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바루기] ‘이 자리를 빌려’, 자연스러운 표현?
“시민들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한 자치단체장이 인터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중해 보이는 표현이었지만, 두 가지가 조금 거슬렸다. 먼저 ‘빌리다’라는 단어의 사용이다. 표준어지만 자연스럽게 들리지 않았다. ‘이 자리를 빌어’가 더 자연스럽게 들린다. “돈을 빌리다”처럼 물건이 오가는 상황이 아닐 때 ‘빌리다’를 사용하면 여전히 거부감이 든다.
‘이 자리를 빌려’도 실제 자리를 빌리는 게 아니다. 맥락을 살피면 ‘이 자리를 통해’ 정도의 의미겠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이때 ‘빌리다’의 뜻을 “어떤 일을 하기 위해 기회를 이용하다”라고 밝히고 있다. 얼른 받아들이기 힘들어 보인다. 일상에서도 ‘빌리다’를 이 사전처럼 사용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현실을 보면 아직 많은 사람이 ‘빌리다’가 갈라져 나오기 이전 형태인 ‘빌다’를 쓴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한다. 규범은 ‘빌려’이지만 현실은 ‘빌어’가 더 우세해 보인다. 연세한국어사전도 ‘이 자리를 빌어’가 더 널리 쓰인다고 봤다. 이 사전은 “(무엇을 하기 위해) 기회를 이용하다” “누구의 말을 인용하다”는 뜻이 ‘빌리다’가 아니라 ‘빌다’에 있다고 한다.
또 한 가지 거슬렸던 건 ‘이 자리를 빌려’라는 말 자체였다. 의례적이고 상투적으로 보였다. 괜히 붙이는 군더더기 같기도 했다. 공식적인 자리에 서면 불필요하게 덧붙이려고 한다. 일부러 쓰지 않아도 된다. ‘이 자리를 빌려’가 없는 “시민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가 더 깔끔하고 세련돼 보인다.
이경우 기자 islba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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