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일easy] 50년 경쟁 끝 '적과의 동침'… 韓 제조업 새 국면
50년 경쟁사 보다 무서운 '생존 위기'
전세계 제조업 '새 국면'… "흩어지면 죽는다"
산업계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혹은 필연적으로 등장한 이슈의 전후사정을 살펴봅니다. 특정 산업 분야의 직‧간접적 이해관계자나 소액주주, 혹은 산업에 관심이 많은 일반 독자들을 위해 데일리안 산업부 기자들이 대신 공부해 쉽게 풀어드립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제발 문제에 휘말리길 바랐던 적(敵)과 오늘부터 돌연 동료를 선언하는 일들이 최근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이런 움직임이 있어왔지만, 각자도생 체제가 마치 규정인 것처럼 여겨지던, 자존심 센 제조업 마저도 이제는 손을 뻗기 시작했죠.
최근 국내 산업계를 아주 떠들썩하게 했던 소식이 있습니다. 현대차그룹과 포스코그룹이 동맹 관계를 구축한다는 건데요. 국내 제조업 역사의 굵직한 기둥을 맡아온 두 형님이 갑자기 손을 맞잡는다니요. 우선 손을 잡은 이유를 알기 전에 왜 놀라운 건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죠.
포스코그룹과 현대차그룹은 주력 사업이 각각 철강과 자동차로 다르지만, 철강업에서만 놓고 보면 국내에서 무려 50년을 경쟁해온 경쟁사이기도 합니다. 포스코는 국내 철강업계 부동의 1위, 현대차그룹의 계열사인 현대제철은 2위니까요. 삼성과 LG, 롯데와 신세계, SKT와 KT가 경쟁을 멈추고 친구가 되기로 한 겁니다.
사실 포스코는 과거 현대차의 첫 양산차 포니가 출시됐던 당시만 하더라도 현대차에 자동차 강판을 공급하던 파트너였는데요. 현대차가 인천제철(현 현대제철)을 인수하고, 2004년 한보철강을 인수해 고로 건설에 뛰어든 이후부터는 경쟁사로서 길을 걸어왔습니다.
현대차·기아가 생산하는 모든 자동차 모델에 포스코 강판이 들어갈 일을 완전히 차단해버린 겁니다. 포니가 생산된 1973년을 기점으로는 50년, 2004년 현대제철을 인수한 시점으로보면 21년의 경쟁관계를 유지해온 셈이죠.
오랜시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치열하게 싸운 경쟁사가 서로를 향해 손을 뻗게 한 건 '생존'이 바탕이 됐습니다. 적당히 견제하며 각자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는데 상식과 논리라곤 눈곱만큼도 통하지 않는 공공의 적을 맞닥뜨리게 된 겁니다. 적과의 동침이 가능하려면 더 강력한 공공의 적이 생겨야하는 법이죠. 바로 미국입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올 1월부터 국내 기업들은 단 하루도 편히 잘 수 없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눈 감았다 뜨면 없던 관세 정책이 생겨나고, 관세율은 쉴새없이 바뀌고, 환율과 주가는 요동쳤죠.
끝내 자동차와 철강재에 대한 품목별 관세가 시행됐는데요. 관세율이 무려 25%에 달합니다. 포스코그룹은 철강재, 현대차그룹은 자동차와 철강 두 분야에서 모두 관세를 부담하게 됐습니다.
미국을 최대 시장으로 두고 승승장구하던 현대차그룹의 경우 가장 먼저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요. 그래서일까요, 사상 최대 규모인 무려 31조의 미국 투자를 결정합니다. 한국, 멕시코 등 해외 공장에서 만들어 관세없이 미국으로 들여와 파는 게 맘에 안든다는 트럼프의 기분을 여지없이 풀어주는 선택이었죠.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직접 미국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31조원의 투자를 발표한 것도 많은 이들의 주목을 샀지만, 더 주목을 받았던 건 투자금의 쓰임새였습니다.
