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아시아 안보정책의 거장 떠나다
“한·미 동맹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양국은 그래도 피와 땀으로 맺어진 동맹이고, 같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
지난 13일(현지시간) 별세한 리처드 아미티지 전 미 국무부 장관이 2018년 중앙일보·CSIS 포럼에서 했던 발언이다. 아미티지는 미국 내 대표적인 지일파로, 한국과도 인연이 깊었다. 국무부 부장관까지 지냈던 그가 퇴임 후 설립한 외교 전문 컨설팅회사인 아미티지 인터내셔널은 14일 그의 별세 소식을 전하며 사인을 패혈전증이라고 밝혔다. 79세. 동북아 역내 외교 중심추에 한·미 동맹과 미·일 동맹을 뒀던 아미티지는 중앙일보와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주최하는 포럼에도 자주 참석해 지혜를 나눴다.
그의 커리어 시작은 외교 아닌 군이었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베트남전쟁에 참전하며 아시아와 연을 맺었다. 미국에 돌아온 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와 조지 H W 부시 행정부에서 국방부 차관보를 지냈고, 이어 조지 W 부시 대통령 아래에서 국무부로 이동하며 외교관 모자를 썼다.
워싱턴포스트(WP)가 그의 별세 소식을 전하며 “외교관이라기보다는 해군 장교 같은 인물이었다”고 평한 배경이다. 군 출신다운 탄탄한 몸집을 두고 그는 사석에서 “내가 미국 외교의 얼굴은 아닐지 몰라도, 근육질은 되고 싶다”는 농담을 하곤 했다고 한·미 외교가에선 회자됐다. 그 외 외교력은 한국뿐 아니라 다수 국가가 인정했다. 영국·호주·뉴질랜드·일본은 물론 태국·바레인·파키스탄 정부가 그에게 훈장을 달아줬다.
국무부 부장관 재임 중이던 2001년 9·11테러 사건을 겪었던 그는 이후 부시 행정부가 주도한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 힘을 쏟았다. 이슬람 무장세력을 물밑 지원했던 파키스탄으로 가 최후통첩을 내린 일이 대표적이다. 고인은 김대중 정부 시절 대북 문제 등 한반도 관련 사안에도 깊이 관여했다. 부시 행정부는 김대중 정부가 표방한 ‘햇볕정책’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아미티지 역시 우려를 표하곤 했다. 그러나 네오콘 등 강경파와는 달리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하며 균형을 꾀하려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공화당 소속이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는 선을 그었다. 2016년 대선에선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지지할 정도였다. 2020년 1월, 트럼프 지지자들이 당시 트럼프의 대선 낙선을 인정 못한다며 의회에 난입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트럼프가) 테러리스트와 다를 게 뭐냐”며 비판했다.
아미티지는 국무부 내에선 정통 외교관과는 결이 다른, 직설적 화법으로 유명했다. WP는 “관료주의를 못 견뎌하고, 일의 성과를 빨리 내는 것을 중시하는 타입이었다”며 “국무부 2인자로서 직설적인 대화가 필요한 상황에서 해결사의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고인은 2000년부터 조셉 나이 하버드대와 교수와 함께 ‘아미티지·나이 보고서’를 여섯 차례 발간하며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지난해 4월 발간한 6차 보고서에선 일본 자위대 합동작전을 지휘할 새로운 합동작전사령부를 설립할 것과, 한국·호주를 포함해 주요 7개국(G7)의 확대 개편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담겼다. 6차 보고서 일부는 같은해 미·일 정상회담의 의제로 오르며 영향력을 입증했다. CSIS는 그에 대해 “아시아 안보 정책 분야의 거장이었다”고 평했다.
장윤서 기자 chang.yoonseo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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