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으로 피아노 연주하며 한 손으로 지휘....김선욱이 전한 베토벤의 위안
무대 가운데 피아노엔 덮개가 없었다. 마치 지휘자의 보면대를 확대한 듯했다. 그 앞에서 김선욱은 일어섰다 앉았다 하며 지휘와 피아노를 동시에 선보였다. 피아노를 둘러싼 오케스트라의 조화와 경쟁이 돋보인, 지난 7~8일 롯데콘서트홀에서의 공연이었다.

3년 만에 내한한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는 김선욱의 피아노와 지휘에 맞춰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 5곡을 연주했다. 이 공연은 벨기에에서 시작해 독일·프랑스·오스트리아에 이어 대전·대구·서울, 그리고 런던에서 마무리되는 연주여행의 일환이다. 김선욱과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 모두 베토벤을 전문으로 하는 피아니스트·지휘자와 악단이다. 이틀 동안 다섯 곡의 협주곡을 통해 그 궤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7일, 협주곡 1번 1악장의 긴 서주를 김선욱은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서 양손으로 지휘했다. 우아하고 역동적인 지휘 동작에서 틀에 가두지 않고 마음껏 풀어내는 여유가 느껴졌다. 김선욱이 의자에 앉아 건반을 두드리자 용수철 같은 탄력으로 해머가 피아노 줄을 쳤다. 베토벤의 박동감을 살리고 느긋하면서도 적재적소에 강렬한 맛을 더한 연주였다. 카덴차도 상쾌하게 이어졌다. 2악장은 느리고 유유자적했다. 적극적인 목관악기들과 어우러지는 고음의 건반이 빛났다. 3악장에서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는 베토벤의 혁신적인 성격을 구현했다. 여기에 김선욱의 진취적인 피아노가 만나 봄꽃처럼 만개했다.
협주곡 2번은 현악군에서 바람이 부는 듯하고 목관은 청신하게 울려 펴졌다. 피아노에서 만들어지는 소용돌이가 오케스트라로 퍼져나갔다. 지휘와 피아노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눈부신 카덴차를 이어갈 때도 보이지 않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것 같았다.

2악장에서 한 음 한 음 깊어지면서 천천히 몸을 움직일 때, 그 위로 진한 에스프레소 같은 오케스트라의 총주가 내려앉았다. 별밤 같이 아름다웠다. 오케스트라는 채도가 높은 색채를 냈고. 적당히 습기어린 김선욱의 피아노가 정적 속에서 빛났다. 쾌속인 3악장에서 김선욱은 루바토로 음악에 생동감을 부여했다. 경기필하모닉 예술감독 김선욱은 예전보다 훨씬 더 지휘자의 언어를 다양하게 쓰며 폭넓은 시야를 드러냈다.
협주곡 4번은 부드러운 도입부가 인상적이었다. 명료한 목관악기가 수려한 현악군과 분위기를 조성했다. 피아노 첫음부터 관객들은 곡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김선욱은 오른손을 피아노에서 떼지 않고 왼손을 들어 지휘했다. 목관악기와 대화를 나눈 뒤 파도처럼 건반을 훑었다. 자애로운 피아노의 표현에 목관이 정중하게 화답했다. 카덴차는 다이내믹 레인지가 상당히 컸고 피날레는 장엄했다.

2악장은 엄정한 오케스트라와 여린 피아노가 운명과 인간의 대립을 그리는 듯했다. 강렬하게 몸부림치는 피아노는 극적인 효과를 더했다. 격조 있게 시작한 3악장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피아노에 현과 관이 어우러졌다. 내추럴 트럼펫과 팀파니의 강렬한 연주 속에서 김선욱은 오른손을 들고 지휘하는 상태에서 카덴차를 시작했다. 쏟아지는 환호 속에서 단원들은 김선욱의 기립 요청을 거부하며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했다.
8일, 협주곡 3번은 빠르지 않은 템포였지만 강약의 강조가 확연하고 굽이가 뚜렷했다. 피아노는 질풍노도와 서정성 사이를 오갔다. 또렷하고 설득력 있는 타건은 연약한 인간과 초인 사이의 어딘가였다. 두꺼우면서도 투명한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의 균형 잡힌 음색도 귀에 쏙 들어왔다. 카덴차는 극적이고 피날레는 벅찬 감동을 줬다.
2악장은 내면을 털어놓듯 감동적인 피아노와 그 위를 밀물처럼 감싸는 오케스트라에서 원숙함과 고매함이 느껴졌다. 바순과 플루트가 피아노를 받아 연주하는 부분은 위안을 주었다. 감정선을 최대한 늘려서 표현할 때, 오케스트라가 침묵하며 기다려주는 순간에서 지휘와 피아노가 일치된 협주곡의 장점이 드러났다. 3악장은 경쾌한 템포로 팀파니 타격음과 잘 어우러졌다. 쏟아질 듯 과감한 총주에서 규칙적이면서도 규칙을 깨는 베토벤의 특징이 감지됐다.

협주곡 5번 도입부의 장대한 총주는 따스하고 끝이 둥글었다. 점점 더 커지는 관현악과 매끄러운 피아노 독주가 교차했다. 호른은 뭉근하고 따스했다. 음량이 커질수록 음색은 환해졌다. 목관과의 대화 이후 피아노는 셈여림을 조절했다. 오른손이 고음부로 상승할 때 왼손의 저음이 탄탄하게 지지했다. 2악장은 더블베이스의 피치카토에 조용히 스며드는 듯 스트링이 깔리고 피아노의 독백이 눈부셨다. 지나온 과거를 보는 따스한 시선은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른 팝송 ‘마이 웨이’의 정서와 닮아 있었다. 한 음 한 음이 수정처럼 투명했다. 한두 방울 떨어지다 소나기 같아지는 3악장에서 김선욱의 피아노는 약간 서두르듯 빠른 템포를 유지했다. 경쾌하게 비상하는 힘과 투명한 타건이 계속 유지됐다.
김선욱은 뒤로 갈수록 힘이 남아도는 듯했다. 들으며 위안과 힘을 얻는 베토벤 음악의 효용은 이번에도 입증됐다.
글 류태형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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