는 1991년에 외롭게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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