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왕'이라고 칭하는 대통령... 미국 외교전문지의 지적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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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4일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상하원 합동 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
ⓒ AP photo/ 연합뉴스 |
트럼프는 헌법상 용인되지 않는 3선 도전은 물론이고 4선까지 입에 담고 있다. 심지어 자신을 왕으로까지 칭한다. 지난달 19일 트럼프는 자신이 만든 SNS '트루스 소셜'에 뉴욕 맨해튼 중심부에 대한 혼잡통행료 부과를 폐지한 일을 언급하며 아래와 같이 말했다.
"혼잡통행료 부과는 죽었다. 맨해튼과 뉴욕 전체가 구원을 받았다. 왕 만세(Long live THE KING)"
세계인들에게 충격을 준 트럼프의 행태
이달 20일 영국 <데일리메일>은 찰스 3세가 트럼프에게 영연방 준회원국 가입을 제안하는 방안이 정부 내에서 추진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트럼프는 21일 트루스 소셜에 "괜찮게 들린다"라고 썼다.
정회원이 되든 준회원이 되든, 영연방 가입이 미국의 주권을 훼손시킬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영연방은 영국왕의 왕관을 중심으로 결성돼 있다. 트럼프가 왕을 자칭하는 일까지 벌어지는 상황에서 미국이 영연방에 가입하면 왕정주의의 가치관이 미국에 퍼질 수도 있다. 또 미국 독립혁명은 영국왕의 왕관으로부터 벗어나 민주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영연방 가입은 그런 민주주의 역사와도 배치된다.
지금도 1776년 미국 독립혁명과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세계 민주주의의 고전적 사건으로 인용된다. 경제적 형평성이나 실질적 민주주의는 차치하고, 적어도 형식적 의미의 정치적 민주주의에서만큼은 미국이 세계의 롤모델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미국에서 지금 벌어지는 일들은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 이상으로 세계인들에게 충격을 준다.
트럼프발 민주주의 위기는 당장에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에게 위협적인 신호가 되고 있다. 이들과 함께 걸으며 '다양성·형평·포함'을 추구하는 DEI(diversity, equity, and inclusion) 정책도 위태해졌다.
지난 22일 자 <워싱턴포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공을 세운 원주민 나바호족 암호병에 관한 국방부 웹사이트 자료가 트럼프의 DEI 폐기정책으로 삭제됐다가 원주민들과 역사학자들의 항의로 인해 복구된 일을 전했다. 국방부 대변인은 인공지능의 한계로 인한 실수였다는 해명을 내놓았다.
트럼프의 DEI 폐기는 미국 대기업들의 반응에서도 나타난다. 이달 16일 자 <파이낸셜타임스>는 트럼프 당선 이후에 연례보고서를 제출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지수 상위 400개 대기업의 90%가 보고서 내에서 DEI에 대한 언급을 줄이거나 삭제했다고 보도했다. 인종 간의 공평한 채용이나 포상이 미국 대기업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하면, 사회 내의 가장 약한 그룹인 소수자들이 가장 먼저 위협을 받는다. 대중과 정계의 동향에 민감한 대기업들의 관심사에서 소수자들이 밀려나는 현상은 미국 민주주의에 적신호가 켜져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트럼프의 위협은 민주주의와 더불어 대외관계에 대해서도 동시에 나타난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매개로 하는 서유럽과의 전통적 동맹관계도 동요하고 있다. 지난 19일 CNN은 트럼프가 유럽사령부와 아프리카사령부를 통합하는 방안을 마련했다고 보도했다. 미군 유럽사령관이 나토군을 지휘하는 유럽연합최고사령관을 겸직해 왔음을 감안하면 이 같은 개편은 나토의 위상을 떨어트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동맹인 서유럽 국가들이 전통적으로 두려워하는 러시아를 편들고 있다. 그가 지난 18일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에너지·인프라 분야의 휴전에 합의한 것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공격으로부터 지키고자 하는 핵심 시설을 보호해 주는 격이 됐다는 미국 언론들의 자조 섞인 비판이 있었다. 우방과의 관계에서는 한 푼의 손해도 입지 않으려 하는 트럼프가 러시아와의 관계에서는 통 큰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외에도 주일미군 전력 증강의 중단이나 캐나다 흡수 발언 등으로 동맹관계를 약화시키거나 훼손하는 트럼프는 유럽의 극우세력에 대해서는 꽤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동유럽의 대표적 극우 정치인인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와는 이전부터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다. 지난해 9월 10일(현지) 해리스 후보와의 텔레비전 토론회 때는 오르반이 자신을 지지한다는 말을 했다.
