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명 '밥줄' 책임지는 최고경영자의 “잘록한 허리"만 보이나요

이주연 2025. 4. 3.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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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여락실-국내편] 호텔신라 주총 기사 36건 중 16건 '이부진 패션' 집중 부각

거상 김만덕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이름이 오른 여성 리더입니다. 부모를 잃고 힘겹게 살았지만, 혼자 힘으로 사업에 뛰어들어 부를 쌓았고, 이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눈 삶의 가치가 실록에도 남게 된 거죠. 그가 처했던 상황, 문제의식 그리고 걸어왔던 길은 지금과도 통합니다. 유리천장은 아직도 튼튼하니까요. '오늘의 김만덕 이야기'를 매주 전합니다. <편집자말>

[이주연 기자]

호텔신라 주주총회가 지난달 20일 열렸다. 주주총회는, 회사의 주주들이 모여 회사의 중요한 사안에 대해 논의하고 의결하는 주요 회의다. 법적으로 필수적이며 회사의 연간 재무제표 승인, 이사 선임 등의 핵심 안건을 처리한다. 주주총회는 회사의 주주들이 모여 회사 경영에 대한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리이기도 하다.

이날 주총에서 주목했어야 하는 점은 호텔신라의 '부진'이다. 지난해 면세점에서만 697억 원의 영업손실이 발생한 상황. 3조 9475억 원의 매출을 달성해 전년 대비 매출은 늘었지만 면세점으로 인해 영업이익은 – 52억 원, 당기순이익도 – 615억 원을 기록했다.

이는 주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 때 목표가가 7만 4000원이었던 호텔신라 주가는 4만 원 선을 넘지 못한 게 벌써 수개월째다. 호텔신라 발행 주식 수는 3924만 8121주, 시가총액은 1조 5000억 원이다. 호텔신라 주식 보유 주주들에게 주주총회는 매우 중요한 자리임이 자명하다.

실제, 호텔신라는 이날 주총에서 '종합휴양업'과 '콘도미니엄 분양·운영업', '노인주거·여가복지 설치 및 운영사업'을 사업목적에 추가하는 내용의 정관 변경 안건을 통과시켰다. 면세사업 적자를 실버산업으로 메꾸어 보겠다는 포석으로 읽힌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노인주거·여가복지 설치 및 운영사업이 실질적인 호재로 이어질지 주목해야 할 테지만 일부 언론은 다른 곳에 집중했다.

"호텔신라에서 주주총회가 열릴 때마다 주총 안건보다 더 관심을 받는 건 이부진 사장의 패션이다." (한국경제, 3월 23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20일 서울 중구 호텔신라 장충사옥에서 열린 정기 주주총회에 참석한 뒤 주총장을 나서고 있다.
ⓒ 연합뉴스
36건 주총 기사 중 16건이 '이부진 패션' 주요하게 다뤄... '한편'으로 적힌 주총

이 같은 추세는 비단 한 언론사에 국한되지 않았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운영하는 뉴스 빅데이터 분석시스템 '빅 카인즈' 분석 결과, 주총 직후 '이부진'으로 검색되는 기사는 총 36건(포토뉴스 제외)였다. 이 중 '이부진 패션'을 주요하게 다룬 기사는 총 16건에 달했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올해 주주총회에 '돌체앤가바나' 검은 원피스를 입고 등장했다. 재계 패셔니스타로 불리는 이 사장의 옷차림은 '올드머니룩'의 정석으로 평가된다." (문화일보, 3월 20일)

이부진 호텔신라 회장의 패션을 다룬 기사들 대다수는 주주총회 내용을 '한편'으로 다뤘다. 심지어 주총에서 다뤄진 안건 등은 단 한 줄도 들어가지 않은 다음과 같은 기사도 있었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의 '주총 패션'이 올해도 화제다. 이 사장이 착용한 코트는 '돌체앤가바나' 제품이다. 가격은 780만 원. 이 사장은 기존 코트에 함께 구성된 벨트를 빼고 볼드한 '알라이아'의 가죽 벨트를 레이어드해 잘록한 허리를 강조했다." (머니투데이, 3월 20일)

위 기사 제목은 '잘록한 허리 강조한 이부진 주총패션…올블랙 롱코트 눈길'이었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의 '패션'을 주요하게 다룬 기사들이다.
ⓒ 갈무리
포털에서 운영하는 '주식토론방'에는 불만이 튀어나왔다. "780만 원짜리 돌체앤가바나 입고 왔다는 기사가 다냐(zhos****)"는 거였다. 작성자는 "삼성전자 주주총회 비하면 진짜 무슨... 소꿉놀이하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이부진 사장 그리고 호텔신라는 '소꿉놀이' 수준의 경영을 하고 있지 않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지난해 12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인' 중 85위로 이 사장을 선정한 바 있다. 포브스는 재산과 언론활동, 영향력, 활동범위 등을 지표로 한 해의 영향력 있는 여성 순위를 발표해오고 있다.

포브스는 이 사장의 재산을 24억 달러(약 3조 4360억 원)으로 집계했다. 이어 "서울의 최고 숙박·콘퍼런스 시설 중 하나인 호텔신라의 사장이자 최고경영자이고, 호텔신라는 롯데에 이어 한국의 최대 면세점 사업자"라고 밝혔다. 더불어 "고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장녀로 어머니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이서현 삼성물산 사장과 함께 '아버지의 제국'을 나눠 물려받았다"고 설명했다.

'최고의 숙박 시설' 호텔신라는 1972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으며, 이들에 대한 연간 급여 총액은 1106억 100만 원에 달한다. 소속 외 근로자도 2119명이나 된다. "아버지의 제국을 물려받은 3조 4360억 원의 자산가이자, 서울 최고 콘퍼런스 시설의 최고경영자"인 이 사장이다.

4000여 명의 '월급'을 책임지고 있는, 1조 5000억 원의 주식을 견인해야 할 경영자에게 '주총 패션' 운운은 지나치게 한가하다. 언론 대신 호텔신라 주주(주식토론방, ki******)는 물었다. "회사가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 여기는 사즉생 각오 따위는 사치냐"고.

지난달 17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계열사 임원을 대상으로 한 교육 영상 메시지에서 "삼성은 지금 죽느냐 사느냐의 생존의 문제에 직면했다. 위기 돌파를 위해선 경영진부터 철저하게 반성하고 사즉생의 각오로 과감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3 19일 열린 삼성전자 주주총회를 전후하고 '이재용 패션'을 언급한 기사는 단 한 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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