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드축제로 유명한 보령의 조금 색다른 이야기
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군데군데 허물어진 오랜 성터로 향하는 발걸음이, 시간의 무게추가 달린 듯 무겁기만 하다. 장돌뱅이들이 흙먼지 꽤 일었을 길 끝에, 2층 문루의 낮은 성벽이 소소하다. 마을은 보령리이고 성곽은 보령읍성이다. 이곳이 보령의 원류다. 보령은 이곳 주포면 보령리에서 유래했다.
읍성 남문 해산루 앞 삼거리가 한적하기 그지없다. 이문구 선생이 관촌수필에서 말한 '실향민'이 이 읍성엔 또 얼마였을까를 곱씹으며 성곽으로 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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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천 갈머리(冠村) 이문구 선생의 고향 갈머리(보령시 대천2동) 동구에 세워진 관촌수필 길. 사진 우측으로 관촌과 선생의 생가가 얼핏 보인다. |
ⓒ 이영천 |
왜놈 설날이라며 할아버지가 경멸하던 비 내리는 1월 3일 장항선을 타고 고향을 찾는다. 장항선은 한내읍(대천) 머리맡인 갈머리(冠村) 모퉁이를 돌아나갔다. 갈머리가 선생 고향이다. 마을 아래 대천역에서 내려 걸었을 터이다. 그때의 장항선과 역이 지금은 옮겨졌고, 대천역은 문화원이 되었다.
일락서산 당시도 마을은 도회지 물이 한참 들었던 모양이다. 어린 시절 추억이 물씬 밴, 토정 이지함 선생이 꽂은 지팡이가 아름드리였다는 왕소나무는 사라지고 없다. 변해버린 추레한 옛집에선 비감에 젖는다. 그러면서 완전히 '타락한' 동네라며 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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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령현(1872년 지방지도) 보령현이 압축적으로 표현된 옛 지도. 좌측이 오천항이 있는 충청수영성이고, 우측이 주포면의 보령읍성이다. 지도 좌측 아래 물길 셋이 모이는 곳이 옛 대천읍인 시가지로 당시엔 한적하기 그지 없다. |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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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산루 보령읍성 정문이자 남문인 해산루. 문루 뒤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로 드는 길이 갈라진다. 문루와 이어지는 낮은 성벽이 소소하다.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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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령읍성(1872년_지방지도_부분) 4각의 읍성 성곽과 남문의 표현이 심플하다. 성안 관청도 절제되어 표현되었다. 2개의 홍살문이 이채롭다. 지금은 사라진 향교가 남문 앞에 그려져 있다. |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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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령읍성 동문 보령읍성 동문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성곽과 주변 모습. |
ⓒ 이영천 |
오천항 가는 길
읍성에서 북서로 길을 잡는다. 산과 마을 사이로 구불거리며 지나는 2차선 도로의 정취가 아련하다. 속도가 미덕인 시대에, 이런 길에선 모든 게 너그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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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미부인 사당 오천항이 있는 땅으로 깊이 파고든 바다에, 백제의 '도미부인' 설화가 서려 있다. |
ⓒ 보령시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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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천항과 영보정 땅으로 깊이 파고든 만(灣) 한편에 오천항이 앉았다. 충청수영성의 상징과도 같은 영보정이 석양을 받아 이룬 풍경이 아름답다. 멀리 천수만이 보인다. |
ⓒ 보령시청 |
충직한 노장 같은 충청수영성
성곽이 우람하게 다가든다. 남-서는 산세에 의지하고 동-북으로 열린 바다를 껴안았다. 산이 팔 벌려 감싼 개활지가 수백m다. 잇닿아 둥글게 감긴 산세는 성 쌓기에 최적이고, 밖은 천혜의 항구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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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수영성(1872년_지방지도_부분) 5개의 성문을 둘러 싼 성곽이 잘 표현되어 있다. 길고 좁은 만(灣)에 해문이 보이고, 동-북을 잇는 절벽의 옆에 영보정과 고소대(姑蘇臺)가 표현되어 있다. |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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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보정 충청수영성에서 으뜸으로 꼽는 영보정. 수많은 시인 묵객과 세도가들이 이 정자에서 풍취를 감상했다. 동-북으로 이어지는 해안 절벽을 따라 길게 뻗은 성벽이 노(老) 장군의 위용처럼 늠름하다. |
ⓒ 이영천 |
왜란 발발 1년 전, 이순신은 이 노장을 자문역인 전라좌수영 조방장으로 초빙한다. 노장은 이에 기꺼이 응한다. 직급이나 체면, 나이보다 나라 지키는데 필요한 일과 역할이 먼저였다.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이 사용한 배와 대포는 노련한 정걸(丁傑)이라는 충직한 장군에 의해 재탄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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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수영성 서문 충청수영성 5개 문루 중 유일하게 남은 서문의 홍예(무지개). 옛 성곽의 풍취가 느껴진다. |
ⓒ 이영천 |
세곡선 항로인 천수만 어귀가 충청수영이다. 안면도 '쌀 썩은 여'가 늘 걸림돌이었다. 이런 이유로 천수만에서 가로림만까지 운하를 파 보았으나 실패한다. 대신 안면의 판목을 파 뱃길을 낸다. 그 바람에 바다로 길게 뻗은 땅이 섬이 되었다. 안면도다. 천수만 초입 수영성은 그런 필요에 복무했으리라. 차분한 보령읍성에 비해, 수영성은 물고기처럼 퍼덕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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