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드축제로 유명한 보령의 조금 색다른 이야기

이영천 2025. 3. 22.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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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원류인 보령읍성과 천수만을 지킨 충청수영성

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군데군데 허물어진 오랜 성터로 향하는 발걸음이, 시간의 무게추가 달린 듯 무겁기만 하다. 장돌뱅이들이 흙먼지 꽤 일었을 길 끝에, 2층 문루의 낮은 성벽이 소소하다. 마을은 보령리이고 성곽은 보령읍성이다. 이곳이 보령의 원류다. 보령은 이곳 주포면 보령리에서 유래했다.

읍성 남문 해산루 앞 삼거리가 한적하기 그지없다. 이문구 선생이 관촌수필에서 말한 '실향민'이 이 읍성엔 또 얼마였을까를 곱씹으며 성곽으로 걸음을 옮긴다.

보령의 첫인상은, 온통 관촌수필 차지다. 지금이야 고속도로로 대천이란 곳을 무시로 지나치지만, 예전엔 큰맘 먹어야 다녀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니 글을 통해 상상하는 수밖엔….
▲ 대천 갈머리(冠村) 이문구 선생의 고향 갈머리(보령시 대천2동) 동구에 세워진 관촌수필 길. 사진 우측으로 관촌과 선생의 생가가 얼핏 보인다.
ⓒ 이영천
몇 편에 불과한 선생의 문집 중 관촌수필을 우리 문학 최고봉 중 하나로 손꼽는다. 책으로 만난 첫 느낌이 생생하다. 세세한 이야기보다, 글 읽는 맛이 무언지 감각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8편 중 제1필 일락서산(日落西山)에 선생의 고향 마을이 묘사되어 있다.

왜놈 설날이라며 할아버지가 경멸하던 비 내리는 1월 3일 장항선을 타고 고향을 찾는다. 장항선은 한내읍(대천) 머리맡인 갈머리(冠村) 모퉁이를 돌아나갔다. 갈머리가 선생 고향이다. 마을 아래 대천역에서 내려 걸었을 터이다. 그때의 장항선과 역이 지금은 옮겨졌고, 대천역은 문화원이 되었다.

일락서산 당시도 마을은 도회지 물이 한참 들었던 모양이다. 어린 시절 추억이 물씬 밴, 토정 이지함 선생이 꽂은 지팡이가 아름드리였다는 왕소나무는 사라지고 없다. 변해버린 추레한 옛집에선 비감에 젖는다. 그러면서 완전히 '타락한' 동네라며 한탄한다.

