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는 법률 용어들 [김선걸 칼럼]
최근 몇 달간 난생처음 보는 법률 용어를 많이 접했다.
구속기산일, 체포적부심, 강제구인, 탄핵소추-심판-결정, 각하-기각-인용, 구속취소 청구, 권한쟁의 심판, 위헌법률 심판 제청….
법 없이 살 만한 평범한 시민도 구속기산일 계산법을 공부하게 됐다. 현직 대통령 구속취소 논란 때문이다. 이게 정상인가 싶다.
민주주의는 ‘법의 지배(Rule of Law)’라는 개념을 근간으로 한다. 법이 모든 시민에게 동등하게 적용되고, 권력자의 자의적 행위를 제한하기 위해서다.
‘법의 지배’는 적용 과정에서 법조인들의 해석과 실행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법 적용을 남용하거나 잣대가 너무 세밀해지면 국민들은 ‘과잉 사법’에 시달리게 된다. 법기술을 활용해 이권을 추구하거나 처벌을 피해 가는 ‘법꾸라지’들도 설치게 된다.
지금 한국이 딱 그 처지다. 탄핵 정국도, 야당 대표의 재판도 ‘정의’라는 큰 기준은 안 보이고 공학적인 법기술의 향연이 시전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29회에 이르는 탄핵 시도를 보자. 민주당 내부에서도 과도하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그런데 탄핵을 담당한 변호사 비용은 국민의 혈세로 지급됐다고 한다. 그중엔 우리법연구회 등 친야 성향의 변호사들이 많았다. 소모적인 ‘과잉 사법’ 이면에 이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최근 상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도 이런 측면이 있다. 법이 시행되면 각 기업의 이사들은 소액주주들로부터 소송당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몇몇 대기업은 이사와 변호사를 1 대 1로 붙이는 방안까지 고려 중이다. ‘과도한 소송 비용’은 상법 개정 반대 측의 주요 근거였다. 대비하는 차원에서 이미 기업별로 수억원씩 비용이 든다. 실제 소송이 걸리면 부담이 몇 배 커진다. 그 돈은 애초에 주주에게 배당하거나, 직원들에게 임금 줄 돈이다. 국민들 몫을 변호사들이 가져가는 셈이다.
‘과잉 사법’과 이에 따른 ‘국민 부담’을 얘기하자면 끝이 없다. 그 절정은 문재인 정부의 ‘국정농단 수사’였다. 탄핵에 기업들을 엮어넣으면서 이재용 삼성 회장, 신동빈 롯데 회장 등이 구속됐고 다른 대기업들도 강도 높은 수사를 받았다. 기업 활동이 3~4년 동안 정지될 정도의 충격을 줬고 삼성전자 등의 핵심 역량이 이때 망가졌다는 평가가 정설이다. 비용 부담을 떠나 성장 잠재력이 훼손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펌은 떼돈을 벌었다. 국정농단 수사 이후 2017년 김앤장변호사 사무소는 연매출 1조원을 처음 넘었고, 삼성 임원진 등 굵직굵직한 사건을 수임한 태평양도 당시 수백억원을 추가로 벌어들이며 급성장했다. 임금으로, 배당으로, 사회 기여로 분배될 기업 재원을 로펌이 앗아간 셈이다.
근본 문제는 절충하고 화해하고 해결할 만한 포용성이 사라진 점이다. 최근 대한민국 정국은 국운을 가를 모든 이슈가 법률가 출신의 대통령과 야당 대표에 의해 재판정까지 간다는 점이다. 평범한 국민이 평생 들어보기 힘든 구속기산일을 공부하게 된 이유다. 정국뿐 아니라 사회 곳곳이 비슷하다. 정치의 실종이 사회를 분열시키고 법률 시장만 키운 셈이다.
생각해 보라. 한 가정이 모든 이슈를 재판정으로 끌고 가면 어떻게 될까. 기업이 모든 문제를 법원에 가서 해결하면 살아남겠는가.
진정한 지혜와 제대로 된 정치가 필요한 시대다. 솔로몬 왕이 서로 아이의 엄마라고 주장한 여인들에게 ‘아이를 둘로 갈라 가져라’고 판결한 것은 법기술이 아니라 지혜였다. 양쪽이 끝까지 가면 아이가 둘로 갈리는 것 말고 다른 해법이 뭐가 있을까.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02호 (2025.03.26~2025.04.0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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