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에서 무장봉기 준비한 한국인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5. 4. 12.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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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외전] 1944년 9월 28일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검거된 문종달

[김종성 기자]

 1918년 삿포로
ⓒ 위키미디어 공용
일제강점기에 중국이 아닌 일본 땅에서 무장봉기를 준비한 한국인들이 있었다. 이들이 추진한 일은 식민지 한국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일본제국주의가 가장 막강했던 곳은 다름 아닌 일본 땅이다. 일제의 민중 동원에 가장 직접적으로 노출된 곳도 그곳이다. 그래서 일본인도 봉기하기 힘들었던 그곳에서 객지인인 한국인들이 무기를 드는 것은 더욱더 어려웠다. 그런데도 그것을 시도한 재일한국인들이 많았다. 1944년 9월 28일 홋카이도섬 삿포로에서 검거된 문종달과 김갑순·김정협·장복성은 그중 일부다.

문종달 등이 봉기를 준비한 홋카이도는 한국보다 먼저 일본에 강점됐다. 아이누족의 땅인 이곳은 유구왕국(오키나와)보다 10년 빠른 1869년에 병합됐다.

작년 9월에 <동방학지> 제208집에 수록된 히라노 가쓰야 UCLA 교수의 논문 '주권과 무주지 – 홋카이도 정착식민주의'는 일본의 식민지배 논리가 최초로 적용된 무대라면서 홋카이도의 역사를 설명한다. 논문은 '자국은 주권국가이고 유럽 이외의 약소민족 땅은 주인 없는 무주지'로 간주하는 서양제국주의의 논리가 일본에 의해 응용된 것을 언급하면서 "이 식민지주의가 처음 실행된 곳은 아이누 모시리(홋카이도)였다"고 말한다.

홋카이도는 식민지로 전락한 아이누족의 한이 서린 곳이다. 그런 섬에 문종달이 나타난 때는 1943년 7월이다. 국가보훈부의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제3권에 수록된 일본 내무성 정보국 특별고등경찰자료는 이때 문종달이 홋카이도철도공업주식회사의 토목 노동자로 입사했다고 말한다.

특별고등경찰자료에 따르면, 1944년에 문종달은 26세이고 본적은 충남 대덕군 기성면 도안리다. 홋카이도철도공업에 들어간 뒤 반자(飯場)라는 합숙소에 기거한 그는 자신이 항일투쟁으로 기울게 된 것은 민족차별 때문이라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도항 전의 예상과는 달리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차별적 모욕과 노무관리, 그중에서도 식량 기타 모든 물자의 부족 등을 체험함에 이르러 민족의식이 점차 치열"해졌다고 진술했다.

그는 식량 문제에서도 차별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이런 차별은 대부분의 재일 한국인이 흔히 겪는 일이었다. 먹는 것 갖고 차별하는 일은 음식값을 받는 식당에서도 일어났다.

일본에서 경험한 차별

작년 8월 7일 개봉한 이원식 감독의 <조선인 여공의 노래>는 오사카의 한국인 직공들이 식당 주인들의 노골적인 차별 때문에 휴일에 외식을 하기도 힘들었다고 말한다. 한국인 손님을 손님으로 대하지 않고 '조센징'으로 대하는 식당 주인도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오사카의 한국인 여성 직공들은 일본인들이 못 먹겠다며 쓰레기통에 내다 버린 육류 내장을 주워서 구워 먹는 데 익숙해졌다. 다큐와 극이 가미된 위 영화에는 한국인 여성 셋이 물가에서 육류 내장을 구워 먹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쓰레기'를 의미하는 호루몬으로 불리게 된 이 음식을 지금은 일본인들도 좋아한다고 한다.
 <조선인 여공의 노래>의 한 장면
ⓒ 영화제작소 정감
일본에서 경험한 차별은 문종달을 각성시켰다. "이들 차별 대우를 철폐하고 조선인의 참된 자유·행복을 도모하려면 조선이 일본 통치지배로부터 이탈하여 조국을 광복시키는 길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라는 판단을 하게 됐다고 특별고등경찰자료는 말한다. 일본 수사관들 앞에서 자신의 동기를 툭 터놓고 말했던 모양이다.

그는 식량 차별이 한국인 멸시 풍조뿐 아니라 일본의 경제 사정에도 기인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러한 물자 부족은 국력의 약화를 폭로"한다는 생각에 도달한 그는 이를 활용해 일본 땅에서 봉기를 일으키자고 결심하게 됐다. "이 기회를 틈타 조선인이 단결하여 일거에 봉기하면 반드시 목적 달성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위 자료는 말한다. 그냥 먹고 살기 힘들어 봉기를 계획했다고 말하지 않고, 극형에 처할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용감하게 진술했던 듯하다.

