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건축가 김원의 사람 이야기(7) 은인, 강봉제 변호사-①

이세영 2025. 4. 23.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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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 건축가 건축환경연구소 광장제공, 사진가 김중만 작품

나는 고등학교 2학년에 입주 과외 교사로 들어갔다. 형이 서울공대에 합격하고 부산에서 올라오게 되자, 두 아들을 서울에 유학시킨 어머니는 도저히 힘들어서 안 되겠다고 하셨다. 나에게 하숙비를 보내 주실 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나는 우리 담임선생님께 부탁을 드렸고, 눈이 동그랗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신 선생님은 며칠 안 되어 어렵지 않게 좋은 학생을 찾았다며 내가 갈 곳을 일러주셨다.

그 집은 서소문동, 지금의 정동 대법원 뒤편, 법원 관사 속에 있는 어느 부장판사 댁이었다.

그 집에서 처음 만난, 내가 가르쳐야 할 학생은 경기중학교 2학년생으로, 성적이 420명 중 400등 이하였다. 그러나 그 성적 이야기에 한숨을 내쉬는 나에게, 그 아이가 눈물을 흘리면서 열심히 하겠으니 함께 있어 달라고 매달렸다.

지금까지의 과외 선생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일부러 공부를 안 했다는 것이었다. 첫눈에 멍청한 아이 같지는 않았다. 공부는 시키면 따라올 것 같았다. 그 부모의 부탁인즉슨, 이 집안의 장남이니 어떻게든 경기고등학교에만 집어넣어 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경기 중학교에서 동일계 고등학교에 떨어진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다음 날부터 그 집 이층 다다미방에서 나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 다행히 그 아이의 어머니는 "선생님에게 잘하는 게 우리 아들에게 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사도우미와 운전기사에게, 그리고 남편에게까지 이 어린 학생 선생 김원에게 잘해주도록 엄명을 내렸고, 부인 자신도 앞장서서 내 밥상까지 챙기기를 시작했다.

그 집이 훗날 내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린 강봉제 변호사 댁이다. 당시의 강봉제 부장판사는 '대쪽'으로 유명한 분이었다. 첫눈에 근엄하고 강직한 인상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것 같았으나, 나에게는 자상하게 대해 줬다.

깡마르고 작은 체구에 두 눈만이 형형한데, 금속 지붕을 씌운 부장판사의 검정 지프차에 타고 출근하는 모습은 권위가 있어 보였다.

내가 가르치게 된 학생 강 군은 그러니까 나보다 세 살이 아래이고, 키는 컸지만, 그 아버지를 똑 닮아서 비쩍 마르고 허약해 보였다. 우리는 이튿날 아침부터 뒷마당의 철봉에 매달려 턱걸이 운동부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 이 아이의 가장 큰 걱정은 체능 점수, 특히 턱걸이와 팔굽혀펴기 같았다.

머리는 좋은 것 같았고 말귀도 잘 알아들으며, 수학, 영어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다만 공부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았고 그래서 공부하기가 싫어지는 그런 아이였다. 다행한 일은 이 애가 나를 믿고 따라와 줄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과, 그 집 온 가족이 나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진, 한마디로 화목하고 건강한 집안이라는 점이었다.

매달 있는 월말고사 성적이 거의 50등씩 죽죽 올라가기 시작했으니 나도 보람이 있었지만, 이 집 식구들의 기쁨은 극치에 달했고, 당연히 학생 본인도 크게 보람을 느끼며 공부에 재미를 붙이는 것 같았다. 따라서 가족들 사이에서 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리고 일 년 후, 이 애는 좋은 성적으로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는 보너스를 두둑이 받고 그 집을 나와 다시 학교 근처인 소격동에 하숙을 정하고, 나 자신의 입시 준비를 시작했다.

대학에 합격한 후, 가끔 그 집에 놀러 가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객지 생활에서 나를 그렇게 반갑게 맞아주는 식구들이 있다는 것은 귀중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이 애가 고3 올라가면서 나는 다시 초빙받고 가서- 이번엔 아주 입시전문가로서 - 또 서울대학에 입학시켰다. 인연이라면 엄청난 인연이었다.

