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조훈현이던데요" 신진서도 놀랐다…바둑기자가 본 '승부' 명장면

영화 ‘승부’가 개봉했다. 한국 바둑이 낳은 두 영웅 조훈현과 이창호의 사제 대결이 줄거리다. 한국 바둑사에 길이 남는 명승부가 영화로 재현되자 바둑팬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특히 이병헌의 연기를 칭찬하는 바둑팬이 많다. 이병헌이 조훈현을, 유아인이 이창호를 연기했다. 지난 19일 시사회에서 만난 신진서 9단도 “그냥 조 국수님이던데요?”라며 감탄했다. 실존 인물의 실제 사건을 다뤘다고 해서 영화 속 설정이 다 사실은 아니다. 허구로 만든 인물과 에피소드가 영리하게 섞여 있다. 바둑기자의 시선으로 영화를 복기했다. 고함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됐으니 고려하시라.
스승 조훈현

영화에 관련 에피소드가 나온다. ‘답이 없지만 답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이 바둑이다’라고 쓰인 낡은 바둑판이다. 조훈현의 스승이 조훈현에게 준 바둑판이 조훈현의 제자에 대물림된다. 사실일까. 조훈현이 스승에게 바둑판을 받은 건 맞다. 그러나 그 바둑판은 현재 조훈현의 고향인 전남 영암의 ‘조훈현 바둑기념관’에 모셔져 있다.

1972년 조훈현은 군대에 가기 위해 귀국한다. 이어 한국 바둑을 문자 그대로 접수한다. 한국 바둑의 주요 기록을 아직도 조훈현이 갖고 있다. 한국 바둑 최초 9단(1982년), 전관왕 3회 달성(1980년 9관왕, 1982년 10관왕, 1986년 11관왕), 통산 최다 타이틀 획득(162회) 등등. 조훈현의 업적 중에서 가장 빛나는 건 1989년의 제1회 응씨배 우승이다. 그때는 김포공항에서 서울 시내까지 카퍼레이드도 했다. 영화에도 등장한 ‘환장하다’ 플랫 카드가 그때 나온 에피소드다. 제1회 응씨배 결승 최종국의 기보는 만화책 『미생』에도 등장한다.

영화에서 이병헌은 정말 조훈현을 빼닮았다. 오른쪽으로 길게 넘긴 가르마부터 입을 쫑긋 모으거나 왼손으로 턱을 괴는 버릇도 똑같다. 바지 주머니에 두 손 쑤셔 넣은 채 잰걸음을 걸을 때는 그냥 조훈현이었다. 조훈현은 걸음이 빠르다. 산에 오를 때도 제일 먼저 올라간다. 조훈현도 “걸음걸이까지 똑같다”며 놀라워했다.
조훈현의 전성시대 라이벌이 동갑내기 서봉수다. 영화에서 남기철 8단으로 나오는 캐릭터다. 조우진 배우의 매운 눈매가 서봉수를 닮았다. 영화에서 둘 사이의 대국 장면이 재미있다. 조훈현이 혼잣말로 “망했네”를 연발한다. 바둑계에선 다 아는 에피소드다. 승부사 조훈현은 엄살꾼이었다. 유리한 바둑인데도 “또 졌네” “내가 미쳤지” 같은 푸념을 수시로 뱉었다. 일본어로 중얼거리기도 했다. 바둑이 유리해지면 다리를 떨고, 대국 중에 노래를 부르거나 심지어 책을 펼쳤던 에피소드도 실제 조훈현의 것이다. 젊은 시절 조훈현의 대국 매너는 솔직히 좋지 않았다. 소파에 거의 누워서 대국하는 ‘와기(臥棋)’도 종종 연출했다. 영화와 달리 조훈현과 서봉수는 그리 돈독한 사이가 아니다.

그리고 흡연 장면. 한창때 조훈현은 이름난 골초였다. 담배 중에 꼭 ‘장미’만 피웠다. 평소에는 두 갑, 대국 중에는 내리 네다섯 갑을 피웠다. 대국장에서 흡연이 허락되던 시절, 조훈현 대국이 잡히면 한국기원은 ‘장미’를 미리 사다 놨었다. 조훈현은 긴 손가락으로 긴 장미 담배를 옆으로 문 채 볼이 폭 패도록 깊게 빨았다. 이병헌이 그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다.
그 골초가 제자와의 승부에서 패한 뒤 담배를 끊는다. 그리고 끝내 승부를 뒤집는다. 영화에서 담배를 끊은 조훈현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캐러멜을 꺼내는 장면이 나온다. 조훈현은 “캐러멜은 아니고 입이 심심해서 이것저것 씹기는 했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조훈현은 금연초 광고에도 출연했었다. 한국기원 관계자는 “영화에 흡연 장면이 너무 많이 나와 TV에선 보기 어렵겠다”며 아쉬워했다.
제자 이창호
이창호(50)는 전북 전주 출신이다. 아버지 이재룡씨가 전주에서 시계점을 했다. ‘이(李)시계점’. 영화에도 똑같은 간판이 나온다. TV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도 이창호 역할을 연기한 박보검의 아버지가 금은방을 한다. 이창호는 여섯 살 때 할아버지 이화춘씨로부터 처음 바둑을 배웠다. 영화에서 이창호 아버지보다 할아버지가 더 자주 등장한 까닭이다.

