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근의 세사필담] 외면당한 헌재의 경고

2025. 4. 15.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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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 석좌교수

얼어붙었던 마음 밭에도 봄이 왔다. 겨우내 움츠렸던 봄꽃이 마침내 망울을 터뜨렸다. 이런 풍경을 “나무 둥치 깊숙한 생명에의 열망이 내란을 일으켰다”고 표현했을 때 ‘내란(內亂)’은 시적 언어다. 그러나 현 정국을 휘어잡는 용어인 ‘내란’은 헌재 판결 후 가까스로 돋아나는 희망의 새싹을 후려친다. 내란은 종식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란 세력을 뿌리 뽑아야 한다! 얼마나 뎄으면 그럴까마는 이젠 대선 후보로 나선 이재명과 민주당 인사들은 저 비수 같은 언사와 망치질을 멈출 때가 됐다. 그 말엔 정작 내란을 발효한 적대감이 번득이고 차기 정권에서 또 다른 참사를 예고한다.

「 내란 종식 급하다는 민주당 논리
공동책임 적시한 헌재 경고 무시
내란 발효한 적대 정치는 그대로
내란 발생 구조를 없애는 게 개헌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가운데)이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인용 결정문을 낭독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오해하지 마시기를. 필자는 윤석열의 돌발적 행동에 기가 막혔고 헌재 판결에 안도하는 사람이다. 윤석열의 비상계엄은 국민 주권을 짓밟았다는 법적 증거가 차고 넘쳤다. “국민주권주의와 민주주의를 부정하고…국민의 기본권을 광범위하게 침해”했다는 헌재의 판결에 백 번 동의한다. 민주당이 내란죄를 일찌감치 빼버린 덕에 헌재 판결문에 ‘내란’ 시비는 언급되지 않았다. 정치적 용도가 훼손되지 않은 이 말은 이제 대선정국의 특명(特命)이 됐고 ‘내란 종식’은 국힘당을 대역죄인으로 몰아세우는 사화(士禍)의 명분으로 부상했다.

민주당은 이 특명 깃발에 따라 내란 ‘잔당 세력’의 척결에 돌입했다. 윤 정부 수사기관, 방통위원장, 방심위원장을 수사 대상에 올렸고, 내란행위자 처벌 특별법 제정 100만 서명운동에 들어갔다(조선일보 4월 10일자). 내란 특조위를 설치해 역모죄를 엄벌하자는 취지다. 출마를 선언한 이재명 후보의 대선 캠페인, 누가 이렇게 강력하고 장엄한 포효에 왈가왈부 대들 수나 있을 것인가.

헌재가 적시한 두 가지 경고를 무시한 처사다. ‘국회의 권한 행사가 권력남용이자 국정마비를 초래한 행위’라는 것, ‘국회는 소수 의견을 존중하고 관용과 자제,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결론을 도출했어야’ 했다는 것. 여기서 ‘국회’는 청구인 즉 민주당을 가리킨다. 한국정치와 국민을 수렁에 빠트린 넉 달의 극한 혼란, 윤정부 내내 얼룩진 적대 정치에 국회가 깊이 연루됐다는 그 판결은 어디로 증발했는가.

한국의 정당 정치는 궤도를 탈선했다. 대통령은 패거리 정치를 불사했고 집권당은 들러리에 불과했다. 그러니 야당의 칼끝은 언제나 대통령을 향할 수밖에 없었고 집권당을 무력화하는 일에 매진했다. 아이언 돔에 터지는 불꽃과 화염에 국민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여든 야든 정당의 내부 조직은 비민주적 행태 일색이었다. 정치생명을 반납하지 않고서 누가 우두머리에 시비를 걸 수 있을까. 비민주적 정당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살려낼까.

1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24회 국회(임시회) 제2차 본회의 정치외교통일안보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의원들이 언쟁을 벌이고 있다. 뉴시스

그러니 ‘내란 종식’이라는 수사(修辭)는 따져봐야 한다. 민주주의는 ‘정당 간 공정 경쟁’이자 ‘적과의 동침’임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유럽에서 보수당과 노동당은 계급의 적이다. 그러나 1920년대 이래 백년 간 경쟁 울타리 내에서 공존했다. 한국의 양당은 타협을 팽개친 지 오래다. 겨우 38년, 적대와 증오가 둘 사이에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필자가 썼듯이 ‘적대 정치의 공연장’이었다. 국민 주권을 위임받은 두 정당이 앙숙이 돼 갈라선다고 민복이 증대하는가. 어느 한쪽이 헌법을 무너뜨렸는데 다른 한쪽은 유발의 책임이 없는가?

헌재의 경고는 그게 아니었다. 한국 정치를 이 지경으로 몰아간 죄과를 정치권 전체가 치러야 한다는 것이 헌재의 주문이었다. 죄의 경중은 있겠지만, 스스로 면책할 수 없다. 국민은 알고 있다. 왜 윤석열이 미친 짓을 했는지를. 헌재는 입법 남발과 탄핵 폭풍을 견딜 수 없었다는 ‘피청구인의 판단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했다. 윤석열의 막무가내 정치가 민주당을 그렇게 끌고 갔고, 욕설과 막말로도 윤석열의 독선을 막지 못했다고 강변할 수 있겠다. 독선은 좌파정권도 어지간했다. 문재인 정권 당시 54조 원을 쏟아부은 최저임금법과 집값 폭등에도 스물네 차례나 밀어붙였던 주택정책을 생각해보라. ‘정의와 공정’으로 채색한 자신의 독선 중독증은 잊은 채, 탄핵과 욕설, 입법 독주로 치달았던 일체의 일탈 행위를 뼈저리게 반성하지 않고는 민주주의의 회생은 불가능하다. ‘내란 종식’은 양당의 동시 반성에서 출발한다. 무기력한 방조로 일관한 국힘당은 대선에 나설 자격이 없다. 민주당은 38년 전 민주화 당시부터 모셔온 혁명이념의 신줏단지를 내다 버리는 것이 급선무다. 적을 섬멸해야 혁명을 이룬다는 그 신념을 자신에게 먼저 적용해야 한다.

코앞에 닥쳐온 대선정국이 ‘87년 헌법’을 악용한 죄, 그래서 ‘87년 헌법’의 수명을 재촉한 정치권의 죄과를 삼켜버렸다. ‘내란을 개헌으로 덮는’ 것이 아니라 ‘개헌으로 내란 구조를 타파하는’ 것임에도 말이다. 너덜너덜해진 87년 헌법의 전면적 개헌으로 목욕재계하는 것이 우선이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왜 3일 만에 황급히 개헌을 철회해야 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 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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