강 판사님은 그 후 법복을 벗고 변호사 사무실을 덕수궁 입구에 차리셨다. 나는 우리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부산의 오제봉(吳濟奉) 선생이 써주신 글씨 액자를 표구해서 - 봉자(鳳字)와 제자(濟字)가 들어간 아마도 도교적 의미의 글귀였다- 변호사 사무실에 갖다 드렸다. 강 변호사님은 그걸 아주 좋아하며 귀중하게 사무실 정면 벽에 걸어놓고 사람들에게 자랑하셨다.

내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낀 것이었지만, 이분은 항상 나라 걱정, 젊은이들 걱정, 도의적 황폐, 그런 것들만 생각하는 분 같았다. 그래서 무슨 국가적인, 사회적인 사건이 있을 때마다 신문에 기고하고 그 기사를 오려서 나에게 보내 주시곤 했다.

내게 보내 주신 걸로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다.

'법관의 자존심'이라는 법보신문 기사였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구태와 개혁의 갈등은 똑같은 것이었다.

또 한 번은 본인이 변호사로서 관여한 재판의 담당 판사를 고발한 기사와 사건이 있었다. 판사를 고발했으니 그 재판에서 이기기는 틀린 것인데, 그런데도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겠다는 엄격성이 있었다.

이전 칼럼에 언급한 내용으로 독자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내가 투서 사건에 연루돼 건축사법 위반으로 재판받게 된 일이 있었다. 신군부 시절인 1980년의 일로 당연히 나는 겁에 질려서 변호사님을 찾아갔다.

그분 역시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맞아, 자초지종을 듣고는 조용히 안심시키며 대책을 세워 보자고 하셨다.

먼저, 자신이 건축법, 건축사법을 잘 모르니 공부를 좀 해야겠다고 하시는데 나는 즉시로 마음이 놓였다.

잘은 모르지만, 변호사가 사건을 해결하는데 그때그때 관련 조문을 찾아가며 참고하면 됐지, 아예 공부해야겠다는 것은 단단히 덤벼들어 보겠다는 의지로 비쳤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정말로 신군부 군인들의 하는 일에 겁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건축사법 개정이고 뭐고 다 귀찮고, 오로지 좀 평화롭게, 평범하게 살고만 싶었다.

그러나 투서를 접수한 민원실의 한 육군 소령이 내 이름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으로, 내 관련 서류를 건설부 건축과에 보내어 놓고, 내 한해 후배인 건축과장에게 계속 고발 조치를 종용하고 있었다.

첫 번째로 강 변호사님이 한 일은 검찰에서 고발해 약식재판에서 50만원 벌금형을 받은 데 대해 정식재판을 청구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정식재판의 1심에서 6개월 징역형이 떨어지자, 불복 항소장을 쓰면서 동시에 대법원장에게 항의서한을 보내셨다.

"정식재판 청구의 근본정신이라 할 피고인의 억울함에 대해 더 무거운 형을 내리는 일은 판사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만일 그 판사가 정말 죄질이 나쁘다는 확신을 갖고 한 일이었다면, 법정구속했어야 옳다."

대개 이런 내용이었는데, 그리고 얼마 후 강 변호사님은 그 젊은 판사가 강원도 어디로 좌천되어 갔다는 이야기를 내게 전해 주셨다. (계속)

김원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

▲ 독립기념관·코엑스·태백산맥기념관·국립국악당·통일연수원·남양주종합촬영소 등 설계. ▲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삼성문화재단 이사, 서울환경영화제 조직위원장 등 역임. ▲ 한국인권재단 후원회장 역임. ▲ 서울생태문화포럼 공동대표.

* 더 자세한 내용은 김원 건축가의 저서 '행복을 그리는 건축가', '꿈을 그리는 건축가', '못다 그린 건축가'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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