비 내리는 한겨울 고향에서 급기야 조상 무덤밖에 남겨둔 게 없는 실향민이라며 자조한다. 그처럼 타락(?)해 버린 고향 풍경에서 그 자신 '그토록 처연하고 헙헙하며 외로울 수밖에 없던' 소회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런 관촌마을이 이젠 더 조밀한 도시가 되어버렸다. 마을이 이럴진대 돌로 굳세게 쌓았던 읍성이야…
▲ 보령현(1872년 지방지도) 보령현이 압축적으로 표현된 옛 지도. 좌측이 오천항이 있는 충청수영성이고, 우측이 주포면의 보령읍성이다. 지도 좌측 아래 물길 셋이 모이는 곳이 옛 대천읍인 시가지로 당시엔 한적하기 그지 없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학교 차지가 되어버린
읍성이 온통 학교다. 남서쪽은 초등학교 북서쪽은 중학교 차지고, 나머지는 그나마 울울한 숲이다. 주포초가 1911년이니 강제 병합 직후에 곧장 읍치와 성곽 훼철에 나섰음이 유추된다.
▲ 해산루 보령읍성 정문이자 남문인 해산루. 문루 뒤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로 드는 길이 갈라진다. 문루와 이어지는 낮은 성벽이 소소하다.
ⓒ 이영천
이 사실에서 보령의 지방 권력은 물론 전통과 권위, 문화를 지워내려는 흉측한 일제의 발톱이 느껴진다. 전쟁이 끝난 1953년 보령중학교가 이전해온다. 이로써 읍성을 조밀하게 채웠을 옛 관청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보령현이 1895년 군이 되고, 1914년 남포현과 주변을 흡수한다. 이때 군청이 대천으로 옮겨간다. 성곽 훼철과 권위를 지워내려는 일제의 의도는 전국적이었으니 새삼스러울 건 없다. 그러함에도 옛 모습이 지워진 고향에서 실향을 절감한 이문구 선생처럼, 당시 읍성은 어떤 박탈감에 휩싸였을까. 곳곳이 헐리고 낮아진 성벽에서 보령리 주민들은 허허로움을 어떻게 달랬을까.
▲ 보령읍성(1872년_지방지도_부분) 4각의 읍성 성곽과 남문의 표현이 심플하다. 성안 관청도 절제되어 표현되었다. 2개의 홍살문이 이채롭다. 지금은 사라진 향교가 남문 앞에 그려져 있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이문구 선생처럼 누구나 마음속에 폐허를 지니고 사는지 모른다. 나라 잃은 피식민지 백성의 설움과 폐허의 심정을 파고든 노래 '황성옛터'처럼 말이다. 텅 빈 폐사지가 그렇고, 관촌수필에 사라진 왕소나무도 마찬가지다. 하물며 그럴진대 수백 년 믿어왔던 전통의 권위와 중심이 실체마저 사라져 버렸으니 얼마나 헛헛했을까. 그 속내를 가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책 보따리를 메고 읍성 남문으로 수없이 드나들었을 까까머리 아이들을 떠올려 본다. 시절 따라 모든 게 변해왔고, 세월은 그렇게 115년이 지났다. 읍성 훼철과 궤를 같이했으니, 아프지만 역사로 인정해야 할까. 900m 남짓 성곽이 의젓하다. 갈 수 없는 곳은 바깥길에서 눈으로 만져만 보아도 충분하다. 왜구 침략을 막기 위해 주변 산성을 옮겨, 1430~1432년에 쌓았다.
▲ 보령읍성 동문 보령읍성 동문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성곽과 주변 모습.
ⓒ 이영천
화려했던 흔적을 옛 지도에서 간신히 읽어낼 뿐이다. 옛 보령부 위세와 영화가 단순화한 지도에 역력하다. 지금은 대처가 되어버린 대천은 한적하기 그지없는 마을과 평야였다. 옛 지도엔 보령읍성과 4각의 충청수영이 지도를 가득 메우고 있다. 그 위용이 문득 궁금해진다.

오천항 가는 길

읍성에서 북서로 길을 잡는다. 산과 마을 사이로 구불거리며 지나는 2차선 도로의 정취가 아련하다. 속도가 미덕인 시대에, 이런 길에선 모든 게 너그러워진다.

느리게 가다 보니, 방조제에 갇힌 호수가 나타난다. 삼거리 오른쪽이 도미항길이다. 길옆이 도미항마을이고, 매립되었음이 분명한 벌판이 신촌들이다. 이곳을 '도미부인' 설화의 고장으로 추정한다. 알량한 권력과 욕망을 앞세운 왕을 속이며, 목숨 걸고 지켜내려 했던 정절과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다.
▲ 도미부인 사당 오천항이 있는 땅으로 깊이 파고든 바다에, 백제의 '도미부인' 설화가 서려 있다.
ⓒ 보령시청
이곳이 과연 그 무대일까. 소성리 뒷산에 '정절사'라는 도미부인사당을 지은 보령시 의도가 엿보인다. 이를 뒷받침 하는 도미항, 미인섬(빙도), 원산도 등이 천수만과 주변에 아직 그대로다. 그보다 땅으로 파고든 바다가 만들어 낸 아름다운 이곳에, 굳이 방조제를 쌓아야 했는지 의아하다.
홍·수해가 어쩌고 수자원이 저쩌고 판에 박힌 이유를 능가하는 어떤 핑계라도 있었을까. 글쎄다. 그 옛날 광천에 새우를 좌르르 쏟아낸 물길이다. 쏟아진 새우는 곰삭은 젓갈이 되었다. 거기서 홍주가 지척이니, 서해안 일대를 통괄하던 홍주목에서 바다로 나가는 주요 교통로였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 오천항과 영보정 땅으로 깊이 파고든 만(灣) 한편에 오천항이 앉았다. 충청수영성의 상징과도 같은 영보정이 석양을 받아 이룬 풍경이 아름답다. 멀리 천수만이 보인다.
ⓒ 보령시청
그런 아쉬움에도, 땅으로 파고든 바다에 넋을 놓는다. 그 한쪽으로 오천항이 앉았다. 좁은 바다에 유유자적 음풍농월하듯 배들이 떠 있다. 쪽빛 바다 위 하얀 배들이 그려낸 그림이 평화롭다. 아름다운 항구의 대명사 나폴리가 이곳에 버금갈까?