문종달은 홋카이도철도공업에 들어간 지 10개월 되는 1944년 5월부터 행동에 착수했다. 토목 공사장의 한국인들을 규합하고, 수시로 비밀 집회를 열었다. 그의 핵심 동지는 충남 대덕군 구칙면 문지리 출신의 김갑순(21), 전북 부안군 향산면 거룡리 출신의 김정협(21), 충남 서산군 운산면 용장리 출신의 장복성(41)이었다.

충남과 전북 출신들이 주도하는 이 조직이 전개한 항일 선전전에서는 크게 세 가지가 강조됐다. 일본 경찰이 요약한 바에 따르면, 첫째는 "조선에는 3천년의 역사가 있어서 풍속 습관이 고유하여 독립국을 유지해왔다. 우리들은 결코 이를 잊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었다.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인해 단군왕검 이후의 반만년 역사에 친숙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다음은 장복성을 제외한 문종달·김갑순·김정협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 혹은 태어나기 얼마 전에 있었던 1919년 3·1운동과 관련된 것이었다. "조선독립만세사건은 한일합병에 의해서 일본이 조선민족을 멸시하고 차별한 데에 분개하여 정치인·지식인·학생 할 것 없이 거족적으로 독립만세를 외친 것인데, 혹은 중국 등지로 망명의 길을 떠나고 혹은 검거되어 이 운동은 일시 중단되었으나, 우리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함에는 어떠한 애로와 난관이 있어도 어디까지나 끈질기게 단행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3·1운동을 뛰어넘는 항일투쟁을 벌이자고 역설했던 것이다.

마지막은 "우리 민족 가운데에는 위대한 인물도, 두뇌가 뛰어난 인물도 많이 있으나 다만 의견 일치가 되지 않아서 독립운동에 지장이 되어왔다. 그러므로 금후에는 최선의 힘을 다해서 단결을 강화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것이었다. 3·1운동의 결과로 그해 4월 11일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지만 내부 분열로 인해 약화의 길을 걸은 데 대해 자성의 마음을 갖자고 역설한 것이다.

일본 경찰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송치

토목 현장에서 만난 이들은 노동쟁의가 아닌 무장봉기 방식으로 항일투쟁을 준비했다. 틈만 나면 은밀한 선전전을 전개하고 회합을 가졌다. 노동자인 이들이 과연 그 같은 봉기를 성사시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일본 경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본 경찰은 재일 한국인들이 그런 봉기를 일으킬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우려했다.

특별고등경찰자료에 실린 1944년 1월 14일 자 경찰부장 회의 설명자료에 따르면, 회의에 참석한 보안과장은 재일한국인이 170만 명을 넘는다면서 이들이 대개 다 시의심(猜疑心)을 품고 있다고 지적했다. 시의심은 한국인들의 독립정신을 시기심이나 질투심으로 폄하할 때 사용하던 표현이었다. 보안과장은 재일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시의심이 강하고 또 일본에 대한 복수적 정신이 농후"하다고 평했다.

그런 시의심을 품고 1939년 한 해 동안 일본인과 충돌한 재일 한국인은 4140명이었으며, 이 숫자가 1942년에는 1만 6006명, 1943년에는 상반기 동안에만 9661명이었다고 보안과장은 보고했다. 그중에서 치안유지법(국가보안법) 위반자는 1942년에 168명, 1943년에 192명이었다는 언급도 나왔다. 그는 한국인들이 이런 저항도 시도하고 있다고 브리핑했다.

"형사사범의 성질도 점점 모략적으로 되어서 개중에는 미국의 일본 본토 공습을 기대하고 공습 시의 혼란을 타서 악질적인 유언을 유포하여 일반 조선인의 단결을 도모하고 이를 폭력 봉기로 유도하여 방공·방화·수송 등을 방해하기 위한 용수 기타 방공 제(諸)설비, 수송기관의 파괴를 기도하고 혹은 공습의 효과를 보다 크게 하기 위하여 민가에의 방화를 획책하고 있는 자가 있다."

한국에서 무장투쟁을 하는 한국인들은 식민체제를 파괴하고 독립국가를 창조하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한 에너지 분산이 불가피했다. 이와 달리 일본에서 무장투쟁을 준비하는 한국인들은 주로 파괴에만 신경을 쓰면 됐다. 그래서 일본 국가권력이 볼 때는 한반도 한국인들보다 재일한국인들의 무장투쟁이 더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일본 경찰이 홋카이도철도공업주식회사 토목 현장에서 틈만 나면 동료 한국인들에게 접근하는 문종달을 위험시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일본 경찰은 치안유지법 위반이란 결론을 내려 그를 검사국에 송치했다.

문종달이 법원에서 어떤 판결을 받았는지는 위 경찰 자료나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에 나타나지 않는다. 일본체제의 변혁을 목적으로 선전전을 벌인 그의 투쟁은 1944년 당시의 치안유지법에 따르면 1년 이상 10년 이하 징역에 처해지는 행위였다.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3·1운동을 뛰어넘는 무장봉기를 준비했던 그의 이름은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 명단에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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