단순히 자동차 조립공장을 더 만들겠다는 게 아니라, 자동차 강판을 만드는 제철소를 미국에 짓겠다는 거였죠. 자동차에 들어가는 부품 하나하나까지 모두 미국산으로 재편하겠다는 건데요. 미국에서 장사를 접을 게 아니라면, 트럼프 비위도 맞추고 현대차그룹으로서도 생산하기 수월한 환경이 될 테니 이러나 저러나 투자 가치는 높은 셈입니다.
현대차그룹이 발표한 미국 루이지애나주 전기로 제철소 건설에 들어가는 비용은 58억달러, 한화로 약 8조2600억에 달합니다. 포스코그룹은 여기에 손을 뻗었고요. 지분을 투자하고, 일부 생산 물량을 직접 판매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죠.
관세로 어려움에 처한 상황인 건 포스코그룹도 같은 상황입니다. 포스코는 현재 미국 내 제너럴모터스(GM), 포드 등 현지 완성차 기업에 철강재를 납품하고 있는데, 조지아주에 세운 '포스코아메리카'는 철강재를 제조할 수 있는 공장이 없어 한국에서부터 수입해 가공만 거친 후 공급해왔거든요.
그동안은 한국에서 관세 없이 들여갈 수 있었지만, 관세 정책이 지속적으로 시행된다면 향후엔 미국 내에서 철강재를 공급받으려는 제조사가 더욱 늘어날 겁니다. 포스코로선 미국 시장 내에서 어느정도의 생산 능력을 확보했으니 향후 더 많은 고객사를 끌어들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 거죠.
포스코그룹과 현대차그룹이 국내 굵직한 기업이니 주목을 크게 산 것 뿐, 사실 제조업체들의 동맹 관계 구축은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현대차가 회사 설립 57년 만에 미국 GM과 맺었던 동맹 역시도 작년 아주 큰 화제가 됐죠.
서로의 수요를 뺏어도 모자를 상황에서 두 업체가 손을 잡은 건 100년의 내연기관 역사를 뒤로 하고 갑자기 등장한 전기차와 이를 타고 몸집을 불린 중국 BYD라는 공공의 적, 이에 따른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방증합니다. 몰락할 바에야 적과 손을 잡는, 궁지에 몰린 선택이 이미 글로벌 시장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죠.
굵직한 역사를 자랑하는 제조업체들의 동맹은 앞으로 더욱 많아질 겁니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으니까요.
최근 수년 사이 강력해진 친환경에 대한 의무로 인해 굴뚝에서 연기를 뿜어내던 기업들은 돈도 벌고 탄소도 줄여야하는 숙제를 안게됐고, 중국의 비약적 성장으로 미국과 유럽 등 제조업 강국이 견제수위를 높이는 탓에 새우등 터지는 국가가 늘고 있습니다. 힘의 논리를 내세웠더니 전세계 시장이 굴복하는 맛을 봐버린 미국은 어쩌면 더 포악해질 지 모릅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는 앞으로 4년. 하지만 포스코와 현대차의 협력이 4년에 그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트럼프 가고 누가 올 지, 트럼프는 갔는데 관세는 남아있을 지, 이후에 또 어떤 기상천외한 규제와 정책이 등장할지, 그 누가 알겠어요.
이런 변화는 반도체, 자동차, 철강 등 굵직한 효자 업체들이 떠받쳐주던 한국 경제에도 새 국면을 가져올 겁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시작한 관세 전쟁으로 인해 4월 한달 동안 벌써 한국의 수출량이 5.2%나 줄었고, 대미 수출만 보면 14.3%나 하락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이 1.0%에 머물 것이라는 무서운 전망을 내놨습니다.
사상 최대, 사상 최고라는 단어에 흥미를 잃고, 어느 업체가 더 잘 됐는지 줄 세우며 ‘안심하기는 이르다’는 기사를 지겹도록 쓰던 1년 전이 벌써부터 그리워집니다. 글로벌 수많은 경쟁사 중 기왕이면 한국 업체끼리 협력해 위기를 돌파하려는 국내 기업들의 의지를 진심으로 응원해봐야겠죠. 궁지에 몰려 맞잡은 손이 트로피를 들어올리게 되는 순간이 올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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