충직한 노장 같은 충청수영성

성곽이 우람하게 다가든다. 남-서는 산세에 의지하고 동-북으로 열린 바다를 껴안았다. 산이 팔 벌려 감싼 개활지가 수백m다. 잇닿아 둥글게 감긴 산세는 성 쌓기에 최적이고, 밖은 천혜의 항구라 할 만하다.

동-북으로 길게 들어온 만(灣)의 급경사고 안쪽은 펑퍼짐한 구릉이다. 남측은 산 사이 고갯길로 열리고 닫혀 방어에 유리하다. 편편한 서문 밖은 군사훈련은 물론 전투선 정박에 유리한 펄이다. 이곳이 충청수영성이다.
▲ 충청수영성(1872년_지방지도_부분) 5개의 성문을 둘러 싼 성곽이 잘 표현되어 있다. 길고 좁은 만(灣)에 해문이 보이고, 동-북을 잇는 절벽의 옆에 영보정과 고소대(姑蘇臺)가 표현되어 있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옛 지도엔 북문-동문-남문-소서문-서문과 바다의 해문이 뚜렷하다. 성안 언덕 위 영보정(永保亭)과 능허각을 중심으로 한가운데 관아와 내아를 앉히고 주변을 관청 건물이 빼곡하게 감쌌다. 능허각 좌측 천혜의 낭떠러지에 고소대를 두어 암문으로 통하게 했다. 성 둘레가 1.6km다.
곳곳이 사라졌어도 남은 성벽은 우람하다. 소서문과 서문 자리는 시가지로 변했다. 바다에 잇닿은 언덕 위 성벽의 위용이 듬직하다. 영보정이 앉은 급경사를 떠받친 수직의 성벽은 흰 수염 휘날리는 노장처럼 늠름하다.
▲ 영보정 충청수영성에서 으뜸으로 꼽는 영보정. 수많은 시인 묵객과 세도가들이 이 정자에서 풍취를 감상했다. 동-북으로 이어지는 해안 절벽을 따라 길게 뻗은 성벽이 노(老) 장군의 위용처럼 늠름하다.
ⓒ 이영천
수영성을 어느 노장이 지휘한다. 유비에게 황충이 있었다면, 임진란의 조선엔 이 장수가 있었다. 이순신보다 31살이나 연장자다. 무관으로서 맡았던 직책도 엄중하다. 육군은 물론 전라·경상의 수군을 거느렸던 경력의 소유자다. 무장으로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실전의 표본이다.

왜란 발발 1년 전, 이순신은 이 노장을 자문역인 전라좌수영 조방장으로 초빙한다. 노장은 이에 기꺼이 응한다. 직급이나 체면, 나이보다 나라 지키는데 필요한 일과 역할이 먼저였다.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이 사용한 배와 대포는 노련한 정걸(丁傑)이라는 충직한 장군에 의해 재탄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 충청 수군절도사였으니, 단단하고 늠름한 수영성 기상이 흡사 정걸 장군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아 보인다. 충청 수사를 맡게 된 것도 이순신의 천거였고, 위급에 처한 행주산성 전투를 역전시킨 것도 그의 공이다. 연이어 한양탈환에 왜군을 끈질기게 공격한 것도, 이순신의 청으로 한산대첩에 다시 출전한 것도 오로지 장군뿐이었다.
▲ 충청수영성 서문 충청수영성 5개 문루 중 유일하게 남은 서문의 홍예(무지개). 옛 성곽의 풍취가 느껴진다.
ⓒ 이영천
육지로 파고든 바다가 짙어 푸르다. 만 건너 천북에 수영성을 두지 않았던 이유가 이해된다. 그 너머 홍성호로 변한 좁은 만이 공격 통로가 될 염려 때문이다.

세곡선 항로인 천수만 어귀가 충청수영이다. 안면도 '쌀 썩은 여'가 늘 걸림돌이었다. 이런 이유로 천수만에서 가로림만까지 운하를 파 보았으나 실패한다. 대신 안면의 판목을 파 뱃길을 낸다. 그 바람에 바다로 길게 뻗은 땅이 섬이 되었다. 안면도다. 천수만 초입 수영성은 그런 필요에 복무했으리라. 차분한 보령읍성에 비해, 수영성은 물고기처럼 퍼덕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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