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전기로 짓는 한국 철강사... 국내 투자는 답보 상태?
[이지언 기자]
중국산 저가 철강재의 물량 공세로 시름에 잠겼던 국내 철강 업계가 최근 미국의 관세 발효까지 덮치며 깊은 위기감에 휩싸였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모든 무역 상대국에서 수입되는 철강·알루미늄에 대해 지난 3월 12일부터 25% 관세를 부과했다. 과거 대미 철강 수출에 적용되던 '263만 톤 무관세' 쿼터도 사라졌다.
정부는 미국발 관세 장벽이 현실화되자 대책 마련에 분주해졌다. 3일 미국의 한국에 대한 26% 상호관세가 발표되자 한국 정부는 "미 정부의 관세 부과로 영향을 받을 업종과 기업에 대한 긴급 지원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2월, 산업부는 중국산 저가 철강재의 국내 유입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중국산 후판에 최대 38%의 반덤핑 관세 부과 조치를 내리는 등 통상 대책에 역량을 쏟아왔다.
|
▲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왼쪽부터)이 2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루스벨트룸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제프 랜드리 루이지애나 주지사, 장재훈 현대차 부회장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210억달러 규모 미국 투자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
ⓒ 백악관 X |
이중고에 빠진 국내 철강 산업... 체질 개선 불가피
국내 철강사의 미국 현지 투자 소식은 국내 제철소의 폐쇄 흐름과 극적인 대비를 나타냈다. 건설 경기 침체로 수요가 감소하고 중국산 저가재 수입 증가로 이중고에 빠진 국내 철강 산업은 제철소 설비 중단과 폐쇄에 직면했다. 지난해 7월 포항제철소 1제강공장 폐쇄에 이어, 45년 넘게 가동한 1선재공장이 11월 폐쇄됐다. 현대제철도 가동률이 떨어진 포항2공장을 지난해 말 축소 가동하기로 했고, 올해 미국 투자 발표 직후인 4월 한 달간 인천공장의 철근 제품 생산라인을 운영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한국은 세계 6위의 철강 생산국이다. 포스코와 현대제철의 설비 대부분은 국내에 집중되어 있다. 다만 해외 투자와 설비 이전이 확대된다면 국내 철강 산업이 공동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화될 수도 있다.
국가 기간 산업인 철강의 지속가능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체질 개선은 불가피하다. 방향은 명확하다. 친환경 고부가가치 철강 생산으로의 전환이다. 산업부 역시 "국가 기간 산업인 철강의 지속가능한 성장 방안을 확보할 것"이라며 "글로벌 공급 과잉, 보호무역주의를 극복하고 고부가·저탄소 산업으로 도약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국내 철강의 전통적인 산업 경쟁력은 양호한 수준으로 평가됐다. 지난해 산업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 철강 산업의 경쟁력은 세계 4위로 평가됐다. 일본, 미국, 독일 대비 경쟁력 격차가 존재하는 한편 중국에 비해 근소한 우위를 갖춘 것으로 나타났다. 고로 관련 공정과 제품 개발 기술 역량이 높고 인적자본이 우수하다는 것이다.
반면, 친환경 기술 수준과 친환경 전환 인프라 측면에서 열위인 것으로 평가됐다. 다시 말해, 국내 철강 산업 경쟁력을 장기적으로 확보하려면, 저탄소 철강 생산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는 의미다.
친환경 고부가가치 철강 생산으로 전환해야
'그린 철강(green steel)'이 세계 철강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빠르게 높아질 전망이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맥킨지 분석에 따르면, 2021년 약 1500만 톤이었던 그린 철강 수요는 2030년 2억 톤으로 10배가량 늘어날 전망이다. 이는 2030년 세계 철강 전체 소비량의 10%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그린 철강이란 석탄이나 천연가스 같은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청정 전력이나 수소로 만드는 철강을 의미한다.
|
▲ 포스코와 현대제철의 전기로 생산비율 추이 포스코와 현대제철의 2021~2023년 전기로 생산 비율과 탄소집약도 추이. 각사의 철강 생산량 중 전기로 생산 비율이 하락 또는 정체 추세를 나타냈고, 이에 따라 철강 1톤을 생산할 때 온실가스 배출량인 탄소집약도 지표 개선에 악영향을 줬다. 출처: 포스코 지속가능보고서, 현대제철 통합보고서 |
ⓒ 기후넥서스 |
친환경 철강 설비 투자가 미국에서 과감하게 추진되는 반면 국내에서는 잰걸음을 나타내는 양상이다. 이번에 현대제철이 2029년까지 미국에 설치하겠다고 발표한 설비는 270만 톤 규모의 직접환원철 원료생산 설비와 전기로다. 이는 현대제철의 국내 생산 설비의 11%에 해당하는 규모다.
국내 신규 전기로 투자는 포스코의 광양제철 전기로 건설이 대표적이다. 포스코는 광양제철에 들어설 250만 톤 규모의 전기로 공장을 지난해 착공했고, 2026년부터 가동할 예정이다. 고로 중심의 철강 생산 체계를 고수해왔던 포스코로서 친환경 철강 생산 기반을 다지기 위한 중요한 행보다.