이창호가 신발 끈을 못 매는 에피소드는 사실이다. 영화에서 신발 끈을 대신 매주는 장면은 보통 로맨스를 상징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무관하다. 어린 이창호의 신발 끈을 대신 매준 프로기사가 한둘이 아니란다. 이창호는 프로기사 최초로 병역 면제를 받았다. 그래도 군사훈련은 받았는데, 군화 끈을 묶지 못해 지퍼가 달린 장교용 군화를 신었다고 한다.

영화에서 묘사한 청소년 이창호가 어린이 이창호보다 실제 이창호와 훨씬 비슷하다. 이창호는 17개월 때 우량아 선발대회에 나가 전국 2위를 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비쩍 말랐지만, 청소년 이창호는 꽤 통통했다. 영화에서 이창호를 연기한 유아인이 그렇게 살을 찌웠다. 띄엄띄엄 내뱉는 어눌한 말투도 캐릭터를 깊이 연구한 결과다. 이창호는 종종 눈을 깜빡거리는 버릇이 있는데, 그 버릇도 유아인이 잡아냈다. 이병헌의 연기가 워낙 놀라워 그렇지 유아인의 연기도 훌륭하다.
1984년 이창호는 조훈현의 첫 내제자가 된다. 당시 전주에서 활동했던 프로기사 전영선이 조훈현에 추천했다. 영화에서 조훈현과 이창호가 처음 만난 에피소드는 허구고, 전영선의 추천을 받은 조훈현이 이창호의 기력을 측정하려고 전주에서 2번 대국했다는 일화는 내려온다. 영화에서 클로즈업되는 ‘바나나맛우유’는 소년 이창호가 가장 즐겨 마셨던 음료다. 조훈현 문하로 들어갔을 때 이창호는 아홉 살이었다. 그 나이에 조훈현은 프로기사가 됐다. 이창호는 그로부터 이태 뒤 입단한다. 조훈현에 이른 세계 두 번째 최연소 입단 기록이다.
이창호의 성적도 조훈현 못지않다. 총 타이틀 획득 수는 조훈현에게 밀리지만(162회 대 142회), 이창호는 특히 세계대회에서 강했다. 1992년 16세에 동양증권배를 거머쥐면서 최연소 세계 챔피언에 등극했다. 이창호는 세계대회에서 모두 23회 우승했는데, 그중에서 17회가 메이저 세계대회다(16명 이상 참가, 우승 상금 1억5000만원 이상). 2위는 은퇴한 이세돌(14회)이고, 3위가 조훈현(9회)이다. 현재 최강자 신진서가 8회로 뒤를 잇는다(중국 커제, 구리와 동률).



이창호가 이룩한 가장 극적인 업적은 한·중·일 국가대항전인 농심 신라면배에서 나왔다. 2004년부터 2005년까지 이어진 이른바 ‘상하이 대첩’이다. 한국 선수 중 유일하게 남은 이창호가 중국과 일본 선수 5명을 차례로 무찌르고 한국에 우승컵을 안겼다. TV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도 그 기적 같았던 승부가 나온다.
농심배는 단체전이다. 하여 이창호 덕분에 한국이 우승해도 이창호 개인 우승 기록에서는 빠진다. 한국팀 주장 이창호는 농심배 1회에서 6회까지 한국의 초반 6연패를 책임졌다. 그 6년간 이창호가 거둔 14연승 기록을 지난해 25회 대회에서 신진서가 깼다. 6회 대회 이창호의 막판 5연승을 넘어서는 막판 6연승도 이뤄냈다. 현재 신진서는 농심배 18연승 중이다.
승부 : 전신(戰神) vs 신산(神算)

