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고졸의 오마이뉴스 취업 도전기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박진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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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채용 시험에 지원했다. |
ⓒ elements.envato |
사실 나는 이런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만큼 준비된 지원자가 아니다. 기자의 꿈을 키운 것도 2월의 어느 날 우연히 <오마이뉴스>의 채용 공고를 보고 난 이후였다. 지난해 4월 전역을 하고 입대 전 하던 나전칠기 공예에서 다른 분야로의 확장을 꾀하고자 인테리어 목공과 CAD를 배워왔다.
건축을 배워 회사에 들어가 실무를 익히면 나전칠기 기술을 활용할 줄 아는 색다른 인테리어 업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1월 모든 교육과정을 끝마치고 2월 본격적으로 취업을 노리고 있을 때였다. 분명 인테리어 분야의 취업을 찾고 있었는데 잡코리아, 잡플래닛에 매일 접속하다 보니 '어차피 나중에 창업을 꾀하는 거면 창업 자금만 모을 수 있는 직업이면 다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고가 조금씩 전환되다 보니 이상한 버릇이 들었다. 나는 어느 사이트에 접속하든지 채용, 공지란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렇게 기사를 보고 있던 어느 날 <오마이뉴스>의 공지란에도 접속하고 채용 공고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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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공개채용 공고 |
ⓒ 오마이뉴스 |
나의 학창시절 편집부 경험을 살리기 위한 첫 문장이었다. 그리고 글을 써나갔다. 써나가면서 알았다. 나는 정말 글과 인연이 깊은 사람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학교의 불평불만도, 공방 운영의 과정에서도, 같이한 대외 활동의 과정에서도 나는 항상 나를 글로 풀어나가며 살았다.
그리고 매일 글과 함께 살았던 편집부 시절 나를 회고했다. 밤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글을 쓰고 아침 일찍 일어나 설렘으로 등교하던 그때를 말이다. 내가 만약 <오마이뉴스> 기자가 된다면 그런 일상을 이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명 나는 인테리어를 배우며 창업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기업에서 몇 년 일하기 위해 구직활동을 시작했지만, 어느새 평생직업 기자로서의 삶을 그리고 있었다.
꿈을 키워가며 자기소개서를 쓰다 보니 4500자가 넘었다. 수정의 여지는 있었지만 2000자 이내(채용 공고 요구사항)로 줄이는 작업은 무리일 것 같았다. 불평을 많이 했다. 글을 쓰며 살 기자가 자신의 삶에 대해 2000자밖에 못 쓰는 게 말이 안 되지 않나. 줄이는 작업만 하루를 넘게 소진했다. 한 문장, 한 문장 지우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1999자 자기소개서가 나왔다. 표현, 비유는 많이 죽었지만 그래도 내용은 다 담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글을 줄여가면서 잘 살리는 기술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보기 위해 2000자 이내 자기소개서를 요구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호흡이 긴 글만 써오던 나는 시작부터 어려움이 따랐다. 다른 회사의 자기소개서를 쓸 때는, 써 놓은 글을 짜깁기하여 회사에 맞게 몇 개 문단만 추가하기 때문에 작성하는 데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오마이뉴스>는 마감 4일 전 공고를 보자마자 작성했음에도 마감 몇 시간 전에 겨우 보냈다.
취업 준비하는 김에 지원한 기자였는데 어느새 언시생이 되었다. 자기소개서를 쓰기 위해 매일 도서관에 가고는 했는데 <오마이뉴스>에 지원한 이후로 쓰라는 이력서는 안 쓰고 저널리즘에 관련된 책만 읽었다. 그렇게 1차 발표 날이 다가왔다. 그저 담당자가 내 자기소개서를 끝까지 읽고 흥미를 느끼기만 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자꾸 메일함을 들여다보기 싫어서 오후 4시도 더 지나서 메일함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오마이뉴스>입니다'라는 메일이 와 있었다. 한숨 한번 크게 내쉬고 클릭했다. 첨부파일이 있는 게 먼저 눈에 보였고 밑에 일정이 눈에 들어왔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됐다! 싶었다. 믿어지지 않아 몇 분은 그 메일을 들어갔다 나갔다 하며 멍하니 있었던 거 같다.
