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순이와 관식이의 청춘에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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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현숙 기자]
지난 12일 경기도 파주에서 모임을 가졌다. 꽃피는 봄날, 벚꽃맞이 겸 다정한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약속이었는데, 화창한 날씨는 온데간데없이 돌풍을 예고하더니 급기야 밤에는 눈까지 내렸다. 4월의 눈이라니, 걱정과 불안이 가득한 눈으로 숙소 마당에 날리는 눈발을 바라보며 기후위기를 걱정하고, 세상의 변화에 한 마디씩 보탰다. 저마다의 4월을 떠올리며 그리움으로 때론 아쉬움으로! 그런데 정작 다음날 50여 년의 역사를 한눈에 감상하며 격세지감에 흠뻑 빠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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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이리 근현대사박물관 입구, 50 여 년 전으로 들어간다. |
| ⓒ 한현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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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의 60~70년대, 골목이, 상점이, 학교가 펼쳐져 있다. |
| ⓒ 한현숙 |
인기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애순이와 관식이가 청춘이었을 1960·1970년대 거리, 그들의 자식인 금명이와 은명이가 걸었을 1980·1990년대 모습이 고스란히 펼쳐져 있었다. 우리 엄마의 삶의 흔적이고, 내가 걸어온 그 시절 모습이 모두 있었다.
1시간 넘게 타임머신이라도 탄 듯 그곳을 걸으니, 박물관 이름처럼 근현대사를 사회·정치·경제·문화 등 다방면으로 체험한 것 같았다. 그중 나를 전시관 앞에 오랫동안 머물게 한 특별한 물건이 몇 가지 있었다.
옛 기억은 '하드통'에서부터 소환되기 시작했다. 손때 묻은 '쮸쮸바 아이스통' 뚜껑을 여닫으며 구멍가게 앞에서 '엄마, 10원만~~'을 외치던 그날이 놀랍게도 되살아났다. 30대 엄마는 너무 젊다 못해 어렸고, 나는 키가 작아 발꿈치를 들고 있었다.
집집마다 대문 옆 번듯하게 자리 잡았던 문패, 집주인임을 각인시키는 그 네모난 것이 얼마나 부럽고 대단해 보였던가! 그 이름이 우리 아버지 이름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셋방살이 집 어린 딸내미 눈에도 힘이 느껴지던 한자 이름, 세 글자였다. 온갖 명패들이 모여 그 시절 나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어느 집 부엌에 자리 잡은 '석유곤로', 배고픈 오빠는 어린 누이를 위해 프라이팬에 호떡을 구워주었다. 밀가루 범벅의 손가락으로 곤로의 심지를 돋우던 우리 오빠, 달콤하게 흐르던 설탕물의 뜨거움을 잊지 못한다.
유한양행의 '안티푸라민', 아! 탄성이 나왔다. 그 겨울, 매서운 바람이 불어 입술이 바짝 말라 틀 때면 엄마는 자다가 일어나 우리 입술에 안티푸라민을 발라줬다. 알싸한 그 향, 매콤한 쓰라림이 사랑으로 다가온 무수한 겨울밤, 안티푸라민의 용도가 사실은 소염진통제로 파스의 효능이 있는지는 몰랐다. 내 입술 색이 검게 죽은 것은 안티푸라민 때문이라며 사춘기 때 엄마에게 몹쓸 짜증을 부리곤 했다, 으이구 철딱서니 없는 것! 그 시절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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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멍가게, 문방구 앞 하드통, 통에 넣어 둔 소금물 얼린 주머니가 기억이 난다. 집집마다 대문에 걸려있던 문패와 심지를 돋아 불을 붙였던 석유곤로, 그리고 엄마의 비상 특효약 안티프라민! |
| ⓒ 한현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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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바라 문을 여닫던 텔레비전, 전축처럼 집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던 귀한 물건이었다. 옥상마다 안테나가 필요했다. 전축을 아는 세대는 몇 살까지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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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물품을 아끼고 재 사용했던 알뜰한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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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덕방과 대서소. 좁고 어두웠던 골목! 셋방을 얻기 위해 엄마는 이곳을 드나들었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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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0년 대 초반까지도, 놀러갈 때 아이스박스에 담아갈 커다란 얼음을 얼음집에서 샀던 기억이 있다. 냉장고가 일반 보급되기 전에는 정말 시원하고 중요한 가게였겠지. 쓱쓱 얼음을 썰던 얼음가게 아저씨도 떠오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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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0년 대 초반, 겨울에 출근해 가장 먼저 한 일이 교실 난로에 조개탄으로 불을 붙이는 일이었다. 그 시절 교실에 있던 우리 반 아이들은 50이 되었을 것이다. 철수와 영희가 등장하던 국민학교 교과서도 학교 추억 속에 늘 떠오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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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에 비해 엄청 윤택하고 세련되고 여유로운 오늘의 모습, 선진형으로 나아간 수많은 사회제도, 그에 어울리는 성숙한 시민의식, 자랑하고 내세울 것이 많아진 우리나라의 위치가 대견스러우면서도 왜 우리는 함께 진정 행복하지 못할까? 물질적 풍요 속에서 더 부족함을, 더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그 시절,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웃을 수 있고, 힘을 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갑자기 과거로의 추억 여행은 오늘을 돌아보게 했다. 시간의 흐름이 헛되지 않음을, 이만큼 나이 들도록 가볍게 살아오지 않았음을! 국가든, 사회든, 개인이든 뿌린 대로 거두고 있음을 묵직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을 더 잘 살아내야 함을 깨달았다. 오늘이 모여 역사의 흐름이 이어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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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밤 돌풍과 비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고 우박이 떨어져도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파주헤이리마을을 환하게 빛내고 있는 벚나무! 떨어지지 않으려 애쓰는 듯, 꽃송이가 대견하고 기특하다. |
| ⓒ 한현숙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채택 후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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