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에 없던 전설의 한국영화, 26년 만에 돌아온 사정

김성호 2025. 3. 26.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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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985] 영화 <쉬리>

김성호 평론가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쉬리>가 돌아왔다. 한국영화 사상 가장 의미 있는 작품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한류 콘텐츠 전성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해도 좋은 영화가 바로 <쉬리>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시조새로 일컬어지는 규모부터, 관객 수 600만 명을 훌쩍 넘긴 흥행까지가 기존 한국영화와 완전히 차별화되는 지점이었다. 비로소 한국 영화산업은 적어도 내수시장에서만큼은 할리우드와 경쟁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는 사실을 대중 앞에 입증해 냈다.

<쉬리>부터 < 공동경비구역 JSA >·<친구>·<실미도>·<공공의 적>·<살인의 추억>·<올드보이>·<태극기 휘날리며> 등 작품성은 물론 흥행에까지 크게 성공한 작품들이 쏟아졌다. 이 시기 박찬욱·봉준호·김지운으로 이어지는 젊은 감독들이 등장했고 이창호·김기덕·홍상수 등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걸출한 작가들까지 한국영화는 외연과 내실 모두에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 근간에는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 모은 몇몇 작품들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언급돼 마땅한 작품이 <쉬리>다.

<쉬리>는 한국적 특수성과 대중 지향 블록버스터의 조건을 적절히 버무린 명작이다. 한반도를 무대로 펼쳐지는 남북 요원들의 첩보전, 그와 긴밀히 얽힌 사랑과 우정의 엇갈림을 다루었다. 조금 더 있어 보이게 말하자면 애국과 충성이란 세상의 가치와 사랑과 우정이란 인간 본연의 가치의 충돌을 극적으로 그려낸,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감동의 역작쯤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물밑에서 펼쳐지는 남북 요원들의 암투
 영화 <쉬리> 스틸컷
ⓒ CJ ENM
영화는 한국 정부에 정보를 넘기려던 무기밀매업자가 만남의 현장에서 피격돼 사망하는 사건에서 시작한다. 현장에 나간 한국 측 요원은 비밀정보기관 소속인 유중원(한석규 분)과 이장길(송강호 분), 이들은 바닥에 떨어진 두 발의 탄피에서 단서를 얻어 범인을 뒤쫓아 검거하려 한다.

이들이 특정한 범인은 베일에 싸인 특수요원 이방희다. 정예 중 정예라 불리는 북한 특수 8군단 최고의 저격수로 알려진 인물이다. 한국 요원들을 여럿 쏘아죽이고 추적을 피해 한동안 숨죽이고 있던 이방희가 다시 나타났단 사실에 유중원은 한기를 느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북한 특수 8군단의 비정상적인 움직임까지 포착된다. 요원들은 이들이 'CTX'라 불리는 신소재 액체 폭탄을 확보하려 한 정황을 파악하고 폭탄이 보관된 연구소로 향한다. 그러나 폭탄은 이미 탈취당한 뒤다. 담당 연구원 또한 무참히 살해당한 상태다.

액체 폭탄의 특성상 테러에 쓰일 위협이 크다고 판단한 이들은 그를 되찾기 위해 전력으로 내달린다. 상황은 심상찮게 돌아간다. 유중원과 이장길이 가까이 다가설수록 위협 또한 커지는 것이다. 폭탄을 찾던 이들은 북측 요원인 박무영(최민식 분)에게 기습을 당하는데, 유중원은 그가 과거 임무에서 마주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매 순간 북한 요원들에게 한 발짝 뒤처지던 유중원은 조직 내부에 첩자가 있음을 깨닫는다.

영화는 양국 요원들 간의 암중혈투 한 편에서 유중원의 사생활을 인상 깊게 내보인다. 그는 애인 이명현(김윤진 분)과 깊은 사이로, 그녀와 가정을 꾸릴 기대에 부풀어 있다. 애인 유중원뿐 아니라 그 동료인 이장길과도 가까운 이명현이다. 바쁘고 위험한 일에 매달리는 제 남자를 아끼고 배려하는 그녀를 유중원은 깊이 신뢰하고 의지한다.

26년 전 영화만큼 참담한 현실 속에서
 영화 <쉬리> 스틸컷
ⓒ CJ ENM
남북 요원 간의 숨 막히는 막후암투와는 딴판으로, 남북 양국 사이엔 훈풍이 분다. 남북 정상회담이 추진되고 친선 축구경기까지 열리기로 돼 있다. 경기가 열리는 잠실주경기장엔 남북 정상이 모두 자리할 예정이다.

영화가 개봉한 시점이 1999년이란 건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남북 정상이 손을 맞잡은 건 2000년 6월 평양에서 열린 제1차 남북정상회담에서였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만남 성사로, 양국 간 평화의 물결이 한반도 전체를 감쌌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는 6자회담을 통해 한반도를 둘러싼 여섯 나라가 같은 석상에 모여 대화하는 역사적 순간이 열렸다. 북한과 한국이 비로소 서로를 외교석상의 상대방으로 인정한 결과였다.