그 이후에 머릿속에 경고등이 울렸다. 2차 시험이었다. 주어진 시간은 일주일, 1교시 시사, 2교시 논술, 3교시 기사작성이었다. 뭐하나 자신 있는 게 없었다. 우선 벼락치기가 가능해 보이는 시사를 준비하기로 했다. 네이버에 시사상식을 검색하니 뜨는 유일한 책이 있었다. 바로 결재했다. 격월로 출간하는 최근 시사를 엮은 책이었는데 뒤에 문제들이 많았다.
앞의 시사내용은 밑줄만 처가면서 읽기만 하고 문제를 푸는 것에 집중했다. 타 언론사의 출제 문제들이 있었는데 보통 '다음 중 국회의원 출신이 아닌 지방자치단체장이 아닌 것은?' 이런 문제들이 많았다. 맞출 수 있는 문제도 많았지만 틀린 문제들이 문제였다. 실전에서 '다음 중 손흥민이 속해 있지 않았던 팀은?' 이런 문제가 나오면 어떻게 맞출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오답노트에 쓰면 실전에서 도움이 되긴 할까? 시험이 일주일 남았는데? 이러면서 시험 준비는 점점 미궁 속으로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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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박진슬 시민기자의 방 캡처 |
ⓒ 오마이뉴스 |
2교시 논술에서도 아차 하는 순간이 있었다. 800자짜리 문제 2개가 나왔는데 그중 하나에 허를 찔렸다. 이 또한 기자 하겠다는 놈이 뉴스를 보지 않은 것에 대한 업보였다. 대충 준비한 내용과 엮어서 서술할 수밖에 없었고 쓰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3교시 기사작성에서도 벼락치기 한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아는 것을 끄집어내어 완성했는데 답지의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시험을 끝내고 화장실을 가던 중 같이 시험을 본 응시생이 물었다.
"어땠어요? 시험은 할 만했나요?"
"제가 전공자가 아니라서 어려웠어요. 어땠나요?"
"저도 어려웠어요. 생각한 거랑 다르네요."
"전공자세요?"
"네 저는 전공자예요. 혹시 전공이 어떻게 되세요?"
"아 저는 고졸이라서요."
"오. 고졸인데 여기까지..."
몇 초의 정적이 있었지만, 내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제가 시민기자 활동을 했어요."
"저도 시민기자 활동 했는데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한번 찾아볼게요!"
나에 대한 긴 설명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갑갑했는데 한 번에 해결되었다. 박진슬 시민기자의 방은 설명이 많이 필요한 내 인생이 상세히 담긴 좋은 명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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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님의 불신을 마주했다. |
ⓒ envatoelements |
집에 와서 내가 알아본 내용에 대해 가족들에게 공유했다. 밝지 않던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던 아빠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진슬아. 내가 국문학과 나와서 기자하는 사람들을 많이 알잖아. 이쪽이 기본적으로 학력을 따져."
"아니 그렇게 말하면..."
별다른 대답을 이어나가지 못한 채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1차를 붙은 자신감이 다 사라졌다. 나라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기세를 몰아 꿈을 키워나가다가, 기대감이 무너졌다.
자리를 피했던 건 집안에서까지 다투고 싶지 않아서였다. '학력 콤플렉스'라는 말을 싫어한다. 20살 비진학을 결정하고 남들이 다 하는 것을 하려 할 때마다 나한테 따라왔던 말이다. 돈을 벌지 않고 교양을 쌓는 다른 일, 시민 활동을 하거나 책 동아리에 들어가거나 하면 현실 감각이 없다고 하거나, 콤플렉스를 이겨내고자 뭔가를 한다는 시선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게 문제'라고 지적하면 아득바득 없다고 우기며, '네가 피해의식이 있어서 그렇게 느끼는 거야'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것도 아니면 '그게 현실이니 받아들이는 것만이 네가 취할 수 있는 자세'라고 이야기하곤 했었다.
