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 '나의 조국, 나의 음악'
[김삼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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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이상이 1988년5월 독일 연방 대공로훈장을 받을 때 모습입니다. |
| ⓒ 윤이상평화재단 |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기도하여 1967년에 3.15를 무색케 하는, 제7대 총선은 부정선거를 통해 개헌선을 구축했다.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거세게 전개되었다. 사육된 중앙정보부가 나섰다. 1967년 7월 중정은 "문화 예술계의 윤이상·이응로, 학계의 황성모·이석진 등 194명이 대남 적화공작을 벌이다 적발되었다는 어마어마한 간첩단사건을 발표했다.
'동백림 간첩단사건'은 규모나 등장인물의 면면에서 역대급으로 부정선거 규탄 등 모든 정치 이슈를 빨아들인 블랙홀이 되었다. 중정은 7차에 걸쳐 수사 결과를 발표, 사건 관계자들은 동백림 소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이적 활동을 했다고 발표했다. 실제 최종심에서 간첩죄가 인정된 사람은 1명도 없었다.
윤이상은 1917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서울에 있는 상업학교를 거쳐 일본 오사카 음악학원에서 음악 이론과 첼로를 배우고, 18세 때에 피아노 반주 민요곡집을 펴내었다. 태평양 전쟁 시기 반일활동으로 오사카에서 구속되어 2개월 투옥되기도 했다. 해방을 맞아 부산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며 음악사를 가르치고 고풍의상·달무리 등 가곡집을 펴냈다.
1956년 서베를린 음악대학에 유학하여 서양음악의 기교와 한국의 궁중제례음악 등을 통해 고유한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자 시도했다. 그의 북한 방문은 이데올로기 차원이 아닌 예술 활동을 위한 길이었다고 재판에서 설명했다. 부인과 함께 한국으로 끌려와 대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국제적인 비판과 예술인들의 항의로 1969년에 풀려났다.
윤이상은 1980년 서독으로 돌아가 베를린 예술대학 정교수로 임명되고, 광주민주항쟁의 소식을 들었다. 10일간 잠을 이루지 못하고 교향시 '광주여 영원하라'를 지었다. 이듬해 서독교향악단의 연주로 초연이 되고 미국과 유럽 각국, 일본에서 연주하였다.
여러 차례 고국에서 연주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으나 정부는 끝내 그의 귀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1971년 독일 국적을 취득하고 1995년 현지에서 눈을 감았다. 유해는 현지에 묻혔다가 2018년 고향 통영으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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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전 윤이상의 모습. |
| ⓒ 윤이상평화재단 |
나에게는 조국과 음악이라는 두 가지 개념이 깊은 상관관계 속에 있다. 나의 음악은 나의 조국 속에서 태어났고, 나의 조국은 나의 음악을 그 자식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다시 더 풍요한 음악을 낳을 수 있는 소지를 만들 것이다.
'조국'이란 말은 쓰는 사람에 따라 그 내용과 무게가 다르다. 많은 미국 사람들은 이 말을 쓰기에는 착잡한 심정일 것이고, 일본 사람들은 금권(金權)의 세력 때문에 벌써 이 말의 진가를 모르고, 서유럽의 안정된 국가들에서는 예술가나 젊은 세대까지도 이 말을 쓰지 않고 오히려 경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대신 유린당한 민족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티나, 라틴아메리카 등등의 민족들에게는 '조국'이라는 이 말은 다시 없는 귀중한 정신적인 원천(源泉)이다.
나에게는 이 '조국'이란 말을 다른 많은 우리 동포들처럼 깊이 사랑해야 할 이유가 있다. 내가 우리 땅에서 태어난 지 70여 년 동안 한 번도 조국의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했었다. 조국이란 말의 알맹이가 대부분 '민족'이란 말로 대치될 수 있다면, 우리 민족은 이민족에게도 종노릇하고, 같은 민족의 어느 특수권력에게도 또한 무참히 짓밟혀왔었다. 그러나 나는 어릴 적부터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도 배웠고, 또 아름다운 예술의 유산도 배웠다.
그리고 최근까지 내 동족에 의해 우리 순결한 민족은 마치 숫처녀가 폭한에게 강간을 당하듯 맹목적으로 유린당했고, 게다가 병적인 사디스트들에게 칼부림을 당하여 만신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음악적으로만 예민했던 것이 아니라 강한 정의감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일제 때에 일본에 항거하려다 감옥살이를 하였고, 박정권(朴政權) 때에는 정권의 폭력에 의해 납치와 고문을 거쳐 생사를 헤매었고, 또 전정권(全政權) 때에도 많은 민주항쟁과 구명운동에 가담하였었다. 그래서 나는 내 평생을, 특히 유럽생활 33년을, '조국'은 깨어졌지만 귀중한 보물을 등에 업고 동분서주하면서, 한쪽으로는 나의 조국의 생명의 안전과 분단된 민족의 화합을 위하여, 또 한쪽으로는 조국이 나에게 남겨준 귀중한 예술적 보물을 아끼고 갈고 닦아서 거기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고,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새시대의, 음악의 표현과 정신적 알맹이를 추구한 것이다.