그러나 어디 평화뿐이었겠는가. 수면 아래 발길질을 멈추지 않는 백조처럼 한반도를 또다시 전화에 휩싸이게 할 수 있는 위기와 그에 대한 대응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1998년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 1999년 제1연평해전과 2002년 제2연평해전, 거듭된 핵실험과 대북제재, 2008년 금강산 관광 중 발생한 남한 관광객 피격사망, 2010년 연평도 포격 도발 등이 모두 그렇다.

영화는 소위 화전양면전술이라 불리는 북한의 대남전략, 나아가 북한과 유사한 형태의 독재정권에서 종종 발견되는 군부의 독자적 움직임 등을 재료로 삼아 실제 한반도에서 있을 수 있는 위기를 작품 가운데 구현했다. 비밀요원과 남파간첩이 얽혀 빚은 드라마는 분단된 국가 위에 위기감 없이 살아가는 무지한 시민들에게 부조리한 현실과 상존하는 위험을 일깨우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쉬리'를 이제야 만나게 된 이유
 영화 <쉬리> 스틸컷
ⓒ CJ ENM
<쉬리>가 거둔 성취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 또 영화계는 이 작품에 마땅한 예우를 다하지 못했다. 그를 기억하는 관객이며 대중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지난 10여 년간 <쉬리>와 얽혀 나온 민망한 이야기를 돌아보자. <쉬리>를 OTT 서비스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유를 이제 알 만한 이들은 전부 알고 있다.

<쉬리>의 IP(지식재산권)는 오랫동안 오리무중이었다. 넷플릭스와 왓챠 등 OTT 서비스, 또 통신3사 IPTV를 통해 작품을 볼 수 없었던 이유다. 판권을 가진 업체와 계약을 해야 작품을 상영할 수 있는데, 그를 찾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영화 제작사 강제규필름도, 투자배급사인 삼성영상사업단도 일찌감치 폐업해 공식경로로 알아볼 길도 묘연했다. 영화인끼리 모인 자리에서나 풍문처럼 뒷얘기를 접할 수 있었던 이유다.

물론 유통된 비디오나 DVD가 상당량 풀려 있었고, 적잖은 수가 지자체 및 학교 도서관에 소장돼 있었기에 아예 볼 길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변화하는 대중의 콘텐츠 소비행태에 비추어 상당한 불편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잘 만드는 일' 만큼 '잘 돌보는 일'도 중요해

이와 관련해 백경태 변호사(법무법인 신원)는 "영화처럼 다양한 창작자들이 모여서 작품을 제작하는 경우에는 영화의 바탕이 되는 대본부터 소품, 배경음악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소들에 대한 권리관계 확인이 이루어져야 한다"며 "한국에서는 해외 OTT를 통해 영화와 드라마 제공이 이루어지면서부터, 이른바 'Chain of Title(체인 오브 타이틀)'이라는 표현하에 권리관계 검토가 진행되는 추세"라고 확인했다.

그는 이어 "현재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감독 중 한 분의 작품에서 사용된 VFX 에셋(시각효과 등 영상콘텐츠의 소스가 되는 데이터 자산)의 경우에도 최종본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관련 업체가 폐업하는 과정에서 권리관계 체인이 끊어진 것으로, <쉬리>와 비슷한 경우"라고 설명했다.

백 변호사는 이어 "(한국 콘텐츠 제작사가) 해외 OTT와 체결하는 계약을 검토하다 보면 그들이 아주 세부적인 사항까지 관리하는 모습에 혀를 내두르게 되곤 한다"며 "좋은 작품을 제작하는 것만큼, 좋은 작품을 잘 관리하는 것도 중요한데 한국은 아직 그 부분에서 부족한 점이 많다"고 아쉬워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 했다. 끊어진 체인을 잇고 다시 끊어지지 않도록 돌보는 일이 그 시작이 될 테다. 우여곡절 끝에 <쉬리>가 다시 극장에서 관객들과 만날 기회를 가진 건 그래서 반가운 일이다. 무려 26년 만의 귀환이다. CJ ENM이 대행사로 나서 IP문제를 풀어낸 게 주효했다. 4K화질 리마스터링을 통해 격동하는 세기말 한국영화의 분위기를 한층 나아진 기술로 접할 수 있도록 한 건 덤이다. 향후 OTT 배급 가능성 또한 열려 있다.

<쉬리>는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작품이다. 남북을 둘러싼 한반도의 상황을 생생히 그린 점부터, 1999년 거둔 기록할 만한 흥행, 26년이나 관객과 만날 접점을 마련하지 못한 민망한 과거까지가 하나하나 그렇다. 이 모두가 한국영화의 자산이다. 이를 어떻게 활용할지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달린 일이다. 공들여 이 글을 쓰는 이유다.
 영화 <쉬리> 포스터
ⓒ CJ ENM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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