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한 말년 가감 없이 공개한 할리우드 악동, '탑건' 남기고 잠들다
[이준목 기자]
"넌 아직도 위험해. 하지만 내 윙맨이라면 언제든지 시켜주지(You can be my wingman)", "웃기고 있네, 네가 나를 지켜주는 거지" 영화 <탑건> 에서 주인공 매버릭(톰 크루즈)과 그의 최대 라이벌, 톰 카잔스키 (발 킬머)가 주고받는 명대사다.
'윙맨'은 공군에서 편대비행을 할 때 선두에 위치한 비행기를 측면에서 엄호하는 역할을 일컫는다. 윙맨을 맡긴다는 것은 목숨이 오가는 공중 전투에서 '언제든 내 뒤를 맡기고 지켜줄 수 있는 존재'로 여길 만큼 신뢰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영화 내내 티격태격하던 두 라이벌이 말미에 결국 서로를 인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기싸움이 오가는 대사 직후 두 사람이 환하게 웃으며 서로를 뜨겁게 포옹하는 장면은, 지금까지도 영화사에 '남자들의 우정'을 상징하는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탑건>을 통하여 1980-90년대 할리우드 스타로 명성을 떨쳤던 배우 발 킬머(Val Edward Kilmer)가 별세했다. <뉴욕타임스> 등 미국 현지언론들은 1일(현지 시각) 킬머가 로스앤젤레스(LA)의 자택에서 폐렴으로 별세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향년 65세, 킬머는 지난 몇 년 동안 인후암을 앓고 투병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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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 발킬머가 1일(현지시간) 로스앤젤레스에서 6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
| ⓒ 연합뉴스/AP |
1986년 개봉한 <탑건>은 전투기 조종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미국 액션 영화의 고전으로, 킬머를 처음 전 세계적인 스타덤에 올린 작품이기도 하다. 여기서 킬머는 주인공 매버릭의 라이벌 조종사인 톰 카잔스키 역을 맡아 '아이스맨' 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냉철하고 원칙적인 에이스 조종사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 내며 주연 톰 크루즈에 밀리지 않는 매력적인 존재감을 발산했다.
훗날 밝힌 바에 따르면 킬머는 처음에는 <탑건> 출연을 그리 내켜 하지 않았고 영화사와의 계약으로 어쩔 수 없이 출연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는 뜻밖에 기대 이상 대박을 터뜨렸고, 킬머도 아이스맨 캐릭터에 매우 만족하여 이후로도 깊은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발 킬머는 여러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거장 감독들의 작품에 출연하여 스타급 배우로 성장했다. 론 하워드 감독의 판타지극 <윌로우>, 뮤지션 짐 모리슨의 일대기를 다룬 <도어즈>. 서부액션극 <툼스톤>, 로버트 드 니로-알파치노와 협업한 갱스터극 <히트>, 변장에 능한 도둑으로 분한 <세인트>. 유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배트맨 포에버>, 시각장애인으로 분한 로맨스 영화 <사랑이 머무는 풍경>. 아프리카의 식인 사자 사냥 실화를 다룬 <고스트 앤 다크니스> 등은, 국내 팬들에게도 친숙한 전성기 킬머의 대표작들로 꼽힌다.
젊은 시절의 킬머는 매력적인 외모에 연기력과 가무 실력까지 겸비한 다재다능한 배우로 꼽혔다. <비밀특급>과 <도어즈>에서는 노래와 퍼포먼스 등을 모두 직접 소화하기도 했다. 또한 필모그래피를 보면 로버트 드 니로, 알파치노, 마이클 더글러스, 댄젤 워싱턴, 말론 브랜도 등 당대의 쟁쟁한 스타나 연기파 배우들과 함께 공연한 작품이 많음에도 연기력에서 밀리지 않고 자신만의 존재감을 각인시켰을 정도였다. 또한 1990년대 중반에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배우중 하나였다.
하지만 개성이 강한 괴팍한 성격과 잦은 기행으로 인하여 '할리우드의 악동(Bad boy)'으로 불리며 전성기가 오래 가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킬머는 촬영에 자주 지각하거나 일정을 어기는 경우가 잦았고, 연기에 대한 고집도 강해 주변과 자주 충돌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기분에 따라 단답형으로 답하거나 불친절한 경우가 잦았다.
특히 함께 작업한 감독들과 불화설에 자주 휘말렸다. 대표적으로 <배트맨 포에버>를 함께한 조엘 슈마허나 < 닥터 모로의 DNA >에서 협업했던 존 프랑켄하이머 감독 등은 킬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여 두 번 다시 함께 작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정도였다. 이들 모두 영화계에서 손꼽히는 거물급 감독들이다보니 킬머에 대한 평판은 더 악화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40대를 넘기며 외모가 급변하며 섭외가 크게 줄어들었고, 커리어 후반기로 갈수록 출연작의 선구안도 좋지 않아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악평이 속출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할리우드에서 발 킬머는 그야말로 '몰락한 스타의 전형'처럼 취급받으며 연기 활동보다는 가십 언론의 놀림감으로 더 자주 다루어졌을 정도다.
