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술 검게 죽어 배꽃 99% 불임"…미친 봄날씨가 부른 악몽
" 난자가 없는데 정자를 아무리 찍어본들 어쩌겠어요. "
15일 경북 상주시 사벌국면의 한 과수원. 이미숙(54)씨는 하얗게 핀 배꽃에 꽃가루를 묻히면서 이렇게 말했다. 배꽃을 자세히 보니 가운데 암술 부분이 마치 불에 탄 듯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갑작스러운 봄 추위에 꽃이 마치 동상에 걸린 것처럼 피해를 본 것이다. 이 씨는 “30년 넘게 배 농사를 지었는데 배꽃이 이렇게 많이 얼어 죽은 건 올해가 처음”이라고 했다.
사벌국면은 전국에서 면 단위로는 배 생산량이 가장 많은 곳이다. ‘상주 배’의 절반이 이곳에서 난다. 이 마을에 재앙이 찾아온 건 지난달 말이었다. 30일 아침 기온이 -5.2도까지 기온이 내려가면서 꽃봉오리 속 암술머리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검게 녹아 버렸다. 이런 꽃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사벌국면은 전체 농가의 피해율이 90% 이상인 것으로 추산했다. 여기에 지난 13일부터 다시 기온이 급락해 서리가 맺히고, 눈발까지 날리면서 뒤늦게 핀 배꽃도 열매를 맺기 어려운 상황이다. 설사 열매를 맺더라도 기형과가 될 가능성이 크다. 박종욱 사벌국면장은 “보통 1년에 500억 원 규모의 배를 생산해 판매하는 데 올해는 10분의 1인 50억 원도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순식간에 여름서 겨울로 바뀌니 속수무책”
이성대 사벌농협 수출배 공선회장(62)은 “불임 배꽃이 99%에 달할 정도로 피해가 심각한 농가도 있고, 귀농해서 빚을 내고 배 농사를 하는 청년 농부들은 망연자실한 상태”라며 “순식간에 여름에서 겨울로 날씨가 바뀌다 보니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이어 올해도 기후 인플레이션 가능성
이상기후로 인한 작황 악화가 물가 인상으로 이어졌던 지난해의 악몽이 올해에도 되풀이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지난해 폭염과 폭우 등 기상이변의 여파로 과일과 채솟값이 폭등하면서 물가 상승의 주범으로 지목됐다. 배 가격은 생산량이 크게 줄면서 전년보다 71.9%가량 뛰었고, 귤(46.2%)과 사과(30.2%)도 높은 상승률을 보였다.
기후 전문가들은 특히 봄철 이상기후가 작황 부진으로 이어지면서 물가 상승을 유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온난화로 인해 과일나무의 꽃피는 시기가 빨라지면서 저온에 쉽게 노출돼 피해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수종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과거에는 온난화로 개화 시기가 빨라지면 농작물 생산성이 증가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봄 냉해 피해가 더 커지면서 오히려 생산성이 악화하고 있다”며 “농작물 생산량 감소는 밥상 물가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실화된 기후재난 피해 대책 시급”
정 교수는 “탄소를 감축하기 위한 정책도 중요하지만, 기후변화로 인해 이미 현실화 되는 농가 피해를 줄이고, 인플레이션에 대비하기 위한 기후 적응 대책이 정부와 국회 차원에서 우선적으로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상주=천권필 기자 fee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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