J.D 밴스 부통령은 독일 조기총선 9일 전인 지난달 14일(현지) 뮌헨을 방문해 극우정당인 독일대안당의 엘리스 바이델 공동대표에게 힘을 실어줬다. 그곳에서 밴스는 극우세력의 국정 참여를 차단하는 방화벽 시스템을 비판했다. 머스크도 지난 1월 9일(현지) 엑스로 생중계된 바이델 공동대표와의 대담에서 "독일대안당에 투표할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고 촉구했다.
기존 동맹들과 거리를 두고 극우세력과 러시아를 가까이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은 미국의 리더십을 당연히 훼손한다. 1945년 이래 미국이 구축한 지위를 일거에 허물 수 있는 일이다. 더군다나 아직은 소수파인 극우정당들과 손잡고 유럽의 주류세력과 척을 지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이로울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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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월 20일 미국 백악관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을 ‘왕’(King)이라고 표현한 발언과 함께 왕관을 쓴 트럼프 대통령의 일러스트를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
ⓒ 백악관 |
예일대 로스쿨 폴차이차이나센터의 선임연구원이자 국제앰네스티 아시아태평양국의 전직 국장인 니콜라스 베클린(Nicholas Bequelin)이 쓴 '트럼프의 혼란스러운 외교정책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이 글은 트럼프의 세계전략을 미국 국내의 정권 경쟁이라는 관점에서도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한다.
베클린 연구원은 "트럼프의 국내 및 외교정책은 자주 묘사되는 것처럼 순전히 혼란스럽거나 비이성적이거나 오도된 것이 아니라, 실상은 정권 경쟁의 논리와 완전히 일치하며 세계적인 독재세력에 대해 부양책을 제공한다"라고 평한다.
그는 외부의 극우세력을 지원하는 것이 트럼프의 국내 기반 강화에 유리하다고 말한다. "트럼프에게는 국제질서에서 민주주의가 행사하는 권력이 적으면 적을수록 국내에서 제도적 안전판을 해체하는 것이 더 쉬워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국제사회에서 민주주의의 힘을 떨어트리는 것이 미국 내의 민주주의를 약화시키고 트럼프의 지배력을 강화시킨다는 지적이다.
베클린은 유사한 정치체제를 가진 나라들의 상호 응집이 갖는 효과에 주목할 것을 권고한다. "한 국가가 민주주의로 전환되면 민주주의국가들의 꽤 동질적인 공동체에 거의 기계적으로 수용된다"라면서 이런 국제적 응집이 특정 국가 내에서 독재를 견제하는 데 기여한다고 지적한다.
김대중의 민주주의 투쟁은 한국인들의 지지뿐 아니라 세계 민주진영의 지원도 받았다. 이는 한국의 민주주의 정당이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한국의 노동운동과 언론운동 역시 국내 지지뿐 아니라 국제적 응원도 받는다. 한국의 노동·언론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는 외부의 논평이 한국 정부의 탄압을 다소라도 위축시키는 효과를 발휘할 때가 있다. 비슷한 정치체제를 가진 국가들 사이에서는 이런 연대 시스템이 작동한다.
지금 트럼프가 하는 일은 민주주의 진영 간의 그 같은 응집을 방해함으로써 미국 내에서 반대 세력을 약화시키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 <포린 폴리스> 기고문의 메시지다. 미국 민주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외부의 에너지가 국내에 유입되지 못하게 막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취지의 지적이다.
트럼프가 전통적인 동맹들과의 관계를 교란시키면 이런 나라들과 미국 사이에 존재하는 민주주의 연대가 약화되고, 외국 극우세력과의 교류를 심화시키면 그가 선호하는 이념이 미국 내에 확산될 수 있다. 위 기고문은 그런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가질 것을 주문한다.
그런데 트럼프가 세계의 민주주의 연대를 악화시키면 그로 인한 부작용이 미국에서만 생기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트럼프로 인해 세계의 민주주의 시스템이 훼손되면 한국과 국제사회의 민주주의 네트워크도 타격을 입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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