다만 여기에는 상반된 평가도 공존한다. <탑건> 시리즈에서 공연한 톰 크루즈를 비롯하여 <히트>에서 함께 작업했던 마이클 만 감독과 대선배 로버트 드 니로, <사랑이 머무는 풍경>을 함께했던 어윈 윙클러 감독과 상대역 미라 소르비노, <고스트앤 다크니스>의 공동주연 마이클 더글러스 등은 모두 "킬머의 프로폐서널함과 대인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며 호평한 바 있다. 할리우드에서 도는 나쁜 소문만 듣고 킬머에게 선입견을 품었던 배우나 스태프들이 직접 만난 후에는 생각이 바뀌었다는 인터뷰도 많았다. 그만큼 상대에 따라 호불호가 분명하고 자기 세계가 뚜렷한 킬머의 성향을 보여주는 일화다.
긴 투병생활
킬머는 지난 2014년부터 후두암에 걸려 장기간 투병생활을 하게 됐다. 2021년에 겨우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기관절개술을 받으며 본래의 목소리를 잃고 배우에게는 치명적인 핸디캡을 안게 됐다. 또한 긴 투병으로 외모도 급격한 노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의지만은 꺾이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못했지만 킬머는 투병 기간에도 < 1st Born >·<시네마 트웨인>·<솔져스 리벤지>·<블랙머니> 등 여러 작품에서 비중과 대사가 적은 조연도 마다하지 않으며 꾸준히 연기활동을 이어갔다.
2021년에는 본인의 인생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 발(Val) >에 출연했다. 여기에는 킬머 본인의 취미인 홈 비디오 촬영으로 직접 기록해 놓은 가정사와 출연작 오디션 테이프, 리허설 현장, 무대와 촬영장 뒷모습 등 방대한 내용들이 담기며 킬머의 연기인생 전반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킬머는 여기서 자신의 흑역사라고 할만한 <배트맨 포에버>와 < 닥터모로의 DNA > 불화설의 뒷이야기, 서면으로 이혼 통보를 받았던 전 아내와의 일화, 심지어는 인후암 투병으로 전성기의 목소리와 외모를 잃고 힘겹게 생활하는 초라한 말년의 최근 모습들까지 가감 없이 드러냈다.
한때 잘나갔던 스타 배우로서 부끄럽거나 자존심이 상할만한 내용도 굳이 감추지 않고, 연기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며 매 순간 치열하고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킬머의 모습은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대사를 소화하기 위해 목소리를 인공지능으로 복원했고, 팬사인회에서 참석해서는 투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와중에도 여전히 자신을 기억해주는 팬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휠체어에서 일어나려는 장면 등은, 그의 과거 전성기 출연작들의 명장면과 겹치며 팬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과거 출연작 이미지나 가십성 소문만 듣고 킬머에게 선입견을 가졌던 대중들도, <발>을 통해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다시 봤다는 평가도 많았다. <발>은 미국의 대중문화 시상식인 크리스틱 초이스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 부문 2관왕을 수상하기도 했다.
2022년에는 자신의 출세작 <탑건>의 36년만의 후속작인 <탑건, 매버릭>에 같은 배역으로 우정출연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탓에 킬머는 극 중에서도 후두암에 걸린 설정으로 출연했고, 대사는 대부분 컴퓨터 타이핑으로 처리해야 했다. 이로 인하여 제작진은 처음엔 킬머의 출연을 망설였지만, 킬머는 후속작 제작 소식을 듣자 <탑건> 시절 자신의 모습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채로 셀카를 찍으면서 출연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주연 톰 크루즈도 "아이스맨이 없는 탑건은 상상할 수 없다"며 킬머의 출연을 적극 지지했다고 한다.
<매버릭>에서 킬머는 비록 출연분량은 많지 않지만 전작과의 중요한 연결고리이자, 주인공을 가장 잘 이해하는 든든한 조력자로 등장한다. 극 중에서 카잔스키가 힘겹게 대사를 이어가며 "해군엔 매버릭이 필요하다. 그래서 내가 자네를 위하여 싸웠고, 자네가 아직도 여기 있는 거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자네와 나, 누가 더 나은 조종사인가"라는 대사들은 전작에서 이어지는 주인공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배우 발 킬머 본인의 자전적인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하며 여러모로 팬들의 심금을 울린다.
킬머는 그의 극 중 명대사처럼 영화 내에서 주인공과 메인 스토리를 든든히 뒷받침하는 '윙맨'의 역할을 수행해내며 시리즈 올드팬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또한 극 중에서 결국 아이스맨은 세상을 떠나는데, 몇 년후 실제로 발 킬머도 별세하면서 <매버릭>은 그의 유작으로 남게 됐다. 발 킬머 연기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과 마지막 순간을 모두 <탑건> 시리즈와 함께한 셈이 됐다.
발 킬머는 생전에 <탑건>과 <배트맨>·<히트> 시리즈의 후속작이 제작된다면 다시 출연하고 싶다고 할 만큼 마지막 순간까지 연기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은 배우였다. 비록 킬머의 소망은 못다 이룬 꿈이 되었지만, 그 열정의 흔적만큼은 배우가 남겨 놓은 작품들을 통하여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대중들에게는 한 배우의 전성기와 쇠락, 투병과 재기로 이어지는 입체적인 여정을 함께 지켜보면서 먹먹한 여운을 남기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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