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욱의 시시각각] 대통령 없는 세상, 그 놀라운 변화

서승욱 2025. 3. 25.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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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욱 정치외교안보부국장

"개인 자격이라며?"
탄핵으로 직무가 정지된 윤석열 대통령이 권영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권성동 원내대표를 겨냥해 주변에 불만을 표출했다고 한다. 지난달 3일 서울구치소로 윤 대통령 면회를 가기 전 두 사람이 '개인 자격'이라고 선을 그은 것에 대한 섭섭함이다. 정치권에선 "면회 온 두 사람 면전에서 윤 대통령이 대놓고 싫은 소리를 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염치가 있다면 설마 그런 말을 했을까 싶다가도, 서울구치소 앞 지지자들에게 주먹을 불끈 쥔 모습을 떠올리면 능히 그럴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법원의 구속취소 청구 인용으로 석방된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8일 오후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풀려나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뉴스1]

소위 '쌍권 지도부'에 뿔이 난 건 윤 대통령뿐이 아니다. '닥치고 탄핵 반대'를 외치는 강성 당원들도 연일 "배신자" 문자 폭탄을 보내고 있다. 마음고생으로 권 원내대표는 입술이 다 부르텄다고 한다. 그동안 두 사람은 아스팔트 우파와도 윤 대통령과도 일정한 거리를 둬 왔다. 우파 집회장을 제집 드나들듯 했던 막무가내식 강경파 의원들과는 확실히 결이 달랐다. 어차피 '모 아니면 도' 인 윤 대통령과 달리 두 사람은 고려해야 할 변수가 많다. 헌재의 탄핵 인용과 조기 대선까지 염두에 두고 당이 살 길을 열어야 한다. '꼴통 극우'로 낙인 찍히지 않도록 당을 지능적으로 지휘할 필요가 있다. 계엄 날벼락을 맞아 패가망신 신세가 된 국민의힘이 더불어민주당과의 지지율 경쟁에서 접전을 벌이는 데엔 두 사람의 기여가 작지 않다. 특히 탄핵 정국 초기부터 당을 추스르며 중심을 잡아 온 권 원내대표가 1등 공신이다.

「 MB에게 '중도 정치' 배운 권성동
국민연금과 의대 정원 협치 실현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론 힘 받아

당내 '친 이명박(MB)계' 출신인 그는 MB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정치를 시작했다. 정치 DNA엔 수도권을 기반으로 했던 MB의 실용 정신이 깔려 있다. 이념을 강조했던 영남권 중심의 '친 박근혜계'와 달리 조기 대선의 키를 쥔 '중도층' 민심과의 접점이 많다. '윤핵관' 출신이지만 그 색채가 상대적으로 엷게 느껴지는 것 역시 몸에 밴 합리성 추구 본능 덕분이다.

지난달 17일 서초구 청계재단 사무실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와 만났다. [공동취재=뉴스1]


그런 권 원내대표가 당을 이끌고,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정부를 맡는 동안 윤 대통령 독주 시대와는 확실히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18년 만에 성사된 국민연금 개혁이 우선 그렇다. 여야와 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주거니 받거니 한발씩 양보하며 극적인 타협을 만들어냈다. "구조개혁도 함께 추진해야 한다"는 윤 대통령과 용산의 강경론에 옴짝달싹 못 했던 협상의 물꼬가 대통령 부재의 '탄핵 공간'에서 트였다. '반쪽 개혁' '폭탄 돌리기'란 일각의 반발 속에서도 작지만 소중한 협치의 길이 열렸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의정 갈등 이슈도 움직였다. 최 대행에게서 전권을 부여받은 이주호 교육부총리와 권 원내대표가 의기투합하면서다. 이들이 만들어낸 '2026년 의대 모집 정원 3058명' 타협안에 용산 대통령실과 보건복지부 '탈레반(원리주의자)'들의 저항도 힘을 쓰지 못했다. "맞아 죽어도 2000명 증원"을 밀어붙였던 윤 대통령이 건재했다면 꿈도 못 꿨을 일이다.

개헌론도 마찬가지다. 여야 원로와 개헌파 의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87년 체제 극복에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활기찬 정치 토론이 이뤄지고 있다.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됐을 뿐인데 이런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물론 대통령 부재로 어려움을 겪는 부분도 있다. 미국의 통상 압박 대응과 대미 외교 등 대통령의 리더십이 필요한 영역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치에선 제왕적 대통령의 독주와 독선이 걷힌 자리에 '책임 장관제'와 협치의 싹이 돋아나고 있다. 대통령은 외치, 총리와 국회가 내치를 나눠 맡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개헌의 방향으로 검토하자는 주장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대통령이란 이름의 '제왕' '임금'이 사라진 100여 일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비싼 수업료를 치른 국민의 깨달음이 분권형 개헌의 동력이 돼야 한다.

서승욱 정치외교안보부국장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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