음악은 특권자들을 위한 성찬식탁 위의 금잔(金盞)에 담긴 향내 나는 미주(美酒)의 역할만을 할 수가 없다. 음악은 때로는 깨어진 뚝배기 속에 선혈(鮮血)을 담아 폭군의 코앞에다 쳐들고 그 선혈을 화염으로 연소시키는 강한 정열을 뿜어야 한다.
내가 1950년대 말에 유럽 현대 음악계에 처음 등장하였을 때, 세계의 작곡계는 한창 전통의 파괴와 극도의 추상성의 추구와 개성의 부인 그리고 기법의 고도의 지능화로, 말하자면 무한한 '전위적' 태도와 음(音)의 '계산화'가 한창이었다. 거기에는 '영감' '감성', '민족성', '인간성' 따위의 용어들은 배척되고 음악 속에서도 그것들을 찾기 힘들었다. 나는 우선 작곡가로서의 나의 자리를 얻기 위해서 12음 기법으로 작품을 썼으나, 나의 '모국(母國)의 전통'에서 귀중한 음악적 요소를 찾아 조심스럽게 작품을 써나갔다.
그리하여 1966년에 서독의 도나우에싱겐 음악제에서 나의 '예악'(禮樂)을 발표하였는데, 이 곡은 그때에 가능한 모든 작곡적인 환경 속에서 나의 조국이 나에게 준 음악적인 보재(寶材)에 최선을 다한 곡으로, 후일 나의 작곡노선에 튼튼한 토대가 되었다.
예술가는 누구도 한번 도달한 영역에 그대로 머무를 수는 없다. 항상 새로운 소재와 새로운 문제에 부닥쳐 전진해야 한다. 그래서 내가 그때 도달한 '예악'으로서의 성공이 나에게는 무거운 짐이 되었다. 나는 그때까지 설정한 평면적인 '주요음'(主要音) '주요음향'을 사향적(斜向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또 이것을 절단시켜서 시간적으로 '디딤돌'처럼 연결시켰다. 이리하여 나의 음악이 우리 민족 속에 오래 흘러오는 선적(線的)인 미(美)를 탐구한 지 약 15년 만인 1975년경부터 나는 나의 정신상에 오래 맺혀 있던 '인간성의 탐구'로 전진했다.
나는 그때 서유럽의 어느 작곡가보다도 앞장서서 그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이 '인간성'에의 호소와 접근은 먼저 계속된 '협주곡'으로 자리를 굳혔다. 첼로협주곡, 이중협주곡, 플루투협주곡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때에는 나의 정신세계가 내가 느낀 이른바 '동베를린사건'에서 치른 심한 인간적 상처가 개인감정에서 순화되던 때이고 또 세계정세가 원폭 경제 속에서 많은 사회적·정치적 갈등이 첨예화된 때이다.
서유럽의 작곡계는 나의 이런 '사회참여적' 또는 '인간성'에의 접근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스스로 젊은 작곡가들이 이에 따랐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는 전 세계의 작곡계가 '옹색한 자기세계'를 탈피 또는 해방하여 모든 양식과 모든 정신적 태도가 자유롭게 경험하고 있다.
나의 5개의 교향곡은 나의 생애에서 이룬 나의 음악의 집대성이라 할 수가 있다. 여기에는 내가 1960년대에 토대를 굳힌 기법적·미학적 민족의식에서 꾸준히 전향(前向)하여 동양의 '지역성'에서 '세계에로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나, 나의 작품의 근본적 위치는 포기하지 않고 그 근저에 깔려 있다.
서양의 음악사를 볼 때 어느 저명한 작곡가이건 다 그들의 조국(이 말은 민족 고유의 문화와 역사를 포괄하는 말로서)에 그들의 예술을 뿌리박고 있다. 대별한다면 이탈리아 음악, 독일 음악, 프랑스 음악, 러시아 음악 등등.
어느 나라의 작곡가도 다른 나라 작곡가들이 흉내 낼 수 없는 귀중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체로 독일 사람이 진정한 러시아 작품을 소화하기는 힘들고 또 다른 나라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동양의 연주가들이 독일의 고전이나 낭만을 완전히 소화하려 할 때에는 더욱(?) 그렇다.
앞에 쓴 바와 같이 나의 음악은 역사적으로는 나의 조국(민족)의 모든 예술적·철학적·미학적 전통에서 생겼고, 사회적으로는 나의 조국의 불행한 운명과 민족·민권 질서의 파괴, 국가권력의 횡포에 자극을 받아 음악이 가져야 할 격조(格調)와 순도(純度)의 한계 안에서 가능한 한 최대의 표현적 언어를 구사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음악은 구체적으로 말을 하지 않지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강한 힘이 있는 것이다.
1989년 1월 서베를린에서
덧붙이는 글 | [광복80주년명문100선]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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