다만 포스코의 국내 전기로 투자 발표는 단 1기에 그치고 있다. 포스코는 광양제철뿐 아니라 포항제철에도 2027년까지 전기로 1기의 신규 건설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투자 계획은 불투명한 상태다. 지난해 포항제철에 전기용융로를 도입했지만, 이는 수소환원제철 기술 개발을 위한 소규모 시험 설비다. 광양에 1기의 전기로가 가동하더라도 이는 포스코 전체 고로 설비 규모의 5% 수준에 그친다.
현대제철은 탄소중립의 일환으로 2030년까지 국내에서 전기로를 확대하겠다고 했지만, 신규 설비 도입 일정은 구체화되지 않고 있다. 올해 상반기 내 당진제철에 있는 전기로 박판공장이 재가동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2020년 6월 가동 중단됐던 설비로, 전기로와 고로에서 각각 생산된 용강과 용선을 '합탕'해 탄소 배출량을 기존 대비 20% 줄인 철강재를 생산하는 과도기적 목적이다.
|
▲ 포스코 전기용융료 시험설비로 2024년 1월 완공됐다. 시간당 최대 1톤의 용선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로, 기존 전기아크로(EAF)의 단점을 보완해 저품위 직접환원철(DRI)로부터 고급 철강 제품의 용선도 생산할 수 있다. |
ⓒ 포스코 |
이번 달 미국에서도 미국산 제품대비 탄소배출량이 높은 수입품에 최대 200%까지 수수료를 부과하는 '외국 오염물질 부담금법' 법안이 공화당 주도로 재발의됐다. 미국은 철강 생산에서 전기로 비중이 70%를 차지해 주요 철강 생산국 중 가장 낮은 탄소집약도를 나타내고 있다. 한국은 국내서 생산한 철강의 40%를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해외로 수출한다. 글로벌 탄소 관세 장벽의 확장은 수출 의존적인 국내 철강 산업계에게 눈 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전기로 확대와 함께 친환경 전력 조달을 위한 투자도 병행될 필요가 있다. 재생에너지 전력은 그린 철강의 필수 요소다. 최근 해외 주요 철강사들은 그린 철강 생산을 위해 재생에너지 전력을 조달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스웨덴 철강 기업인 SSAB는 2022년 기준 전체 전력소비량의 32%를 재생에너지로 공급했다. SSAB는 내년부터 저탄소 철강을 양산할 계획이다. 미국 철강사 US스틸의 경우 2022년 총 전력소비량 중 17%를 재생에너지로 조달했다. 반면, 포스코와 현대제철을 비롯한 국내 주요 철강사의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은 1% 수준에 불과하다.
산업계는 경기 악화 상황에서 전기요금 완화를 정부에 호소하고 있다. 산업용 전기요금을 인하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정부 설명에 따르면, 산업용 전기요금이 몇 차례 인상됐지만 여전히 원가 이하이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 대비 낮은 수준에 해당한다.
철강사들은 비싼 전기요금을 근거로 제철소에 자체 LNG(액화천연가스) 발전소 건설을 추진하면서 탄소중립 선언이 퇴색되고 있다. 현대제철과 포스코는 각각 8000억 원을 투자해 당진제철과 포항제철에 499MW와 600MW 규모의 신규 LNG 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한 허가를 진행 중이다. 저탄소 철강 생산 체계를 갖추기 위해서는 전력 공급에서 화석연료 대신 재생에너지 투자가 확대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업의 친환경 투자와 함께 정부 지원도 뒷받침될 필요가 있다. 산업부는 30만 톤 규모의 수소환원제철 연구개발(R&D) 프로젝트에 2030년까지 약 8800억 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환경부도 기업의 저탄소 혁신기술 도입을 지원하는 탄소차액계약제도(CCfD) 시범사업에 올해 100억 원을 지원할 예정이다. 산업의 탄소중립 이행과 경쟁력 확보를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독일과 일본을 비롯한 주요국 대비 재정 지원 규모가 낮다. 정부가 연구개발 지원을 넘어서 그린철강 상용 설비 도입으로 지원 범위와 규모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올해 출범할 새정부가 놓쳐선 안 될 중요한 과제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성장과통합' 명칭 내가 만들어...이재명의 이 약속 때문"
- 배민 본사의 수상한 움직임...홍준표·최상목 엉뚱한 소리만
- "극심한 혼란 발생" 헌재, 9인 전원일치로 한덕수 지명 효력정지
- 홍준표는 왜 수사 안하나
- 그날밤 '체포조' 역할분담은... "1조 이재명, 2조 한동훈"
- 서울과 대전을 공동 수도로... 박정희는 왜 김대중을 따라했을까
- 자신의 예상대로 사망한 뒤... 안타까운 결말
- [오마이포토2025] 김민석 최고위원, 한덕수 규탄 1인 시위
- "일상으로 돌아간 '응원봉'들, 공론장 준비중"
- 2015년, 2025년 두 번 역주행 한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