나를 지지하는 사람이라도 "너는 역시 재미있는 삶을 산다"라고 이야기를 많이 했다. 대졸자라면 그냥 '그런 걸 하는구나' 하고 지나갈 일들을 내가 하면 '재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 도전하는 모습'으로 생각하는 것도 무의식중에 나를 할 수 있는 것이 제한적인 고졸로 규정했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었다. 일부러 또는 무의식중에 나를 폭력적으로 대하는 행위였다. 나를 맞아도 왜 때리나 소리도 못 하고 아파도 아픈 척하지 말고 살아야 하는 존재로 취급하는 태도였다. 그날 나는 고졸답게 맞아도 악 소리 못하고 어디론가 숨어서 아픈 곳을 문질러야 했다.
원래 난 피곤한 쌈닭이다. 맞으면 맞자마자 왜 때리나 하고 쌈을 시작하곤 한다. 하지만 나의 유일한 쉼터 안에 같이 사는 몇 없는 내 편을 적으로 돌려 싸울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하고 싸웠던 건 한 번도 힘든 적이 없었다. 내 편의 무의식과 싸우는 게 제일 힘들었다.
사실 내가 <오마이뉴스>에 지원한다고 했을 때부터 부모님의 불신을 마주했다. 지원한다고 했을 때는 "그래 한번 넣어 볼 수 있지"라고 했다. 1차를 붙었다고 했을 때 아빠는 고졸전형으로 붙은 거니까, 단순히 고졸로 어필하지 말고 다른 고졸과 다른 점을 잘 어필할 준비를 하라고 이야기했다.
내가 그 말을 듣고 공고를 자세히 보여주니 "진짜 기자를 뽑는 거긴 한가 보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큰 기대 하지 마라.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훌륭하다"라는 말을 수십 번은 들은 것 같다.
하지만 부모님, 일부 지인들은 붙고 나서 기자를 잘 해낼 내 모습을 같이 그려나가기보다는 떨어지고 나서 실망감에 빠질 내 모습을 걱정하고, 나의 '기대풍선' 바람 빼기 작업만 이어갔다. 2차의 결과가 나오는 11일 엄마는 또 말했다.
"너무 기대하지 마라. 1차 붙은 게 어디야 밥만 먹고 그 시험만 준비하는 애들이 산더미라잖아."
안 그래도 발표 날이라 예민해져 있을 때 그 말을 들으니까 화를 낼 뻔했다. 나는 몇 초 동안 내 입장을 재치 있게 말할까 고민하다가 말을 뱉었다. "언시생이 많아도 내가 잘나서 붙을 거야." 엄마는 쓴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그럼 네가 정말 잘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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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훗날 난 "그 때 떨어져서 다행이지 붙었으면 지금 기자나 하고 있겠지" 라는 말을 할 것이다. |
ⓒ pexels |
메일이 늦어지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광화문을 나서면서부터 나도 '기대 풍선'의 바람 빼기 작업을 한 터라 많이 아프진 않았다. 오히려 쓸데없는 긴장이 풀려서 좋기도 했다.
그럼에도 보기 좋게 붙어서 '내가 잘난 게 맞다'라고 증명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나라고 쌈닭으로 살고 싶었던 게 아니다. 쌈닭이 되기 싫다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맞으며 살다보면 어느새 마당에 풀어주기만 해도 기뻐할 내가 될 거 같았다. 그래서 털을 다 쥐어뜯기더라도 부리를 항상 날카롭게 갈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겉보기에는 날지 못하는 닭이라도 내가 품고 있는 건 거위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에 합격해서 글로 사회와 함께하는 기자가 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지만, 이면에는 내가 거위를 낳았다는 것을 보여줄 손쉬운 기회가 될 것이라 기대했던 흑심도 있었음을 고백한다.
생각해 보면 쉬운 길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남들처럼 공채에 지원해서 취업하는 건 내가 아니다. 만사에 우여곡절이 따라야 나답다. 훗날 난 "그 때 떨어져서 다행이지 붙었으면 지금 기자나 하고 있겠지" 라는 말을 할 것이다. 탈락이 아니라 시작이다. 난 새로운 작당을 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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