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이름까지 팔아서... '이완용 며느리 고소 사건'의 전말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5. 4. 6.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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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병주

[김종성 기자]

 이완용 가족 사진. 앞줄 가운데가 이완용, 뒷줄 가운데가 이항구. 앞줄 왼쪽이 이병주, 뒷줄 왼쪽이 이병길이다.
ⓒ 이완용 평전
이완용 가문은 지금은 가장 불명예스러운 집단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최고의 명문가였다. 물질적으로도 상당히 풍족했다. 이완용 사망(1926.2.11) 9개월 전에 나온 1925년 5월 8일 자 <조선일보>에 "당대의 유수한 부자로 세상이 다 인뎡하는 리완용 후작과 그의 아들 리항구 남작"이라는 문구가 있다. 당대의 손꼽히는 부자 집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집안 사람들이 어음 사기 혐의로 언론에 오르내리는 일이 있었다. 1931년 11월 8일 자 <동아일보>는 이완용의 손자인 이병주가 연루된 어음 사기 사건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김합(金峇)이라는 고소인은 이완용의 상속인인 후작 이병주가 배서했다는 어음을 담보로 1930년에 약 8000원을 빌려줬다. 꿔간 사람은 이완용의 며느리이자 이항구의 부인인 김진구다. 김진구는 아들 이병주가 할아버지 이완용의 후작 지위를 상속했다며, 아들의 이름이 적힌 어음을 김합이라는 여성에게 내밀었다. 아들을 보증인으로 내세운 셈이다.

그해 11월 12일 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통영제망주식회사 제사부(製絲部)에서 조수의 보조를 받는 남자 노동자는 오전 5시 30분부터 오후 6시를 넘어서까지 일했다. 점심시간이 15분밖에 안 돼 그의 노동 시간은 12시간을 넘겼다.

숙련 기술자로 보이는 그가 중노동을 하고 벌어들이는 월수입은 25원이 좀 안 됐다. 10원도 못 버는 노동자가 숱했음을 고려하면, 그는 노동 강도가 세기는 해도 월급은 괜찮은 편이었다. 그런데 이완용의 며느리가 빌린 약 8000원은 이 기술자가 점심밥을 15분 내에 먹어 치우는 생활을 26년 넘게 해야 모을 수 있는 돈이었다.

김진구는 이 돈을 한 번에 빌리지 않고 1931년 1월부터 여덟 차례에 걸쳐 빌렸다. 그때마다 뒷면에 아들 이름이 적힌 어음을 내밀었다. 그래서 김합의 머리에는 '후작 이병주'가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이완용 며느리'의 속임수

김진구는 변제기한이 지나도 돈을 갚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이 든 김합은 이완용 집안의 호적을 열람했고, 이병주가 이완용의 손자인 것은 맞지만 후작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점도 고소 사유에 추가됐다. 채무자가 돈을 갚지 않는 것도 문제가 됐지만, 보증인의 지위와 경제력이 채무자의 말과 다른 것도 문제가 됐다.

후작은 공·후·백·자·남의 제2위였다. 일본이 대한제국 강점 직후에 은사금 지급 대상자로 선정한 친일 귀족 78명 중에서 공작은 2명이고 후작은 박영효를 비롯한 6명이었다. 이완용은 백작 3인에 포함됐다. 후작의 지위가 높고 희소성도 있었으니, 큰돈 굴리는 김합이 '후작 이병주'의 실존 여부조차 체크하지 않고 8000원을 빌려준 것은 부주의한 일이었다.

1920년대 중후반에는 친일 귀족들의 파산 사례가 많았다. 3·1운동으로 위축된 그들 상당수가 정치적 역할을 찾지 못한 채 도박 등에 재산을 탕진한 결과였다. 그랬기 때문에 1930년 당시의 사채시장에서는 친일 귀족들에 대한 정보가 많이 나돌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김합이 실수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보증인이 누구든 간에, 돈을 빌리는 사람이 이완용의 며느리였다. 이에 더해, 김합의 착각과 부주의를 조장할 만한 상황도 존재했다.

이완용은 죽기 6년 전인 1920년에 후작으로 승격됐다. 이 작위는 이완용 사후에 장손 이병길에게 세습됐다. 장남 이승구는 1905년에 사망했다. 이병길은 이승구의 친아들이 아니라 이승구의 동생인 이항구의 장남이었다. 후계자가 없는 이승구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이승구의 조카가 사후양자로 입적됐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항구의 차남인 이병주는 이항구의 법적 장남으로 살게 됐다.

