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릅 라면 한 젓가락, 입에서 쌉싸름한 봄이 피어났다

정인환 기자 2025. 4. 20. 16:58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올봄 농사는 예년보다 늦은 감이 있다.

"넓게 해서 호박을 심으면 될 거 같네. 덩굴이 언덕 타고 올라가게." 금세 밭을 만든 밭장이 숨을 고르며 말한다.

순식간에 제법 실한 두릅이 밭장 손아귀에 꽉 찼다.

올 첫 두릅인데 양이 제법 많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농사꾼들]-경기 고양 편
봄 농사 채비하는 날… 금방 딴 햇두릅 데쳐 빗소리와 김광석 노래 함께
화로에 불판을 놓고 냄비를 얹어 금방 딴 두릅을 데치고 있다.

올봄 농사는 예년보다 늦은 감이 있다. 감자도 그렇고, 잎채소도 평소보다 두어 주 늦게 냈다. 3월 셋째 주에 퇴비 넣고 밭을 만들기 시작했으니, 출발 자체는 늦지 않았다. 다만 직장을 옮기고 일이 많아진 밭장의 공백이 컸다.

2025년 4월12일 드디어 밭장이 짬을 낼 수 있게 됐다. 함께 양주화훼단지에 가서 쌈 채소 모종 7종 27개를 샀다. 일찌감치 모종판에 뿌린 씨앗이 늦추위 탓인지 베란다에서 싹을 틔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로 뿌릴 씨앗은 미리 넉넉하게 준비해뒀다. 오후 2시에 모이기로 했으니 점심부터 먹어야지. 단골로 다니는 추어탕 집에서 막걸리 한 사발 곁들여 맛나게 점심을 즐겼다. 예보대로 빗줄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오, 오셨군요!” 텃밭에 도착하니 먼저 와 있던 막내가 ‘돌아온 밭장’을 안을 듯이 반긴다. 부지런한 막내가 비 잦아든 새 캐놓은 쑥이 벌써 한 움큼이다. 밭장이 이리저리 둘러보며 ‘텃밭 점고’를 시작한다. 이사하면서 옛 텃밭에서 데려온 딸기는 해마다 쓸데없이 활기가 넘쳐났는데, 올해는 전혀 힘을 못 쓰고 있다. 겨울을 버텨낸 부추와 쪽파가 늠름하다. 월동 시금치도 만족스럽다. 다음주엔 캐서 김밥이라도 싸볼까? 다시 빗줄기가 굵어진다. 잎채소 모종부터 넣어야겠다.

지난겨울 비닐 터널을 만들어준 덕에 일찌감치 풀이 무성한 양지바른 밭에 모종을 내기로 했다. 오락가락하는 빗방울 맞아가며 쪼그리고 앉아 싱그러운 초록빛 풀을 잡았다. 단 2개 살아남은 것으로 알았는데, 풀을 걷어내니 겨울을 이겨낸 월동 상추가 하나 더 있다.

퇴비를 넣고 땅을 뒤집는 대신 공간 넉넉하게 모종을 내고 나중에 웃거름을 주기로 했다. 줄과 간격을 맞추는 대신 중간중간에 있는 쪽파와 부추 사이에 아무렇게나 자리를 잡고 모종을 넣었다. 먼저 먹을 쌈 채소는 모종을 내지만 두고 오래 먹을 것은 씨를 뿌린다. 지난주 퇴비를 넣고 만들어둔 두 고랑에 혼합 쌈채 세 종류를 들이붓듯 넣었다. 발아가 잘되면 솎아내기 바쁘겠다.

밭장은 ‘살아 있는 중장비’다. 오랜만에 왔는데 가만있을 리 없지. 어느새 목장갑을 끼고 언덕 밭 좁은 고랑 두 개를 하나로 합친다. “넓게 해서 호박을 심으면 될 거 같네. 덩굴이 언덕 타고 올라가게.” 금세 밭을 만든 밭장이 숨을 고르며 말한다. 그래, 그래, 밭장이 돌아왔다.

잠시 비 그친 틈을 타 밭장이 두릅 수확에 나섰다. 내 눈엔 잘 안 보이는 게 밭장 눈에는 훤히 보이는 모양이다. 순식간에 제법 실한 두릅이 밭장 손아귀에 꽉 찼다. 비가 왔으니 산불 날 염려는 없으렷다. 평상에 쳐놓은 타프 아래서 화로를 펼쳤다. 지난해 말려뒀던 깻단을 꺾어 불쏘시개 삼고, 젖지 않은 나뭇가지를 얹어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 냄새가 새삼 반갑다. 쓰고 난 고기 불판을 화로 위에 올리고, 평상 밑에 뒀던 냄비를 씻어 물을 끓였다.

끓는 물에 방금 딴 두릅을 넣어 데쳤다. 올 첫 두릅인데 양이 제법 많다. 데친 두릅을 건져냈더니 물이 벌겋게 변했다. “이건 무조건 라면이지.” 점심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밭장의 ‘라면’ 소리에 군침부터 돈다. 토닥토닥 빗방울이 타프를 두드린다. 휴대전화로 ‘김광석 노래 모음’을 틀어놓고, 셋이 소반에 둘러앉았다. 대친 두릅과 두릅 라면에, 편의점에서 사 온 땅콩과 육포를 곁들이니 상차림이 제법이다. 햇두릅은 그야말로 싱그럽게 쌉쌀했다.

글·사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