조훈현과 이창호, 이창호와 조훈현의 상대 전적이다. 제자의 승률이 62%로 스승을 앞선다. 별 차이는 아니다. 열 판 두면 한 판 더 이긴 꼴이다. 이창호가 조훈현을 압도했던 것처럼 기억되는 건, 우승컵을 놓고 벌인 타이틀전 결과 때문이다. 결승전에서 둘은 모두 68번 대결했고, 그중에서 49번을 제자가 우승했다. 결승전 우승 확률(72%)이 평균 상대 승률보다 높다. 전관왕을 3차례나 차지했던 조훈현이 무관으로 전락한 대회가 1995년 2월 결승전을 치른 제12회 대왕전이다. 그때 상대도 이창호였다.
세계 바둑사는 물론이고 세계 프로스포츠 역사에서 아예 유례가 없는 사제간의 타이틀 전쟁은 1988년 12월부터 2003년 12월까지 장장 15년간 이어졌다. 사제간의 첫 결승전 승부는 1988년 12월 24일 제28회 최고위전에서 펼쳐졌다. 제자가 스승 집에서 산 지 5년째 되는 해였다.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스승은 긴장한 제자를 박살 냈다. 80수 만에 불계로 이겼다.

최후의 결승전 승부는 2003년 12월 15일 명인전 결승 5국이었다. 그 대국에서 이창호는 쉰 살의 스승에게 반집을 이기고 우승했다. 스승과 제자는 모두 24번 반집 승부를 펼쳤다. 그중에서 18번을 제자가 이겼다. 신산(神算). 이창호의 별명이다. 이창호는 세계 바둑사에서 신의 영역으로 치부됐던 반집을 최초로 계산해낸 인간으로 평가된다. 지금은 인공지능이 0.1%의 승률까지 계산해내지만, 그때 바둑은 계산보다 기세가 더 중요했다. 이창호가 뻔히 보이는 상대의 약점을 공격하지 않고 제집을 지키는 수를 두면 해설을 맡은 윤기현 9단이 “아! 계산서가 나왔습니다”고 소리치던 시절이다. 이창호의 바둑은 느리지만 두텁고 정확했다. 반면에 조훈현은 빠르고 화려하고 치열한 바둑을 뒀다. 영화에서 그 바둑관 논쟁이 흥미진진하게 묘사된다.

영화가 주목하는 승부는 제29회 최고위전 결승전이다. 1989년 12월 11일부터 1990년 2월 2일까지 결승 5번기가 열렸는데, 이 승부에서 처음 제자가 스승을 꺾고 우승한다. 특히 마지막 5국은 이창호가 반집을 이긴다. 그 바둑이 영화에서 100% 재생된다. 영화에서 이병헌과 유아인이 바라보는 바둑이 35년 전 조훈현과 이창호가 응시했던 그 바둑이다. 바둑 자문위원으로 영화에 참여한 서건우 7단은 “다른 대국은 비슷하게 흉내 냈지만, 이 대국만큼은 실제 대국을 똑같이 되살렸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조훈현은 친절한 스승으로 묘사되지만, 현실은 달랐다. 집에 두고 가르친다고 해서 매일 제자를 교육한 건 아니었다. 한 달에 두어 번 제자 바둑을 함께 복기하는 정도였다. 오히려 조훈현의 아내 정미화 여사가 이창호를 깍듯이 돌봤다. 실제로 이창호는 정 여사를 “작은 엄마”라고 불렀다. 정 여사는 어린 이창호를 목욕도 시켰다. 자식 같았던 제자가 어느 날부터 남편을 이기기 시작했다. 마음이 어땠을까. 영화에도 남편을 이긴 제자를 바라보는 정 여사의 난감한 표정이 나온다.

제자에게 밀렸어도 조훈현은 ‘천하의 조훈현’이었다. 그는 끝내 재기에 성공한다. 담배 끊고 악착같이 산을 다니더니 마침내 세계대회 정상에 다시 오른다. 2003년 제7회 삼성화재배를 우승했을 때 조훈현의 나이는 49세 10개월이었다. 최고령 세계대회 우승 기록이다. 그 시절 그의 바둑은 전성기보다 더 치열했다. 전신(戰神). 부활한 조훈현을 부르던 별명이다. 조훈현은 당시 심정을 이렇게 회고했다.
" 아팠죠. 맞으면 아프잖아요. 내가 그런 적이 없었잖아요. 창호가 나오기 전에는. 솔직히 최악의 상황이었죠. 전관왕이었던 내가 창호 때문에 무관으로 떨어졌는데. 그래도 어떻게요. 그렇게 떨어진 데가 내 자리인데. 내 실력이 이것밖에 안 되는데. 출발선으로 떨어졌으니 한 발짝씩이라도 올라가자고 생각했어요. 부담을 내려놓으니까 마음이 편해졌어요. 바둑도 잘 됐고요. 내가 실력이 늘었겠어요? 심리적인 게 큰 것 같아요. "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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