이항구는 이완용 생전에 남작이 됐고, 이완용 사후에도 남작으로 살았다. 이승구는 오래전에 죽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사람들이 볼 때는 이항구가 이완용의 장남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이완용의 장남처럼 비쳐지던 이항구의 남작 작위는 이항구 사후에 이병주에게 세습됐다.

1930년 당시에 이완용의 며느리는 '후작 이완용의 장남으로 보이는 이항구가 이완용 사후에 남작으로 활동하는 상황'과 '후작 이완용이 죽었으니 후작 작위가 자손 중 누군가에게 계승되지 않았겠느냐'라는 관념을 결합했다. 그는 '후작 작위가 이항구의 아들인 이병주에게 넘어갔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이를 토대로 김합에게 어음을 내밀었다.

'이완용 아들'로부터 작위 계승하더니... 결국 일본 국적 취득
 1931년 11월 8일 자 <동아일보> 2면 좌하단은 이완용의 손자인 이병주가 연루된 어음 사기 사건을 보도했다.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이완용 재산환수소송을 벌여 물의를 일으킨 이윤형은 이항구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백부 이승구의 아들로 입적된 이병길의 아들이다. 이윤형은 이병주에게 조카가 된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2권은 이병주(李丙周)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다.

진상규명위원회는 "이병주는 1945년 3월 6일 남작 이항구가 사망함에 따라 1945년 6월 1일 조선귀족령에 의거하여 남작의 작위를 계승하였다"라고 한 뒤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계승한 이병주의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호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행위'에 해당한다"라고 판단했다. 한국 강점에 기여한 공로로 부여되는 일제 작위를 계승해 특권을 받은 사실이 이병주 친일 행위의 핵심이었다.

그가 작위 계승을 거부했다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작위를 받아들였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됐다.

이항구의 작위를 세습한 이병주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진상규명위원회의 태도는 1948년에 제정돼 국회 반민특위의 활동 근거가 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의 규율 태도와도 부합한다. 이 법 제4조 제1호는 "습작한 자"에 대해 10년 이하 징역이나 15년 이하 공민권 정지와 함께 재산 전부 혹은 일부의 몰수를 선고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반민법은 작위 계승자의 구체적 친일행위를 입증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일제 귀족 작위의 무게를 고려한 규정이다. 이에 따라 반민특위는 이병주를 입건했다. 1949년 7월 28일 자 <조선일보>는 그가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를 받다가 그달 27일 반민특위 특별검찰부에 송치됐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의 반민특위 청사 공격(6.6)으로 친일청산의 동력이 훼손된 뒤였기 때문에 송치 처분은 별 의미가 없었다. 그해 9월, 그는 죄는 있지만 기소는 않겠다는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다.

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2권에 따르면, 이병주는 1935년 4월 현재 귀족학교인 도쿄 가쿠슈인(학습원) 고등과에 재학 중이었다. 보고서에 인용된 조선신문사의 <조선인사 흥신록>에 의하면, 이 당시 이병주는 이항구 남작의 후계자 지위에 입각해 종5위의 서위(敍位)에 매겨져 있었다. 작위를 승계한 것은 1945년이지만, 이미 10년 전부터 작위에 수반되는 서위를 받고 특권을 향유했던 것이다.

예비 남작 이병주의 생활은 이완용·이항구 부자의 친일 재산에 기초했다. 일제강점 3년 뒤인 1913년에 출생했으니, 태어나는 순간부터 친일재산을 향유한 셈이다. 그는 일본에서 돌아온 뒤인 1939년 10월에 합자회사 부영기업사의 대표가 됐다. 유학을 마친 직후에 사업을 시작했으니, 집안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사업 밑천 역시 친일 재산으로 추정될 수밖에 없다.

가장 대표적인 친일파의 손자로 태어나 친일 이익을 향유하며 살다가 귀족 지위를 승계했으니, 반민특위가 그를 입건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는 반민족행위자로 낙인찍힌 일로 인해 주눅 들지 않았다. 1950년 총선 당시 대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고 알려져 있다.

친일파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인해 주눅 들지 않은 그는 49세 때 바다를 건넜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이항구 편은 이병주가 "1962년 6월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고 알려준다. 일본 정부는 그를 환영했고 그는 당당하게 생활 보장을 요구했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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