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 고집한 한미반도체에 흔들리는 HBM 동맹

윤준식,나경연 2025. 4. 22.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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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경제] SK하이닉스와의 공급망 갈등
한미반도체 TC본더. 한미반도체


한미반도체와 SK하이닉스 사이 생긴 균열이 반도체 업계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SK하이닉스가 한미반도체로부터 독점 공급받던 열 압착(TC) 본더를 한화세미텍과 싱가포르 장비사인 ASMPT에도 맡기기 시작한 것이 발단이었다. 한미반도체는 SK하이닉스에 TC본더 가격 인상을 통보하고 상주하던 정비 인력을 철수시키는 방식으로 대응에 나섰다. 전 세계적으로 반도체 경쟁이 심화하는 가운데 국내 기업 간 갈등이 장기화하면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 수성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1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TC 본더는 D램을 8단, 12단씩 겹쳐서 만드는 HBM에 필수적인 장비다. D램이 정확한 위치에 있도록 정렬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접합 작업을 담당한다. SK하이닉스가 삼성전자보다 앞서 HBM 기술력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주요 요인 중 하나로 한미반도체의 본딩 기술력이 지목될 만큼 양사의 파트너십은 굳건했다. 한미반도체는 2017년부터 SK하이닉스와 TC 본더의 본딩 기술을 공동개발해 상용화했다. 인공지능(AI) 학습 수요에 힘입어 HBM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SK하이닉스와 한미반도체의 실적은 고공 행진했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에만 66조2000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한미반도체 역시 5589억원의 매출로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돈독하던 양사 관계가 틀어진 것은 지난해 하반기부터다. SK하이닉스는 한화세미텍이 생산한 TC본더의 퀄(품질) 테스트를 진행한 데 이어 ASMPT 장비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지난달에는 한화세미텍과 연이어 공급 계약을 체결하며 총 420억원어치의 TC본더를 공급받기로 했다. ASMPT 장비로는 차세대 HBM3E 16단 제품 등에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SK하이닉스는 공급망 다변화를 위해 한미반도체 외의 기업들과 계약을 맺었다는 입장이다. 이는 한미반도체가 SK하이닉스에 편중된 TC 본더 매출 구조 개선을 목표로 지난해 미국 마이크론 등 새로운 고객 발굴에 나선 것과 유사하다. 홍콩 증권사 CLSA는 한미반도체의 TC 본더 매출에서 SK하이닉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지난해 74%에서 2027년에는 40%까지 낮아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미국발 관세 전쟁 등 글로벌 공급망이 위협받는 가운데 기업들이 각자도생으로 공급망 다변화에 나서는 것은 당연한 움직임이라는 평가다.

이런 상황에서 SK하이닉스가 독점 공급망을 깨뜨렸다는 이유만으로 한미반도체가 고객서비스(CS) 엔지니어까지 철수시킨 것은 지나친 대응이라는 지적이다. 한미반도체는 한화세미텍이 특허를 침해했다며 지난해 12월 침해금지 및 손해배상청구 소송에 나선 상황이다. 업계 관계자는 “결국 한화세미텍 제품을 쓰지 말라는 압력을 넣고 싶었기 때문에 한미반도체의 대응이 세진 것 아니겠냐”며 “하이닉스가 한화세미텍 등 다른 공급사를 확보하는 것은 한미반도체를 배제한다기보다 리스크를 분산하고 생산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말했다.

한미반도체는 8년 동안 장비 가격을 동결하는 등 양사 협력에 힘써왔다고 항변한다. 그동안 CS 엔지니어 파견 비용을 받지 않은 것 역시 양사 간 협력을 공고히 하는 차원이었다는 입장이다. 오히려 후발주자인 한화세미텍이 SK하이닉스에 처음 공급한 TC본더의 가격이 한미반도체보다 20% 이상 높은 것은 기존 공급자를 역차별한 것이란 설명이다.

이번 갈등이 과거 삼성전자와의 분쟁을 연상케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미반도체는 후공정(검수·포장) 장비인 ‘소잉 앤드 플레이스먼트’ 장비를 삼성전자가 자회사인 세메스 제품으로 대체하자 특허침해 소송을 걸어 승소했다. 이 대응을 계기로 삼성전자는 2010년대 초 한미반도체와의 협력을 끊었다.


‘제2의 삼성 사태’를 우려한 SK하이닉스 경영진은 한미반도체 본사를 찾아 협의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사의 향후 관계는 각각 주도권을 쥐고 있는 두 가지 지점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지가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SK하이닉스가 이달 말 결정할 것으로 예상되는 HBM3E 제조용 TC 본더 60~80대의 수주 결과가 주목된다. 수주전에서 HBM3E 글로벌 점유율 90%를 차지하는 한미반도체를 제치고 한화세미텍 등이 추가 수주에 성공한다면 하이닉스가 멀티벤더 전략을 밀어붙이기로 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철수시킨 엔지니어들의 점검 비용을 한미반도체가 SK하이닉스에 청구하기 시작할지도 관심사다. 한미반도체가 그동안 양사 간 긴밀한 협력 관계를 고려해 무상으로 진행해온 점검을 마이크론에 하듯 고객사 부담으로 돌린다면 SK하이닉스를 ‘고객사 중 하나’로 대우한다는 의미에서 상징성이 크다.

업계에서는 중국발(發) D램 공세로 국내 업체들의 HBM 경쟁력 유지가 보다 중요한 과제로 떠오른 상황에서 양사 간 갈등이 빠르게 봉합돼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한미반도체와 SK하이닉스 모두 하이브리드 본딩 기술이 차세대 HBM 개발에 핵심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관련 기술을 개발 중인 가운데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는 분석이다. 투자은행 JP모건에 따르면 HBM 시장 규모가 올해 380억 달러(54조원), 내년에는 580억 달러(82조원)로 꾸준한 성장이 전망되는 만큼 상호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논의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종환 상명대 반도체공학과 교수는 “12단에 이어 16단, 20단으로 적층 규모가 더 커지는 만큼 본딩 장비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며 “엔비디아 등 HBM 고객사에도 불안감이 커지지 않도록 빠른 화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윤준식 나경연 기자 semipr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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